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1장 유교적 사유와 삶의 형성2. 삼국시대, 충·효·정결의 유교 윤리

고구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경우 건국 초인 372년(소수림왕 2)에 유교 교육기관인 태학(太學)을 설치하는 등 유교 정치가 어느 정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5세기경에는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에서 보듯 우리 민족 고유의 천손(天孫) 의식에 유교적 사유의 흔적이 확인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역사서 『유기(留記)』 100권을 편찬하였고 영양왕 때는 『신집(新集)』 5권을 편찬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이미 유교 정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고구려는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어 유교를 가장 먼저 받아들여 발전시킨 것으로 보인다. 태학의 교과 내용은 오경(五經, 『시경(詩經)』·『서경(書經)』·『주역(周易)』·『예기(禮記)』·『춘추(春秋)』)과 『사기(史記)』, 『후한서(後漢書)』, 『삼국지(三國志)』, 『진춘추(晉春秋)』, 『옥편(玉篇)』, 『자통(字統)』, 『자림(字林)』, 『문선(文選)』 등이었다.6) 이같이 태학에서 유교 경전과 문자학(文字學), 한문학(漢文學)을 교육하였다는 것은 치국(治國)과 학문이 유교에 의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사희(馬射戲) 벽화>   
덕흥리 고분에 그려져 있는 고구려인들의 마사희 장면이다. 두 명의 기마 인물이 한 조를 이루어 다섯 개의 말뚝 위에 놓인 목표물을 말을 타고 달리면서 떨어뜨리는 경기 모습이다. 검은 두건을 쓴 두 기마 인물이 목표물을 향하여 활시위를 당기고 있고, 그 뒤로 두 기마 인물이 대기하고 있다. 중앙에는 기록하는 인물과 심판관처럼 보이는 두 사람이 지켜보고 있다. 활쏘기는 전쟁이 잦았던 삼국시대에 무(武)를 중시하는 경향에 따라 필수적인 교육 과목으로 인식되었다.

그런가 하면 큰 거리에 서민 교육 기관인 경당(扃堂)을 세워 독서와 활쏘기를 익히게 하였다. 여기서 독서뿐 아니라 활쏘기를 익혔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삼국시대에는 전쟁이 잦아 무(武)를 매우 중시하였고, 따라서 활쏘기는 필수적인 교육 과목이었다. 이렇게 보면 당시 유교 문화는 상무적(尙武的) 성격이 짙었다고 할 수 있다.

또 고구려에서는 부모와 남편의 상복제(喪服制)도 중국과 같아 삼년복을 입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유교적 예제(禮制)가 어느 정도 보급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고분 벽화에 나타나는 사신도(四神圖) 등을 통해 한나라 이후 이루어진 음양오행(陰陽五行) 사상이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필자] 권오영
6)『주서(周書)』 권49, 열전(列傳), 이역(異域) ; 『북사(北史)』 권94, 열전, 고구려(高句麗) ; 『구당서(舊唐書)』 권199, 열전, 동이(東夷), 고려(高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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