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2장 미술가의 자의식

5. 현실 참여에 나선 미술가

1970년대까지 우리나라 미술가들은 정치나 사회 현실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프롤레타리아 미술 운동이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 초반에 잠시 등장하였지만 일제의 탄압을 받아 곧 사라진 이후 20세기 우리나라 미술의 흐름은 순수 예술론이 강세였다. 미술은 서구 미술의 모방에 불과하며 순수성이라는 불문율(不文律)이 깨진 것은 1980년대에 들어와서였다. 소위 민중 미술가(民衆美術家)는 이전의 미술, 특히 1970년대의 모더니즘 미술이 메시지가 없고 현실을 외면한 엘리트 미술이라고 비판하였다. 박서보 같은 모더니즘 작가와 민중 미술 작가가 갖고 있던 의식 차이는 미술이 개인의 산물인지 공동체의 산물인지 하는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은 민중 미술의 대표적인 평론가인 김윤수의 다음과 같은 지적에서 드러난다.

미술이 당시 공동체적인 삶에 대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일제로부터 물려받은 왜곡되고 불건강한 미술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등의 문제는 도외시하고, 미술을 개인적 차원이나 사고 속에 여전히 가두어 놓고서, 말하자면 서구 모더니즘의 정신에서 그것을 지향하였다는 것이죠. 이런 측면에서 그를 의식하였건 아니하였건 역시 문화적 식민주의의 요소가 다분히 깔려 있죠.118)

1980년대에 현실 참여 의식을 갖고 있던 미술가들은 미술은 개인이 아니라 사회와 관련되며 미술가는 사회적으로 어떤 역할을 해야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작품 활동을 하기보다는 ‘현실과 발언’, ‘광주 자유 미술가 협의회’, ‘두렁’, ‘임술년’ 등 미술 단체를 통해 작품을 발표하였으며, 이 단체들은 기존의 어느 미술 단체보다도 강한 결속력을 갖고 사회 현실을 비판하고 민중의 삶에 기반을 둔 미술을 추구하였다. 민중 미술가들은 현실 참여와 민중의 입장에서 미술을 추구하는 의식을 기본적으로 같이하면서도 서로 간에 입장 차이도 보였다. 신학철이나 오윤이 개인의 조형 언어에 깊은 관심이 있었다면, 김봉준을 비롯한 ‘두렁’작가들은 대중과 소통을 중시하고 민중이 주체가 되는 미술 생산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오히려 개성이 없는 양식을 추구하였다. 이들의 작품을 통해 구체적으로 이들이 추구하는 의식세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신학철(申鶴澈, 1943∼ )은 모더니즘의 대표적인 단체였던 ‘AG(아방가르드 협회)’의 멤버로서 ‘새로운 조형 질서를 모색하고 창조’하는 데 관심을 두었고, ‘예술의 자율성’이나 ‘작가로서의 자유’를 근간으로 작업하던 작가였다. 그러던 그가 민중 미술가들과 의식을 같이하였는데, 이러한 자아의식의 변화의 계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 바 있다.

무한의 자유가 곧 절대 고독인 것 같아. 그것이 바로 내게 회의를 줬지. 자기 혼자 있는 것이고 자기 생각이지. 자기 혼자 느끼고 발상한 것이니까 남하고 관계가 안 돼. 가장 큰 문제는 현실하고 전혀 무관하다는 것이야. 나는 추상 미술 하는 사람들이 경력 쌓기와 자기 피알을 하고, 그림을 팔 때도 그림을 보고 사는 것이 아니라 피알을 통해 사는 거지. 추상 회화의 개념 자체가 가치 기준이 도대체 어디에 있느냐, 가치 척도의 기준점이 존재하지 않는 거지. 내가 생각하는 자유라는 것도 가치 기준도 없을 뿐더러 현실하고도 무관하고 공중에 떠 있는 것이지.119)

그는 미술가의 자유나 자율성이 오히려 작가로 하여금 절대 고독의 상태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대중과 소통하는 미술, 보는 사람들에게 설명이 필요 없는 미술, 사물이 가지고 있는 진실을 직접 드러내는 미술을 추구하고자 하였다.

