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유교적 사유와 삶의 변천을 내면서

인류는 각기 다양한 문화 속에 살면서 여러 가지 양식의 삶을 향유하고 사유하여 왔다. 그러한 삶과 사유 속에는 알게 모르게 자기 민족의 고유한 종교적 신념이 내재되어 있었다. 오늘날 우리들의 삶과 사유 속에는 아직 유교의 영향이 적지 않게 남아 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살고 있는 가까운 시기인 조선 왕조의 정치적 이념과 사회 윤리가 바로 유교였기 때문이다.

고대에는 고유 신앙인 풍류도(風流道)나 불교가 우리 민족의 일상생활과 사유를 지배하였다. 그러나 삼국시대에서 보듯 태학이나 국학 등 유교 경전을 공부하는 학교가 설립되자 유교가 널리 보급되어 정치적·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때까지 자신이 유학자라고 표방한 이는 없었다. 그러다가 통일신라 이후에 강수(强首), 설총(薛聰), 최치원(崔致遠) 같은 유학자가 나타나 문장을 학습하고 경전을 학문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강수는 뛰어난 문장력을 구사하여 대당 외교(對唐外交)를 성공적으로 이끈 학자였다. 그런가하면 고승 원효(元曉)의 아들로 태어난 설총은 유학자로 대성하여 유교적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특히 그가 구경(九經)을 방언(方言)으로 해석하였다는 사실은 유교 경전에 대한 이해가 당시에 이미 매우 깊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치원은 신라 말 최고의 유교 지성으로 유· 불·도 삼교에 두루 통달하였으나 항상 자신은 유학자로 자처하였다. 유교는 본래 현실 사회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고대 사회에도 정치적으로 주요한 기능을 하였다. 고대에 살았던 우리 조상의 유교적 사유와 삶은 충(忠)과 신의(信義), 효(孝)와 정결(貞潔)이 강조된 특징을 찾을 수 있다.

고려가 건국되고 광종대에 과거 제도가 시행되면서 그 뒤 천여 년 동안 교육과 과거를 통해 능력 위주의 사회를 지향하게 되었다. 많은 관료가 유교 경전의 소양을 익힌 인격적 존재로 개인의 수양과 국가에 봉사하는 일에 종사하였다. 그리고 성종대에 최승로(崔承老)의 주도로 유교는 더욱 현양되었다. 이 시기에 전국의 효자(孝子), 열녀(烈女), 의부(義夫), 순손(順孫)을 발탁하여 표창하는 등 국가적 차원에서의 유교 진흥책이 제시되었다. 당시에는 불교가 수신(修身)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면 유교는 치국(治國)의 근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려 현종대에는 통일신라 말에 유교의 진흥에 큰 공을 세운 설총과 최치원이 문묘(文廟)에 종향(從享)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최충(崔沖)은 사립학교인 9재를 설립하여 유교 경전과 역사서에 관한 교육을 실시하여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 이어 예종대에는 7재를 세워 관학(官學)을 부흥시키기도 하였다. 고려 중기에는 경연(經筵)에서 경학(經學)에 대한 담론이 활발하였고 『삼국사기』와 같은 역사서를 편찬하는 등 유교 문화가 크게 꽃피었다. 당시 청연각(淸讌閣)·보문각(寶文閣) 등에서 삼강오상(三綱五常)과 도덕성명(道德性命)에 대한 담론이 이루어지고 유교 경전을 읽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는 것은 고려 중기에 유교 문화가 난숙하였음을 의미한다.

고려 후기에 이르러 성리학(性理學)이 수용되면서 사대부 계층에서 점차 『사서집주(四書集註)』가 읽혀지고 이를 통해 사대부를 중심으로 하나의 정치적·사회적 이념이 형성되어 나갔다. 그리고 고려 말에 『가례(家禮)』가 수용되면서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 등에 의해 유교의 상례와 제례의 시행이 비로소 이루어졌다. 그리고 가묘(家廟)가 세워지는 등 사 대부의 예제(禮制)가 극히 일부 학자나 관료에 의해 실시되었다. 사실 성리학은 송대의 형성기부터 명분과 의리를 강조하고 정통을 수호하고 이단을 배척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따라서 고려 후기의 유학자들 사이에서도 성리학을 정통 학문으로 신봉하고, 불교나 도교를 이단시하여 배척하려는 풍조가 일어났다. 그리하여 정도전(鄭道傳) 등에 의해 불교의 교리에 대한 철학적인 비판이 일어나기 시작하였고, 권근(權近)에 의해 심(心)·성(性) 등 성리학의 기본 개념에 대한 해설이 그림과 글로 명료하게 제시되었다.

