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2장 조선시대 성리학의 발전2. 성리학 연구의 심화

서경덕과 이언적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1489∼1546)과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은 16세기에 시작된 조선 성리학 연구의 서막을 연 선구자였다. 화담의 성리학은 주기론에 해당하는 것이었고, 회재의 철학은 주리론의 성격을 가졌다. 이들의 학문은 각기 기호학파의 대표가 된 율곡과 영남학파의 종주가 된 퇴계에 영향을 주어 양대 학파의 연원(淵源)을 이루게 하였다.68)

서경덕은 평생 과거를 포기하고 은거하며 학문에 몰두하였다. 그는 송대의 장재(張載)와 소옹(邵雍)을 사숙(私淑)하여 많은 영향을 받았으나 독서보다는 주로 독자적인 자연 탐구와 명상으로 독학하였으므로 독창적이고 자득한 면이 많았다. 그의 철학은 장재의 주기설과 소옹의 상수학(象數學)에 영향을 받은 것이 있었지만, 우주의 근원을 탐구하고 그것을 기일원론(氣一元論)으로 체계화한 점에서는 심오하고 독창적인 면이 있었다.

서경덕은 우주의 본체를 장재와 같이 태허(太虛)로 파악하고, 태허의 담연무형(淡然無形)한 것을 선천(先天)의 기(氣)로 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만물로 형상화된 것을 후천(後天)의 기로 인식하여 모든 것이 하나의 기 운행 으로 보았다. 즉 하나의 기가 발동하지 아니한 본체를 선천이라고 하고, 이미 발동한 현상을 후천이라고 인식한 것이다. 그는 선천의 기로써 우주 만물의 본체를 삼고, 그것이 만상을 일관하는 실체로 파악한 것이다. 이러한 기는 제한이 없고 시종이 없으며 항구 불멸한 실체라 하였다. 선천의 기는 스스로 작용하여 만물로 형상화하는데, 그것을 ‘기자이(機自爾)’라 하였다. 기는 그 작용이 다른 존재에 의해 사역(使役)되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가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으로 본 것이다. 담연한 기는 만물에 보편타당하여 그것이 엉기어 모이면 사물이 되고, 사물이 흩어지면 바로 그 본연의 기가 되어 선천의 담연한 기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이(理)는 기의 밖에 대립하여 있는 것이 아니고, 기의 안에 있으면서 기의 작용을 주재하는 법칙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그의 철학 체계에 있어서는 이의 역할이 존재할 곳이 없게 된다. 때문에 그는 주리론자와 달리 이가 기보다 선행하는 것으로 볼 여지가 없었다.

<서경덕의 글씨>   
집에서 밤이 깊도록 술 마시며 학문과 시를 논의한 감회를 읊은 서경덕의 시이다. 서경덕은 기는 우주를 포함하고도 남을 만큼 무한량(無限量)이고, 빈틈이 없으며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영원한 존재이며, 스스로의 힘에 의해서 만물을 생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 즉, 이는 기보다 선행할 수 없다고 보았으므로 주기론에 해당한다.

서경덕의 주기론은 율곡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고, 이후 율곡학파에서는 이를 도덕적 명제가 아니라 형이상학의 한 형식적 존재로 보려는 경향이 강하게 되었다. 화담의 제자로는 이구, 허엽(許曄, 1517∼1580), 박순(朴淳, 1523∼1589) 등의 명사가 있어 학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퇴계는 주리론의 입장에서 서경덕의 철학을 비판하였으나, 율곡은 화담 철학의 독창적인 면과 이기불상리(理氣不相離)의 요체를 인식한 점을 높이 평가하였다. 다만 기의 작용을 이(理)와 같은 것으로 혼동하였다고 비판하였다. 율곡은 화담의 일기장존(一氣長存)과 영혼불멸설(靈魂不滅說)을 비판하고 궁극적인 존재를 태극의 이로 보았기 때문이다. 화담의 주기론이 율곡에게 영향을 주기는 하였으나 그 성격이 같지는 않았다. 화담이 기일원론을 주장한 데 비하여 율곡은 이기이원론적(理氣二元論的) 주기론을 주 장하였다. 율곡도 기의 변용에 중점을 두고는 있었지만, 이의 궁국적 실체를 인정하였다.

회재 이언적은 화담과 달리 일찍부터 관직에 나아가 이상 정치를 실현하고자 하였으나, 을사사화(乙巳士禍) 이후에는 뜻을 잃고 낙향하여 학문과 교육에 종사하였다. 그는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 『속대학혹문(續大學或問)』,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 『봉선잡의(奉先雜儀)』, 『구인록(求仁錄)』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독락당의 계정>   
독락당(獨樂堂)은 이언적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거처한 집이다. 계정(溪亭)은 독랑당 뒤쪽의 시냇가에 있는 정자이다. 이언적은 성리학의 핵심 교재였던 『대학』의 장구에서 몇몇 구절의 차례를 바꾸고 자신의 설을 부연한 『대학장구보유』를 저술할 만큼 경전에 대한 이해가 매우 높은 학자였다.
<독락당 현판>   

이언적은 성리학의 핵심 교재였던 『대학』과 『중용』의 연구에 몰두하였다. 특히 주자가 『대학』의 장구(章句)를 개정한 데에 불만을 느끼고 정자의 견해를 토대로 하여 몇몇 구절의 차례를 바꾸고 자신의 설을 부연하였다. 주자의 설에 대한 불만이나 장구 개정은 퇴계를 비롯한 후대 학자들에게 비판을 받았지만, 소신을 가지고 독창성을 발휘한 점을 보면 그가 단순한 주자의 추종자가 아니었으며, 경전에 대한 이해가 높은 수준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언적은 조선 성리학에서 최초로 철학적 논변을 벌였다는 점에 서 주목된다. 그는 청년 시절에 선배였던 조한보(曺漢輔)와 무극태극설(無極太極說) 문제로 여러 차례의 왕복 논변을 진행하였다. 그의 문집에 수록된 ‘답망기당서(答忘機堂書)’ 5편은 최초의 본격적인 성리학 논변서라고 할 수 있다. 퇴계는 이를 보고 “이단을 물리치고 우리 도학의 본원을 천명하였다.”고 칭송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퇴계에 의해 동방 사현(四賢)의 한 사람으로 추앙되었고, 후일 문묘에까지 배향될 수 있었다.

이언적은 망기당의 무극태극설이 불교의 선학(禪學)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지적하고, 이를 성리학의 입장에서 비판하였다. 망기당의 학설은 전하지 않으나, 회재의 논변서에 의하면 그는 주돈이의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을 남송의 육구연(陸九淵)과 같이 “무극에서 태극이 생겼다.”고 해석한 것 같다. 그러나 회재는 주자와 같이 이를 “무극이면서 동시에 태극이다.”라고 해석하여 무극을 허무와 같은 것으로 인식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만물의 중심(樞紐)이 되어 우주의 총체적인 원리로 보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회재는 기본적으로 주자의 이원론적 이기설의 바탕 위에서 논리를 전개하였고, 주리적인 입장을 고수하였다.

[필자] 이영춘
68)조선 중기 성리학의 일반적인 경향에 대하여는 주로 이은순, 「조선 중기 성리학의 발달」, 『한국 사회 사상사 논총』, 지식 산업사, 1996에 의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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