<신학철의 변신>   
각종 인쇄 매체나 상품 광고에 등장하는 사진 이미지를 콜라주하여 제작한 작품이다. 1970년대 경제 개발로 가속화된 산업화로 인해 대량 생산과 소비 사회가 등장하면서 물질에 압도당하고 소비 욕망에 지배당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풍자적으로 표현하였다.
<신학철의 한국 근대사>   
1980년대에 신학철은 ‘한국 근대사’ 연작을 제작한다. 현대 사회와 기계 문명은 물론, 우리가 20세기에 경험한 역사적 사건을 사진과 광고 이미지를 합성하여 만들었다. 이들은 괴물 같은 형상이나 화려한 신기루처럼 표현되기도 하는데, 이 작품에서는 물질이 도시를 뒤덮고 있는 상황이 표현되었다.

신학철의 의식 변화는 이미 1970년대 후반의 ‘변신’ 연작에서 드러나기 시작하였고, 1980년대 ‘한국 근대사’ 연작에서 더욱 구체화된다. 그는 포토몽타주(photo montage) 기법을 이용한 작업을 하게 되는데, 우연히 간토 대지진(關東大地震) 기록 사진을 보고 사진이 그림보다 더 감동을 줄 수 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포토몽타주 작품에서는 코카콜라·스즈키 오토바이·향수·화장품·전자 제품 같은 상품 광고 이미지와 피난민, 굶주린 고아, 그리고 이승만·김구 등 역사적 인물의 파편들이 서로 뒤엉켜 괴물로 변신해 있다. 조형 언어는 서구의 초현실주의, 팝아트(pop art), 포토몽타주 등의 기법을 차용한 것이지만 내용은 우리 근현대 사회의 모순에 관해 언급하려는 작업이었다.

<신학철의 신기루>   
농부들이 들판에 앉아서 멀리 도시로 떠나가는 한 여성을 바라보고 있는 장면이다. 화면 상단에는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뭉게구름 위에 고층 아파트, 선전용 애드벌룬, 유행하는 옷차림을 한 여성이 편히 쉬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이 신기루를 안고 도시로 떠나는 시골처녀의 모습을 안타까운 듯이 농부들이 바라보고 있다.
<신학철의 모내기>   
모내기와 추수하는 장면이 한 화면에 표현된 농촌 풍경이다. 화면 상단에 백두산 천지가 표현된 점, 화면의 구성이 상하로 나누어진 점, 그리고 인물 배열의 전체 형상 등이 우리나라 지도를 연상시킨다. 게다가 화면의 하단은 농부들이 모내기를 하고 있는 장면인데, 모내기를 하기 위해서 논에서 쓰레기를 건져 내고 있다. 건져 낸 쓰레기는 탱크, 성조기, 코카콜라, 양담배, 영화 포스터, 철조망 등이다. 반면 그림 상단에는 풍년이 든 들녘에서 농부들이 흥겹게 춤을 추며 식사를 하고 있다.

1984년경 신학철은 다른 민중 미술가처럼 농촌과 농민의 현실로 관심을 돌렸다. 예를 들어 ‘신기루’(1984)를 보면 포토몽타주 기법 대신에 직접 그림을 그렸다. 화면 하단은 농촌 풍경이고 상단은 도시 풍경으로, 도시 이미지가 하늘에 신기루처럼 떠 있어 초현실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도시로 떠나는 시골 처녀의 모습을 통해 자본주의의 모순을 보여 주려는 의도나 직설적인 조형 언어는 당시 민중 미술가들과 의식을 공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측면은 ‘모내기’(1987)에서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농촌을 이상향으로 표현하면서 농촌이 쓰레기로 오염되어 있음을 보여 주고 있는데, 여기에는 반미(反美) 의식과 자본주의의 모순에 대한 현실 고발 의식이 혼재되어 있다. 신학철은 순수한 아름다움이란 진정한 예술의 기준이 될 수 없고, 순수한 아름다움만 추구한다는 것은 오히려 비인간적이며, 미술가의 책무는 역사적 현실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직설법으로 표현하고 있다.120)