조선 왕조는 성리학을 국시(國是)로 표방하였다. 태조 이성계는 건국 직후 발표한 즉위 교서에서 유교 예제인 관혼상제를 실시할 것을 선언하였다. 이는 조선 왕조가 지향하는 유교 예속의 방향과 원칙을 천명한 것이다. 또한 태조대부터 국왕과 집권층은 국정 운영을 성리학적으로 일변하기 위해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대학연의』는 성학(聖學) 곧 제왕학(帝王學)을 표방하면서 신하들에 의해 왕을 교육하고 규제하는 정치 이념서로 활용되었고, 이 책을 통해서 성리학의 정치 이상에 충실한 국가 경영이 도모되었다. 그런가하면 세종대에는 국가 의례인 오례(五禮)가 정비되었고 유교 윤리서인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가 편찬되는 등 유교 문화가 크게 꽃피었다.

조선은 문치주의 유교 국가였으므로 교육은 양반 관료의 양성이나 사대부들의 교양 습득뿐만 아니라 서민의 유교적 교화를 위해서도 중시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주로 관학의 진흥을 통한 국가 차원의 교육 정책이 추진되었다. 중앙에는 성균관(成均館)과 사학(四學)을 설치하고 지방에는 향교(鄕校)를 세워 교육을 장려하였다. 그러나 관학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면서 16세기 중반 이후부터는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등장한 사림(士林)이 서원(書院)을 설립하여 그들이 존경하는 선현을 제향(祭享)하고 강학(講學)을 통해 성리학의 수준을 높여 나갔다.

조선 성리학은 16세기 중반 이후 사림이 형성되면서 더욱 발전하였다. 사림은 중소 지주층 출신의 양반 계급을 중심으로 형성된 광범한 학자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사림의 성리학 연구와 실천이 심화되면서 치국은 물론 그동안 불교에서 담당해 왔던 수신의 몫도 성리학이 맡게 되었다. 당시 성리학의 수신서라고 할 수 있는 『소학(小學)』과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 등이 사림에게 크게 주목을 받았던 것은 이제 조선 사회가 불교 사회에서 성리학 사회로 변모해 가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다.

사림 사회가 되면서 향촌에서 여러 계층의 자발적 지지와 동의를 얻으려면 향촌 사회에서 통용되고 호소력을 가질 수 있는 사회 윤리가 필요하였다. 『삼강행실도』가 간행되던 세종대에는 사회 윤리에서 불교적 요소를 제거하면서 성리학의 윤리 질서를 공고히 하거나, 삼강의 윤리관을 제시하기만 해도 되었다. 그러나 향촌 사회의 지지 속에서 중앙으로 진출한 사림으로서는 새로운 윤리 질서가 무엇보다도 절실하였다. 그래서 오륜(五倫) 가운데 붕우유신(朋友有信)과 장유유서(長幼有序)가 새롭게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삼강과 이륜을 포괄하는 오륜의 윤리 질서가 비로소 마련되었다. 군신의 의리를 기초로 하는 국가 윤리, 부자와 부부를 중심으로 하는 가족 윤리, 붕우 간의 신의와 장유의 서열을 기본으로 하는 향당 윤리가 마련됨으로써 조선 사회의 기초적인 세 가지 사회 윤리 질서가 모두 갖추어진 셈이었다.

