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3장 미술과 관객이 만나는 곳, 전시2. 광복 이후 현대 화단과 미술의 변화

국제 미술과의 만남, 바깥의 눈을 통해 ‘나’를 되돌아보다

1950년대 중반 이후 점차 미술계에서도 외국과 교류가 이루어졌다. 1957년 처음으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동양 미술전에 이상범, 허백련 등의 수묵 채색화와 김인승(金仁承, 1910∼2001), 이마동(李馬銅, 1906∼ 1981), 장욱진(張旭鎭, 1917∼1990) 등의 유화가 출품되었다. 1961년에는 제2회 파리 비엔날레에 김창렬(金昌烈, 1929∼ ), 이응로(李應魯, 1904∼1989), 박서보 등이 참가한 것을 기점으로 점차 인도 트리엔날레, 상파울로 비엔날레 등 해외전(海外展) 참가가 증가하였다.168) 1950년대와 1960년대의 해외전은 한국이라는 나라가 전쟁에서 벗어나 안정된 정치적·경제적 기반 위에 문화적 활동을 하고 있음을 알리는 효과도 있었을 것이다. 한편 국제전(國際展) 참가는 새삼스럽게 우리나라 현대 미술의 주체성을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뒤늦게 뛰어든 현대 미술계에서 서구 미술을 답습하거나 모방하는 것으로는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 보일 수 없었기에, 전통을 새롭게 뒤돌아보며 그것을 어떻게 현대 미술로 소화한 다음 표현하느냐 하는 문제로 고민하게 된 것이다. 이는 더욱 활발하게 세계 미술계에 진출하고 있는 2000년대에 들어서도 여전히 유효한 문제로 남아 있다.

<인간 가족전 전시장>   
1957년 인간 가족전이 열린 경복궁 미술관의 모습이다. 미국 근대 미술관에서 개최한 이 전시는 전 세계 40개국을 순회하며 2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모았다.

반대로 해외 작품의 국내 전시도 조금씩 이루어졌다. 이러한 전시는 일제 강점기 동안 주로 일본을 통해서만 들여오던 외부 미술에 대한 정보를 더 넓은 통로를 통해, 굴절을 거치지 않고 직접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 미술계를 활성화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회화 전시는 아니지만 1957년에 열린 인간 가족전(The Family of Man)은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 외국의 다양한 인간을 접하면서 세계의 흐름 가운데 나를 위치시키는 간접 경험을 제공한 전시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미국 근대 미술관(MoMA)이 1955년에 개관 2주년을 기념하여 기획한 이 전시는 미국에서 4개월을 전시한 이후 전 세계 40여 개국 을 순회하며 2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여 사진이 발명된 이래 단일 사진 전시회로는 가장 규모가 컸던 전시였다. 인간 가족전은 “인간은 하나”라는 슬로건 아래 인간의 연애 과정부터 결혼, 출생, 성장 과정의 작업, 교육, 오락, 종교, 동정, 저항, 파괴, 죽음 등 인간의 공통적인 희로애락(喜怒哀樂) 모습을 담은 사진을 작가들에게 요구하여 전 세계에서 찍은 사진 200만 장 가운데 68개국 273명의 사진 503점을 선정한 것이다.

<인간 가족전을 관람하는 이승만 대통령>   
1957년 4월 3일 인간 가족전 개막식에 참석하여 전시를 관람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모습이다. 이 전시는 대형 사진에 지구촌 인간들의 삶의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 주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우리나라에서는 1957년 4월 3일부터 5월 3일까지 약 한 달 동안 경복궁 미술관에서 열렸다. 원래 예정은 4월 28일까지였으나 넘치는 관객으로 인해 5월 3일까지 닷새를 연장하였을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주한 미국 공보원(USIS)이 주최하고 문교부, 내무부, 한국 사진 작가 협회가 후원하며 무료로 제공된 이 전시는 전시의 내용은 물론 설치 방식까지 미국에서 개최된 원형 그대로 꾸며졌다.169) 전시는 아기가 태어나는 장면, 아프리카 여인들이 머리에 짐을 이고 줄을 지어 가는 모습 등을 교육, 사랑, 가족 등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주제로 구성하였으며, 각 사진에는 ‘굶주림은 최고의 진실이다’와 같은 제목을 붙여 관람자가 쉽게 사진에 접근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무엇보다도 이 전시는 사람의 키를 넘는 거대한 작품의 스케일이 관람객을 압도하였다. 일반적인 작품의 크기는 대개 높이가 2m를 넘었으며, 개중에는 폭이 3.5m, 길이가 15m를 넘는 것도 있었다.170) 당시에 열린 전시회 가운데 모든 장르를 막론하고 가장 큰 성공을 거둔 대중적 행사였으며,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진 작품을 보는 시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쳐 이후 생활주의 리얼리즘 사진이 대세를 이루기도 하였다.171)

