한국문화사

불교 미술, 상징과 염원의 세계를 내면서

사찰은 불교의 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복합 공간으로, 예배와 수행을 위한 전각을 필요로 한다. 아울러 신앙의 대상인 불보살 및 각종 신상(神像)을 조각이나 그림으로 조형하여 전각에 모시는데, 건물 안팎 또한 각종 문양과 상징적인 이미지로 장식하기도 한다. 기록에 의하면 이미 석가모니가 재세(在世)할 때에 각종 장식으로 꾸민 전각이 있었다고 하며, 그 형상을 추정해 볼 만한 미술품이 지금도 적지 않게 남아 있다.

불교의 조형 활동은 석가모니가 입멸(入滅)한 후 더욱 성행하여 다양한 불상과 보살상은 물론 탑에 이르기까지 불교 신앙과 이념의 구현 및 신앙 행위에 적합한 각양의 조형품들이 양산되었다. 그렇지만 이 책에서는 다양한 시각 세계를 만들어 낸 불교의 모든 조형품 가운데 건조물, 불상, 불화, 의식과 같이 공개성이 강한 제한적인 사찰 공간 구성 요소들을 대상으로 불교 미술이 상징하고 염원한 세계를 추적해 보았다.

인간은 누구나 삶과 죽음을 끊임없이 의식하고 고민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는 죽음에 이르지 않고는 아무런 답을 얻을 수 없는 난제이겠지만 수많은 삶과 죽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표준 방식이 마련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불교는 죽음에 이르지 않아도 삶과 죽음의 방식을 알 수 있는 방편을 제시한 종교이다. 현세와 내세에서의 구복 방편을 아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으며, 이를 시각적으로도 설명해 주고 있다. 이 책에서는 현세와 내세를 포함한 모든 유형의 시각 미술의 내용과 조형화 과정에 관하여 살펴보았다.

제1장 ‘사찰의 공간 구성과 석조물의 상징’에서는 불교의 교주인 석가모니를 모시고 예배와 교화(敎化)를 행하는 사찰 공간의 구성과 상징성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사찰(寺刹)은 본래 스님과 신도가 모여 사는 곳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신앙의 중심인 불상과 탑을 봉안하고, 승려들의 수행과 불법을 가르치는 기능을 지닌 공간으로 변화하였다.

사찰 공간에는 의례를 행하는 전각과 장엄 또는 신앙의 대상이 되는 구조물들이 일정한 축선(軸線)을 중심으로 배치된다. 모든 구조물은 이념의 구현을 바탕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아름다움이라는 시각적인 즐거움과는 별도로 불교가 표방하는 상징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사찰을 구성하는 요소는 우선, 부처님의 교리를 가르치기 위한 강당(講堂)과 불상을 봉안하는 금당(金堂)을 비롯하여, 석탑, 종각, 석등, 경루(經樓), 요사채 등이 필수적이었다. 가람 배치(伽藍配置)는 이들을 적절한 공간에 배치하고, 활용하기 위한 일정한 규약을 제도화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가람 배치는 사찰의 위치에 따라 산지 가람과 평지 가람으로 구분되는데, 대체로 불교 전래 초기에는 평지 가람이었으나 점차 산지 가람으로 옮겨 갔다.

금당은 탑과 일체감을 유지하며 사찰 공간 분할의 기본 축선을 형성한다. 그만큼 금당과 탑의 관계는 밀접한데, 양자의 구성 방법은 크게 일탑삼금당형(一塔三金堂型), 일탑일금당형(一塔一金堂型), 이탑일금당형(二塔一金堂型), 당·탑병렬형(堂·塔竝列型)으로 나눌 수 있다.

탑(塔)은 석가모니의 사리를 봉안한 절대적 경외의 대상물로 불상과 상 응하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표면에는 사천왕상(四天王像), 팔부신중상(八部神衆像)처럼 불법 수호와 장엄을 위한 각종의 도상을 새기기도 한다. 부도(浮屠)는 입적한 스님의 장골(藏骨)을 위한 구조물로 제자들은 물론 신도들의 신앙의 대상물이고, 석비(石碑)는 사찰의 내역 및 스님들의 행적을 기록한 주요 역사 기록물이다. 석비의 머릿돌과 받침돌인 이수(螭首)와 귀부(龜趺)는 용과 거북의 형상을 하는데, 거북과 용은 장수하고 물, 지상, 천상의 세계를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지닌 동물로 아마도 죽은 자에 대한 영원불멸(永遠不滅)의 바람을 담고자 하였던 것 같다.

이처럼 사찰의 공간을 구성하는 모든 구조물은 불교 이념 구현을 위한 기능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포교와 교화에 적합한 역할을 담당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변화를 모색하여 왔다.