한편 16세기 초중반까지만 해도 고려 사회의 모습이 많이 남아 있었고, 당시 학계도 아직 다양한 학문적 실험을 하는 단계였다. 서경덕(徐敬德), 이언적(李彦迪), 조식(曺植), 이황(李滉) 등은 나름의 독자적인 학문 체계와 학풍을 마련하고 있었다. 당시 이황이나 조식, 정지운(鄭之雲), 기대승(奇大升) 등은 천명(天命)이나 인간의 본성과 감정, 또는 마음에 대한 깊은 학문 탐구의 결과를 그림으로 그리고 해설을 붙여 나름의 독자적인 성리학 체계를 구축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조선 성리학은 우주론(宇宙論) 중심에서 심성론(心性論) 중심으로 탐구의 축이 옮겨졌다. 이러한 연구의 결과로 조선 성 리학은 중국 성리학의 아류를 탈피하고 조선 특유의 색채를 띠게 되었다. 그리고 이황에 의해 마음에 관한 경전인 진덕수(眞德秀)의 『심경(心經)』이 새롭게 주목받게 되면서 불교의 『반야심경(般若心經)』의 시대에서 성리학의 『심경부주(心經附註)』의 시대가 열렸다. 특히 효종대에는 송시열(宋時烈)과 효종에 의해 『심경』은 경연의 주요 교재로 채택이 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조선 유교 사회의 삶과 사유의 양상은 국가 의례인 오례(五禮)나 사대부 예제를 담은 『가례』의 관혼상제례의 실천에서 살필 수 있다. 특히 제례는 대표적인 유교적 삶과 사유의 모습으로 오늘날까지도 일부 전해지고 있다. 유교 문화가 뿌리 깊게 박혀 있던 조선 사회에서는 조상에 대한 제사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조선 전기에는 문무관 6품 이상은 3대까지, 7품 이하는 2대까지, 서민은 부모만을 제사 지내도록 하였다. 물론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실린 이러한 규정이 조선시대 내내 지켜졌던 것은 아니다. 조선 후기로 가면서 사대부는 물론 서인들까지도 4대 봉사(奉祀)를 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적어도 제사에서만은 법보다도 예가 우선시되던 사회가 조선 사회였다.

조선시대 제사의 계승에는 일정한 원리가 있었으며, 엄격한 원칙과 절차가 요구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종법(宗法)이다. 종법 체제는 제사를 중심으로 하여 동종 친족 집단의 화목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구성되고 유지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왕실에서나 사대부 계층에서 종법이 보편화되었고, 심지어 일반 민중들의 예속(禮俗)에까지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면서 조선 후기 사회는 아들이 없는 경우 양자를 들이는 것이 일반화되었고, 점차 동성 촌락(同姓村落)이 형성되어 나갔으며 동성을 중심으로 족보(族譜)가 활발하게 편찬되는 등 이전 시기와는 다른 새로운 사회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리하여 왕실은 물론 사대부와 서인이 유교 의례를 실천하는 시기가 되어 그야말로 ‘가가례(家家禮)’의 유교적 전통이 형성되었다.

17세기에 예학시대(禮學時代)의 출현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 서 혼란한 사회를 정비하기 위해 나타난 필연의 과정이었다. ‘가가례’라는 말은 예가 집집마다 차이가 있다는 의미도 있지만 집집마다 예를 실천하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에 따라 17세기에는 왕실의 종통이나 왕위 계승 문제에서 예론이 활발하게 제기되기 시작하였고, 대대적인 정치 분쟁인 예송(禮訟)으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예송은 학문적 논쟁으로 시작되었으나, 국왕의 정통성 시비가 촉발되면서 위험한 정치적 분쟁으로 변모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이학(理學) 지상주의가 열리면서 기호 학계(畿湖學界)에서 특히 18세기에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다. 서울·경기 학계에서 활동한 이재(李縡), 김원행(金元行) 등 낙론 학자(洛論學者)는 인성과 물성이 같으며, 성인과 범인의 마음이 같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개개 사물이 ‘도덕적 본성’을 가졌다는 것을 전제로 새로운 사회 계층을 인정하는 가운데 지배 질서를 재정비하려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낙론의 사상은 호론(湖論)에 비해 상대적으로 개방성과 포용성을 띠었고 홍대용(洪大容), 박지원(朴趾源) 등 일부 북학파(北學派) 학자의 사상적 연원이기도 하였다.

