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4장 미술과 시장

1. 조선 후기 이후 새로운 미술 시장의 대두

[필자] 권행가

근대 미술의 형성 과정은 미술이 왕조와 신분 사회의 틀을 벗어나 예술로서의 자율성을 획득해 간 과정임과 동시에 자본주의의 시장 논리 속에서 상품화되어 간 과정이기도 하다. 즉 작가가 국가나 종교 권력의 필요에 응해 작품을 제작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적으로 작품을 제작하여 화랑(畵廊)이나 전시회(展示會)를 통해 익명(匿名)의 대중을 상대로 작품을 발표하고, 화랑이나 경매 시장(競賣市場) 등을 통해 작품을 고객에게 판매하는 구조 속에 편입되는 과정이 곧 근대 미술의 형성 과정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이때의 미술품은 예술적 가치를 지닌 작품임과 동시에 경제적·교환적 가치를 지닌 상품이기도 하다. 물론 이 두 가지 가치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그 좋은 예가 소위 잘 팔리는 유명 작가와 미술사적 평가를 받는 작가가 꼭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 미술의 흐름 속에서 미술 시장은 작가의 일상생활에서부터 작품 경향에 이르기까지뿐 아니라 화랑과 미술관(美術館)의 기획 전시, 미술 잡지의 작가 연구, 출판사의 화집(畵集) 발간, 나아가 미술 이론과 비평이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쳐 온 것이 사실이다. 이처럼 미술 내적인 문맥(文脈)과 다양한 방식으로 연동(聯動)해 온 미술 시장은 우리나 라의 정치와 경제, 각 시기 문화 정책, 문화 향수 계층의 성격과 취향 등 다양한 변수와 관계를 맺으면서 그 성격이 만들어져 왔다. 이 글에서는 우리나라 근현대 미술의 흐름을 미술의 예술적 가치가 아니라 경제적·교환적 가치 즉 시장의 맥락 속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미술의 현상들을 사회 경제적 관점으로부터 살펴보는 것은 신화화(神話化)된 작가, 미학화(美學化)된 미술의 뒷면에서 작용하는 자본, 상품, 욕망의 사회사를 살펴보는 일이 될 것이다.

미술 시장을 이루는 기본 요소는 상품 시장의 생산자, 소비자, 공급자(유통자)에 해당하는 작가, 고객, 화상(또는 경매사)이다. 이때의 작가(作家)는 전통 사회에서 단순히 여기(餘技)의 차원에서 작품을 제작하던 사대부들이나 국가의 수요에 응해 작품을 제작하던 화원(畵員)이 아니라 팔리든 팔리지 않든 미술 작품의 교환적 가치를 전제로 작업하는 근대적 의미의 작가를 말한다. 마찬가지로 고객(顧客)은 단순히 작품을 감상하는 익명의 대중이 아니라 더 좁은 의미에서의 고객, 즉 작품 구매자를 말한다. 이러한 고객층의 형성은 구매력을 가진 계층의 형성 과정, 즉 그 사회의 자본 축적 상황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화상(畵商)은 이 둘을 연결해 주는 중간 매개자로 화랑이나 경매 시장 같은 미술품 유통 공간, 즉 미술 시장의 발달 정도에 따라 그 성격과 역할을 달리해 왔다.

미술 시장에서 화랑은 작가의 작품이 처음으로 거래되는 시장 즉 1차 시장(Primary Market)이라면, 경매 시장은 2차 시장(Secondary 또는 Resale Market) 즉 한 번 거래된 작품이 다시 거래되는 시장이다. 이 두 시장 간의 역할 분담과 균형이 이루어질수록 미술 시장은 안정된 구조를 띠게 된다. 물론 이러한 시장 구조의 안정은 각국의 근대 미술 형성 과정에서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제도화된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미술 시장 역시 근대화와 식민화, 광복 후 원조 경제, 국가 독점 자본주의 등의 한국적 자본주의 경제의 발달 과정 속에서 미술 시 장의 구조가 만들어져 왔다.

우리나라 근현대 미술 시장의 형성은 크게 세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맹아적(萌芽的) 단계이나 화폐 경제가 발달하면서 미술품 유통 시장이 형성되고 미술품 수요 계층이 확대되는 17세기부터 1900년을 전후한 시기까지, 둘째는 미술품의 상품화가 고미술품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한편 작가-화랑-고객의 근대적인 화랑 시스템이 본격적으로 정착되기 이전의 과도기적 양상을 보여 주는 일제 강점기, 셋째는 한국적 형태의 화랑 시스템이 본격적으로 정착되는 한편 미술품이 단순한 상품의 단계를 넘어서 투기의 대상으로까지 자본화되는 시기인 광복 이후부터 현재까지로 나눌 수 있다. 광복 이후 시기는 다시 미술 상품화의 정도와 유통 방식에 따라 반도 화랑을 비롯한 소수의 근대적 화랑이 나온 1950∼1960년대, 화랑 체제가 본격적으로 형성된 1970∼1990년대, 경매에서부터 인터넷 시장, 아트페어(art fair)와 각종 국제전 등을 통해 시장의 다양화가 이루어진 1990년대 말부터 현재까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 글에서는 각 시기마다 경제적·제도적 변화에 따른 미술품 유통 방식과 시장 구조의 변화 양상, 시장에 대응하는 작가의 위상, 화상과 고객의 계층과 취향, 이들 요소 간의 관계와 사회적 영향 등을 살펴보는 것에 초점을 둘 것이다.

[필자] 권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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