제2장 ‘현세 구복의 불교 미술’에서는 현세 구복의 신앙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만들어 낸 미술 문화의 종류와 성격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종교 미술은 종교가 존재하는 모든 곳에 있었으며, 기본적으로 각 종교의 이념을 시각적으로 보여 주는 역할을 하였다. 현세 구복 신앙에 의한 조형 활동은 단순히 복을 비는 행위 또는 일족(一族)이나 신앙 집단의 특정한 목적에 의하여 이루어졌는데, 모두 현세에 선업(善業)을 쌓음으로써 내세에 그 과보(果報)를 받으려는 신앙 행위의 한 유형이라 할 수 있다.

현세 구복의 기원을 가장 자연스럽게 받아줄 수 있는 보살은 바로 ‘자비’를 중요한 속성으로 한 관음보살이다. 『청관음보살소복독해다라니주경(請觀音菩薩消伏毒害陀羅尼呪經)』(이하 『청관음경』)은 관음에 관한 의식을 규정한 경전으로 인간에게 미칠 해악을 없애 주도록 주문을 외워 관음을 청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따라서 『청관음경』은 『법화경(法華經)』을 중심으로 전개된 관음 신앙을 의식을 통해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신앙의 방법을 알려 준 경전이다. 관음의 역할과 효험은 대단하다고 믿어 무수한 고난에서 구원해 주기 위하여 그때그때 상황에 맞추어 자유자재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구자(求子)나 순산(順産)을 기원하는 현실적인 염원 대상이기도 하였다.

이와는 달리 위협적인 모습의 사천왕상은 부처님의 가호로 나라를 지키겠다는 호국의 염원을 담은 현세 구복적 불교 미술의 하나이다. 사천왕은 원래 인도의 토착 방위신(土着方位神)이었으나 불교에 포함된 이후 사방을 수호하는 호법신(護法神)으로 자리 잡았다. 『금광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은 사천왕의 소의 경전(所依經典)으로, 사천왕이 왕과 백성을 지켜 평안하게 하고, 적이 스스로 물러가도록 하여 온갖 환난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신라는 이를 바탕으로 사천왕을 부처님의 법과 나라만이 아니라 호국의 신으로 받들기도 하였다. 다량의 녹유사천왕상전(綠釉四天王像塼)이 발견된 경주 사천왕사(四天王寺)가 대표적인 예로, 이곳은 명랑 법사(明朗法師)가 당나라의 침입에 대비하여 세운 호국 사찰이다.

고대, 혹은 봉건제 사회에서는 어느 나라든 임금님의 만세(萬歲)가 곧 나라의 안녕을 뜻한다. 따라서 불교 미술 중에도 단순히 나라를 외적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호국만이 아니라 왕의 안녕을 빌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된 사례도 있다. 한편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에는 특히 소형 금동상이 많이 만들어졌는데, 이는 대개 개인이 몸에 지니고 다니는 호신불(護身佛)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호신불의 제작은 고려시대에도 이어졌으며 언제나 부처님의 가호를 받기를 간절히 희구한 현세 이익적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다.

불교는 시대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개인, 집단, 국왕 및 나라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 역할을 하여 왔다. 이렇듯 현세에서 복 받기를 바라는 현세 구복의 미술이야말로 인간 세상의 다양한 면모와 그 신앙을 잘 드러내 주는 증거이며, 인간과 불교가 존속하는 한 현세 구복의 미술 역시 불법(佛法)의 바퀴처럼 멈추지 않고 신앙되며 제작될 것이다.

제3장 ‘극락세계의 인식과 미술’에서는 기록을 통한 극락(極樂)의 모습과 왕생 방법, 그리고 형상화된 아미타여래의 세계에 관하여 살펴보았다.

불교에서의 극락과 지옥, 즉 선과 악의 양극화는 내세의 존재 유무를 떠나 현세에서의 선행(덕)과 불교에 대한 경외심을 쌓게 하기 위한 방편이다. 특히, 극락은 긍정적 사후 세계의 구현이라는 목적에서 실체적인 것으로 강조되어 왔고, 시대나 종파(宗派)에 관계없이 그에 대한 신앙 또한 성행하였다.