1953년 10월에 벨기에 현대 미술전(België現代美術展)이 덕수궁 미술관에서 처음 열린 것을 시작으로 외국의 미술전도 점차 잦아졌다. 1957년 4월 9일에서 4월 21일까지 국립 박물관에서 열린 미국 현대 8인 작가전(美國現代八人作家展)이나 1962년 중앙 공보관에서 열린 미국 현대 판화전(美國現代版畵展) 등 미국 현대 미술 전시가 여러 차례 열렸는가 하면 1966년 신세계 화랑에서는 중앙일보사와 유네스코 한국 위원회가 공동으로 개최한 근대 세계 명화전(近代世界名畵展)이 열렸다. 1970년대에 들어서는 조선일보사가 피카소(Pablo Ruiz Picasso, 1881∼1973),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 비시에르(Roger BissiAre, 1888∼1964), 에스테브(Maurice Estève, 1904∼ ) 등 루브르 미술관 소장품을 전시한 프랑스 현대 명화전(France現代名畵展)(1970)을 경복궁 미술관에서 열었고,172) 1976년에도 인상파전(印象派展)을 국립 현대 미술관에서 개최하였으며, 동아일보사에서는 표현주의 미술과 전위 미술을 중심으로 한 독일 현대 미술전(獨逸現代美術展)(1972)을 개최해 유럽 미술 소개도 직접적으로 이루어졌다.173) 이들 전시는 책을 통해서만 보던 서구 미술을 직접 관람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기 때문에 대중적인 주목을 끌었다. 1980년 무렵까지 한 해에 서너 차례 열리던 외국 작품 전시회는 198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개인전을 포함해서 30건 이상으로 늘어났고, 지역도 유럽이나 미국을 넘어 일본, 중국은 물론 인도, 페루, 세네갈 등 세계 전 지역의 작가와 작품이 다채롭게 소개되었다.174)

전시 빈도가 가장 높았던 외국 작가는 피카소였다. 1950년대 이후 1990년까지 외국 작가 전시 520건 가운데 피카소 작품전은 11회를 차지하였으며, 유화뿐 아니라 판화, 도예, 스케치, 타피스트리(Tapestry)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전시되었다. 또 이러한 외국 작품의 전시는 1970년대에는 자본을 감당할 수 있는 신문사가 주최하였지만, 미술계의 성장에 따라 상업 화랑이나 미술관이 늘어나면서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화랑이나 미술관도 국내 작가 전시뿐만 아니라 외국 작품 전시도 활발하게 유치하였다.

[필자] 목수현
168)김달진, 「한국 현대 미술 해외전 36년, 1957∼1992」, 『바로 보는 한국의 현대 미술』, 발언, 1995, 375∼411쪽에 한국 미술의 해외전 참가에 대한 연표가 자세히 정리되어 있다.
169)『동아일보』 1957년 3월 29일자.
170)당시 신문 기사에 따르면 큰 작품을 폭 12척 길이 50척으로 소개하고 있다(『동아일보』 1957년 3월 29일자).
171)박주석, 「1950년대 한국 사진과 ‘인간 가족전’」, 『한국 근대 미술 사학』 14, 한국 근대 미술 사학회, 2005에 이 전시의 전말과 의미가 상세히 다루어져 있다.
172)『조선일보』 1970년 3월 10일자.
173)『동아일보』 1972년 4월 1일자.
174)김달진, 「외국 작품 국내전 38년, 1953∼1990」, 『바로 보는 한국의 현대 미술』, 발언, 1995, 411∼4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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