그런 반면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주장하는 충청 학계의 호론 학자는 인성과 물성은 다르며, 성인과 범인의 마음이 다르다고 주장하였다. 호론의 대표적 학자인 한원진(韓元震)은 중화와 오랑캐, 정통과 이단, 성인과 범인 등을 엄격히 구분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호론 학자들은 노론 의리론을 강경하게 주장하면서 영·정조대 탕평 정국(蕩平政局)에 비타협적인 모습을 유지해 나갔다. 이와 같은 호론의 사상은 19세기 후반 위정척사 운동(衛正斥邪運動)으로까지 일부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조선 후기에는 유교적 삶과 사유에도 새로운 변모가 일어나고 있었다. 북벌론(北伐論)과 대명 의리(對明義理)를 고수해 오던 노론 학계에서 연경을 다녀온 박지원·박제가(朴齊家) 등 진보적 학자들이 북학을 부르짖었다. 이들 유교 지식인들은 해외여행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고 새로 운 세계관을 가졌다. 이제 조선의 유교 지식인들은 중국이나 일본의 실정에 비해 경제력이나 군사력에서 크게 낙후한 조선의 현실에 큰 문제의식을 가졌다. 그들은 상호 교유를 통해 자신이 습득한 새로운 학문 정보를 교환하였고, 청나라의 우수한 생산 기술과 교통수단의 도입을 통해 민생을 편안하게 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려고 하였다. 또한 그들은 조선의 국방력을 향상시켜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려 하였으며, 평상시에 유능한 역관(譯官)을 양성하고 외국어를 익힘으로써 비상사태에 대비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사상적 전통은 19세기 중반 이후 개화로 이어져 서구의 새로운 근대 사조를 받아들이는 토대가 되었다. 일본과 미국 등을 다녀온 일부 개화파 인사들은 유교적 삶과 사유의 틀을 벗어던지고 새로운 서구 문명에 심취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하였다.

사실 18세기 말까지의 서학(西學)은 조선 사회에서 유교와 대립하지 않았고 어느 정도 상보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1791년 조상의 신주를 불태우는 사건이 전라도 진산에서 일어나자 조선 정부나 양반 사회에서는 유교적 전통에 대한 심대한 도전이라고 판단하여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그 여파는 지속되어 19세기 초부터 개항 이전까지 진보적 유교 지식인들은 숙청되거나 유배를 갔고 서학에 관한 학문적 탐구마저도 서재에서 숨을 죽이고 할 수밖에 없었다.

개항 전후 서구 열강의 진출이 본격화되고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유교는 이에 대응하여 새롭게 이론 무장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당시 유학자들은 서학의 만연과 서구와 일본의 침략에 대해 동학(東學)이나 이학(理學)으로 어려운 시국을 극복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유교 문명과 서구 문명의 충돌이 장기간 지속되었으나 개화의 도도한 흐름과 함께 서구 문명이 수용되면서 유교는 서서히 그 빛을 잃어 갔다.

일제 강점기에는 유교를 헌신짝처럼 팽개치는 이가 있었는가 하면 유교를 개혁하여 다시 복원해야 한다는 이도 있었다. 1919년 전국의 유림(儒林) 이 단결하여 유림단 독립 청원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지만, 유교는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역사적 기능을 점차 상실하고 말았다. 일부 유학자는 일제의 탄압을 피해 산림(山林)이나 해도(海島)에 은둔하여 강학을 통하여 제자를 양성하기도 하였지만, 또 다른 일부 유학자는 일제의 황도 유교(皇道儒敎)로의 친일화 정책에 협력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두 유형 모두 유교를 새로운 시대의 이념으로 개신하지 못하였지만 유교가 존재 가치를 모두 잃어버린 것은 결코 아니었고, 아직도 우리나라 사람들의 심성에는 유교 의식이 깊이 내재되어 있다.

현재 우리 사회에는 기독교·불교 등 다양한 종교가 우리의 삶과 사유를 지배하고 있다. 물론 유교 상례나 제례는 가정의례 준칙(家庭儀禮準則)이 제정되면서 그 의례가 많이 간소화되었다. 그러나 장구한 세월 동안 우리 조상들의 의식을 지배해 온 유교적 사유와 삶의 양식이 모조리 사라졌다고 볼 수는 없다. 아직도 많은 가정에서는 조상에게 유교 의례의 절차로 제사를 지내고 있고 성균관과 서원, 향교에서는 봄가을로 제향을 하고 있다. 그리고 축제나 기념행사에서 유교 의례를 재현하는 모습을 가끔 본다.

유교는 시중(時中)을 중시한다. 과거의 전통을 법받아 계승해 나가되 시대의 변화를 알아야 했고, 또 새로운 시대를 맞아 그 시대의 유교적 가치를 새롭게 제창하면서도 전범(典範)에 맞아야 했다. 그래야 생명력을 발휘할 수 있었고 역사적 사명을 다할 수 있었다. 이 책은 우리 조상이 오랜 기간 누려 온 유교적 삶과 사유의 궤적을 통시적으로 탐구한 것이다. 고대부터 지속되어 온 우리 조상들의 유교적 삶과 사유의 시대적 정신을 추적해 보고, 아울러 우리 조상들이 향유하였던 다양한 문화를 좀 더 폭넓게 이해하는 데 이 책이 다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2009년 1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필자] 권오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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