<오윤의 자화상>   
오윤이 1986년에 목판화로 제작한 자화상이다. 오윤은 민중 미술 작가이지만 민중의 고통이나 현실 문제를 사실적으로 표현하기보다는 민중 정서를 담아낼 수 있는 조형 언어를 찾으려 하였다.

민중을 소재로 다루면서 미술 작품을 통해 메시지를 분명하게 전달하려는 의지는 오윤(吳潤, 1946∼1986)의 작품에서도 나타난다. 그런 이유에서 대부분의 평론가는 그를 민중 미술가로 간주한다. 그러나 성완경 같은 평론가는 오윤을 민중 미술 작가가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한다.121) 다른 민중 미술 작가와 분명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오윤의 일차적 관심은 민중에 있기 때문에 민중 미술 작가로 분류할 수 있지만, 다른 민중 미술 작가들과 달리 민중의 고통이나 현실의 문제보다는 민중의 삶 속에 내재되어 있는 전통에 더 관심을 갖고 민족 전통과 민족 양식을 정립하고자 했다. 그는 조동일의 ‘전통의 퇴화와 계승의 방향’이라는 글을 필사(筆寫)할 정도로, 전통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특히 무속 같은 민간 신앙에 주목하였다. 무속은 서양의 문화와 과학이 들어오기 이전의 민간 신앙으로, 오윤에게 있 어서 서구 현대주의와 물질주의를 극복하고 맞설 수 있는 도구였다. 1983년에 간경화(肝硬化) 진단을 받을 때 실제로 양의적(洋醫的) 치료를 거부하고 전통적 민간요법(民間療法)과 한방(韓方) 치료에 매달렸을 정도로 서구식 과학주의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특히 예술의 영역에까지 과학주의적 사고 체계가 확산되면서 예술가의 상상력이나 감성이 축소되었다고 보았다. 따라서 서양의 문화와 과학이 들어오기 이전의 민간 신앙과 문화, 즉 불화(佛畵), 무속화(巫俗畵), 민화(民畵), 장승 등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으며, 한(恨), 신명, 춤 같은 소재를 반복적으로 다루었다.

<오윤의 아라리요>   
오윤은 서구 과학주의를 극복하면서 민족 전통을 정립하기 위해서 한, 신명, 춤 같은 소재를 반복적으로 다루었다. 특히 춤을 추는 모습을 간략하면서도 역동적으로 표현하여 그의 판화가 보여 주는 조형적인 대담성과 민초의 한(恨)과 신명의 정서를 효과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오윤과 다른 민중 미술 작가와의 차이는 조형 의식에서도 드러난다. 민중 미술 작가 대다수가 사실적인 표현에 치중하였던 것과 달리, 그는 오히려 “리얼리즘은 사회 과학과 한배를 타고 다녔다.”고 비판하고, 물적 표현은 정신적 표현을 가능하게 하지 못한다고 보았다.122) 따라서 그는 정신적 표현을 가능하게 하고 민중 정서를 담아낼 수 있는 적절한 조형 언어를 탐구하였다. 특히 서양의 미감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을 거부하고 우리 고유 미감을 찾아내어 조형화하려는 노력을 하였으며, 이러한 오윤의 미의식이나 작가 의식은 서양의 조형 언어에 뿌리를 두고 있는 신학철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신학철은 이 점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오윤은) 날 마치 한 맺힌 사람처럼 보는데, 민족 양식을 깨버린 사람으로 본다고. 보면 알지. 오윤의 기(氣)는 그런 데서 오는 거라고 봐. 뭔가 비민족적이고 비민중적인 요소에 대해 억울함, 적개심이거든. 오윤 그림의 형식에서 느껴지는 기는 그런 거였어.123)