정토(淨土) 관련 경전인 『아미타경(阿彌陀經)』에 의하면 극락은 극락정토(極樂淨土), 안양세계(安養世界), 서방정토(西方淨土) 등으로 불리며, 아미타여래는 무량광(無量光), 무량수(無量壽)로도 지칭된다. 이는 한량 없는 빛으로 시방(十方)을 비추어 모든 장애를 제거하며, 극락의 모든 중생은 수명에 한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방 극락세계를 묘사한 관경서분변상도(觀經序分變相圖), 관경십육관변상도(觀經十六觀變相圖)는 정토 삼부경(淨土三部經) 가운데 하나인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의 내용을 도설(圖說)한 대표적인 고려 불화이다. 그러나 이들은 소의 경전이 같으면서도 화면의 구성 방법이 다른데, 이는 경전의 해석 또는 신앙의 형태에 따른 내용의 중요도에 의거하여 표현을 달리하였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극락의 조형은 조선시대에 극락구품도(極樂九品圖)와 용선접인도(龍船接引圖)가 등장하면서 매우 다양해진다. 극락구품도는 구품왕생의 정경만을 확대·묘사한 그림이며, 용선접인도는 용선과 서민의 극락왕생을 주제로 한 그림이다. 양자 모두 동아시아의 다른 나라 불교 도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조선만의 특이한 극락왕생 도상이다. 이 두 도상의 특징은 구품연지(九品蓮池)의 왕생을 강조하거나 불특정 다수의 동시 왕생을 시각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당시의 대중들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개념 적인 극락의 관상보다는 시각적·즉시적(卽時的) 왕생 실현이 훨씬 현실적이며 나아가 실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즉, 구성이 단순하고 내용 또한 알기 쉬워 불교의 대중적 교화에 훨씬 적절하여 실용성에서 뛰어났다고 판단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처럼 정토 미술은 국가, 민족, 시대에 관계없이 동일한 텍스트(경전)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지만, 신앙의 형태나 미의식에 따라 표현 방법이 다르고 계속해서 변화해 왔다. 불화를 통하여 볼 때, 우리나라의 정토 미술은 고려시대의 관념적 도상이 조선시대에 들어 서서히 서민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현실적 도상으로 바뀌었다고 볼 수 있다.

제4장 ‘불교 조각의 제작과 후원’에서는 조각 작품을 통하여 신앙과 조형 의식의 결합, 복장물, 장인의 역할, 후원자의 신분층과 시주 목적의 변화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불사(佛事)의 목적은 제한적이고 획일화되는 경향을 띠지만, 넓은 의미에서 미술품의 생산과 수용은 사회적이며 역사적인 환경에 따른 관계적 소산이다. 불교 조각의 재료와 기법은 매우 다양한데, 이는 정치적인 변화, 사찰의 경제력, 불사를 주도하는 후원자의 성격 등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복장물(腹藏物)은 불상의 몸 안에 넣는 모든 물건을 지칭하는 용어로, 복장물을 넣는 것은 고려시대부터 시행되었다. 불복장은 오장 육부를 상징하는 물품이나 각종 경전 등을 불상의 몸 안에 넣어 인간과 같은 생명력을 부여하려고 했던 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기복 신앙이 발달함에 따라 즉각적인 후원자의 서원(誓願)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교리적 개념이 강한 관념적 모습의 불상보다는 현현성(顯現性)이 뛰어난 즉물적(卽物的) 매개체의 형상화가 필요하였다. 서산 문수사(文殊寺) 금동 여래 좌상의 복장물은 고려시대 복장물 가운데 처음 그대로의 상태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사례로 제작 목적과 후원자들까지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상과 같은 불복장물의 다양한 물목(物目)은 좀 더 포괄적인 시주 형태를 통해 현세와 사후까지도 보장받으려는 신앙의 형태이며, 무엇보다도 현세의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하는 주술적 의미로 해석된다.

장인(匠人)이란 미술품을 제작하는 사람을 일컫는 용어로서 관점에 따라 제작자, 작가, 예술가라는 다양한 이름으로 부를 수 있다. 불화를 그리거나 불상을 조각하는 작업 역시 넓게는 사찰 수공업(手工業)의 일환으로 발전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불교 미술의 제작은 기술 이외에도 의식과 궤범(軌範)이 매우 까다로울 뿐만 아니라, 일정한 신앙심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승려들에게 가장 적합한 분야였을 것이다. 통일신라시대의 조각가인 양지(良志)가 바로 최초의 승려 장인이다.

후원(後援)은 물건이나 돈을 베푸는 일을 말하며 베푸는 사람은 후원자라고 부르는데, 기록에 의하면 단월(檀越), 단나(檀那), 단가(檀家) 등으로 불렀으며 이 밖에도 공덕주(功德主), 시주자(施主者)라는 명칭도 널리 쓰였다. 후원자들은 시대에 따라 다른 양상을 보이는데,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에는 왕실이나 귀족층이 호국 불교적인 불사에 많은 지원을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후원자 계층이 다양해지는데, 왕실과 귀족층은 물론 원나라 황실과 귀족들이 불사에 참여하여 국제성까지 띠고 있었다. 또한, 불화나 사경(寫經), 불복장의 후원자들 가운데는 군부인(郡夫人)이라는 명칭이 많이 등장한다. 이는 고려 후기 불사에 여성의 참여가 높았음을 알려 주는 동시에, 남편의 지위와 경제력이 곧 그 부인에게 직결되는 당시 사회의 구조적 현상을 암시해 준다. 조선시대는 건국과 더불어 유교를 중심으로 정치와 사회 질서가 개편됨에 따라 국가적인 큰 후원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시주자 계층도 전기와 후기가 전혀 다른데, 이는 불교 신앙의 변화는 물론 정치적·사회적 변화에 따른 것으로 짐작한다.

제5장 ‘불교 의례와 의식 문화’에서는 의례와 의식 각각의 종류, 절차, 구성, 조형물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불교 의식은 사람들의 기도를 불보살에게 보내는 통로로서, 나쁜 기운은 물러가고 세상에 억울함을 품은 원혼(鷞魂)은 영혼의 세상으로 돌아가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의식의 절차와 구성은 자신의 악업을 깨끗이 함으로써 수행을 대신하는 성격의 자행 의례(自行儀禮)와 보살의 힘을 빌려 현실의 고난을 타개하려는 타행 의례(他行儀禮)가 있다.

의례의 분류 기준은 고정된 것이 아니어서 어떤 한 범주에 속하는 것이 다른 범주로 옮겨 가기도 한다. 즉, 죽은 후 갚아야 할 생전의 죄값을 미리 갚는다는 데서 유래한 예수재(豫修齋)는 천도(薦度) 의례의 하나였으나, 점차 윤달에 열리는 불교의 대표적인 세시(歲時) 의례가 되었다. 또한, 음력 7월 15일 개최되는 우란분재(于蘭盆齋)는 조상의 극락왕생을 위한 천도 의례가 불교의 세시 의례이자 민간의 풍습으로 자리 잡았다.

의식이 성행하면서 지침서인 의식집(儀式集)이 간행, 유통, 보급되었다. 의식집에 대한 수요는 다수의 신도들이 일정한 순서에 따라 의식에 동참하게 된 사회 변화를 함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의식집의 간행은 불교 의식을 집대성하고 통합하고자 하는 의도와 함께 의식의 진행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였던 범패(梵唄)의 중흥에도 목적을 두고 있었다.

고려시대는 ‘의식의 시대’라고 부를 정도로 의식의 종류가 많았는데, 연등회(燃燈會), 팔관회(八關會), 인왕회(仁王會), 소재도량(消災道場)이 대표적인 4대 의식이다. 한편,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불교는 국가 종교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왕실·사대부 등 지도층의 숭불 행위는 축소되어 갔으나 역설적이게도 의식 문화를 대중 속에서 꽃피웠다. 특히, 국가가 공식적으로 불교를 지지하지는 않았으나, 임진왜란이 끝난 후 마을 공동체를 다시 수습하고 민심을 추스르기 위한 수륙재와 여러 천도 의식의 개최를 암묵적으로 후원하였다.

예불 행위가 이루어지는 사찰에는 미술·음악·공연·건축·사상 등 다양한 종류의 불교 문화재가 존재한다. 조선시대에 의식 문화가 발달하면서 사찰 안팎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대형 불화인 괘불(掛佛)은 야외 의식을 위한 대표적인 의식용 불화이며, 더불어 야외 도량을 꾸미기 위한 의식구와 장엄구들을 갖추었다.

우리나라 사찰 전각의 내부에는 중앙의 불상 앞에 놓인 불단(佛壇)과 그 좌측과 우측 벽 앞에 각각의 단이 존재한다. 전각 내에 마련된 세 개의 단은 의식 문화의 성행과 더불어 조선시대부터 나타난 특징이다. 이 삼단(三壇) 개념은 신앙과 교리의 변화 등 여러 요인에서 비롯되었는데, 새로운 도상의 불화가 그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 대표적인 불화가 바로 감로왕도(甘露王圖)이다. 우란분재와 수륙재는 큰 인기를 누리며 성행한 불교 의식으로, 음식을 베풀어 극락에 이르지 못한 채 떠도는 영혼을 구제하는 시식(施食) 의례이다. 감로왕도는 이 의식에 사용할 목적으로 그렸으며, 이처럼 새로운 도상의 불화 출현은 영혼 천도에 힘을 쏟는 조선 후기 신앙 의례의 성격을 잘 보여 준다.

불교 의식은 한 시대의 종교 자료일 뿐 아니라 해당 시기의 문화를 종합적으로 보여 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의식은 시대에 따라 종류와 성격이 변하였지만, 그 시대가 요구한 여러 기능을 수행하면서 여전히 사람들의 일상과 정신세계를 다스리는 구심점의 역할을 해 나갔다. 의식에는 그림이라는 매체가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듯이 의례와 의식의 시각 문화는 단순한 예배화와는 달리 그것이 위치하고 있던 사회 구성원과 좀 더 유연하게 소통하는 도구였다.

2007년 11월

동국대학교 교수

[필자] 정우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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