오윤은 여러 단계의 준비 스케치를 거쳐 얻어 낸 간결성으로 민중의 힘과 에너지를 표현하고자 했다. 그는 민간 신앙이나 탈춤, 판소리 같은 전통적인 소재에서 민중의 심성과 본질을 찾으려 하였으며, 동시에 민중의 삶 속에 녹아 있는 전통 미의식을 계승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었다. 이러한 작가 의식은 일반적으로 민중 미술가가 자본주의 모순, 반미 의식, 도시 노동자의 고통이나 저항 의지에 초점을 맞추었던 것과는 다르다.

민중 미술이라는 범주 안에서도 김봉준(金鳳駿, 1954∼ ) 또한 앞서 언급한 민중 미술가들과 의식을 달리하였다. 김봉준은 전통보다 민중의 삶 자체에 더 관심을 두었다. 김봉준이 이끈 ‘두렁’이라는 그룹의 명칭이 ‘논과 밭을 에워싸는 둑’을 의미하는 것에서 드러나듯이, 민중의 공동체적인 삶을 미술에 담으려 하였다. 그는 미술이란 특수층이 아닌 민중을 위한 것이라고 보고 민중의 정서를 반영한 작품, 그리고 대중과 소통을 중시하였다. 이미 1970년대 후반부터 탈춤, 풍물, 연극 등 전통적인 민중 문화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였고, 미술에 민중의 삶의 모습을 담고자 하였으며 표현 양식도 민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사실적인 양식을 구사하였다. 또한 전통적으로 대중과의 소통을 전제로 하는 영역인 민화, 괘불(掛佛), 장승, 탈에 주목하였다. 또한 공동 벽화, 걸개그림 등을 주로 제작하였으며 작업하는 방식도 주로 공동 작업을 택하였다.

김봉준이 추구한 공동 작업 방식은 작가의 개성이나 작품의 조형성을 중시하던 오윤, 신학철의 창작태도와 많은 차이가 있다. 김봉준은 미술가의 전문성 자체를 부정하면서 노동자나 농민의 눈높이에 맞춘 아마추어적인 미술을 추구하였으며, 미술을 피지배 계급의 이익 옹호를 위한 도구로 사용하고자 하였다. 공동 작업으로 제작한 걸개그림이나 판화는 공동체의 의식을 담아 민중과 교감하는 데 활용하였다. 그는 작가로서보다는 문화 활동가로서 미술의 생산 과정(창작, 매체 개발, 교육, 전달, 수용의 과정)을 총체적으로 간여하며 모더니즘 작가들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개인 창작자로서의 미술가의 몰사회성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두렁의 만상천화>   
공동으로 제작한 이 걸개그림은 누가 어느 부분을 그렸는지 알 수 없으며, 감로탱(甘露幀)의 형식을 빌렸다. 다시점(多視點)으로 처리하였는데,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맨 위에는 극락에 해당되는 부분으로 노동자, 농민 등 서민들이 화목하게 모여 있고, 중간에는 공장, 산동네 등 도시의 외부가, 하단에는 카바레에서 춤추는 사람을 비롯한 도시인이 실내에서 생활하는 모습이 있다.

김봉준은 오윤과 마찬가지로 목판화를 중요한 표현 매체로 활용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제작 의도와 미의식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 오윤은 판을 제작하기 전에 수많은 에스키스를 통해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고 형태를 다듬는 과정, 즉 조형화하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하였으며, 마침내 개성적이고 활달한 칼 맛과 정제된 선으로 오윤 특유의 판화 세계를 형성하였다. 반면 김봉준은 목판화의 대중성에 관심이 있었다. 다시 말해 미술가 개인의 창작 활동보다는 미술의 대중화를 중시한 김봉준이 판화를 선택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대중이 쉽게 공유할 수 있는 표현 매체이기 때문이다. 조형적으로도 김봉준의 판화는 설명적이어서 내용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오윤의 칼의 노래>   
오윤은 목판에 자연스럽게 조각칼 맛을 살펴 수많은 목판화를 제작하였다. 특히 목판화의 거친 표현과 칼의 예리함을 적절하게 활용하여 목판화의 표현 효과를 극대화시켰다. 이 작품은 그가 즐겨 다룬 ‘춤’의 연작으로 볼 수 있는데, 칼을 휘둘러 인간의 삶에서 털어 내야 할 가난은 물론 사악함과 추악함을 제거하고 있는 모습이다.

김봉준은 공동체를 중시하여 개인이 아닌 공동체의 익명적(匿名的) 작품을 제작하여 유포하였으며, 야학(夜學)이나 대중적 강습을 통해 판화를 보급시키기도 하였다. 이 점은 원동석이 민중 미술의 개념을 “민중을 위한, 민중에 의한, 민중의 미술”이라고 규정하면서 “민중의 주체가 그 문화 형태 중에서 미술을 생산하려는 것이지, 미술의 입장에서 민중을 대상으로 삼으려는 것이 아니다.”라고 언급한 방향성과 일치하기도 한다.124) 김봉준이 이끈 ‘두렁’, ‘일과 놀이’의 시민 미술 학교 개설이나 두렁 민속 미술 학교 등은 이러한 의지의 실천 작업이었다. 이들 그룹은 기존의 미술 장르를 넘어서서 민중이 직접 향유할 수 있는 양식을 모색하여 굿그림, 깃발그림, 걸개그림, 이야기그림, 벽그림 등을 제작하였으며, 실제로 이들 작품은 대학의 축제와 집회에 사용되기도 하였다.

1980년대에 받아들이려 한 전통은 정신적인 전통이 아니라 대중적이고 민중적인 불화, 풍속화, 무속화, 민화, 장승 등의 수용이었다. 우리나라 현대 미술에서 전통의 수용은 서구화에 대한 거부의 방식이었다는 점에서 공통분모(共通分母)를 갖고 있다. 그러나 모더니스트의 정신성에 대한 강조가 서구의 모더니즘을 수용하면서 ‘한국적인 모더니즘’을 추구하여 국제적인 흐름 속에서도 자리를 잡기 위한 것인 반면에 민중 미술의 전통 수용은 저항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저항하려 한 대상이 외세이든 제도권이든 간에 저항의 목소리를 결집시키기 위해 전통을 차용하였다.

<김봉준의 추수>   
농민들이 들에서 함께 노동하는 모습을 표현한 작품이다. 특별한 구성 없이 추수하는 모습을 설명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다만 농부들은 서로 바라보면서 일을 해서 협동 작업을 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필자] 김이순
118)「좌담 : 오늘의 한국 현대 미술과 비평의 새로운 인식」, 『시각과 언어 2 : 한국 현대 미술과 비평』, 열화당, 1985, 155쪽.
119)신학철·박찬경, 「신학철 : 서민의 역사를 그린다」, 『신학철-우리가 만든 거대한 상(像)-』, 마로니에 미술관 전시 도록, 2003, 106쪽.
120)유홍준, 「신학철, 시대를 증언하는 힘의 미술」, 『다시 현실과 전통의 지평에서-유홍준 평론집-』, 창작과 비평사, 1996, 208∼224쪽.
121)성완경, 「나의 춤은 꿈을 꾸는 동안 계속되었다-오윤과 민중 미술-」, 『오윤 : 낮도깨비 신명 마당』, 국립 현대 미술관, 2006, 278쪽.
122)오윤, 「미술적 상상력자 세계의 확대」, 『오윤 : 낮도깨비 신명 마당』, 국립 현대 미술관, 2006, 322쪽 재인용.
123)신학철·박찬경, 앞의 책, 107쪽.
124)원동석, 「민중 미술의 논리와 전망」, 『오늘의 책』 4, 한길사, 1984.
창닫기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