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2장 조선시대 성리학의 발전3. 학파의 분화와 성리학의 전개

영남학파와 주리론

퇴계와 율곡에 의하여 심화되기 시작한 조선의 성리학은 곧 영남학파와 기호학파로 분화되어 지역색이 나타났고, 이것은 동서 분당(東西分黨)의 정치적 분파를 따라 고착된 학파를 형성하게 되었다. 퇴계의 주리론은 남인(南人)의 터전이던 영남을 중심으로 계승되었고, 율곡의 주기론은 기호 지방의 서인(西人)에 의해 답습되었다. 영남에는 또 퇴계학파와 달리 의리와 기상을 중시하는 남명의 제자들이 별개의 학파를 형성하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이러한 경향이 더욱 강화되어 주리론은 유리론(唯理論)으로, 주기론은 유기론(唯氣論)으로까지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의 유학 이론은 당론(黨論)과 결부되어 있었기 때문에 당파와 지연적(地緣的)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고착화·경직화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 때문에 사상적인 다양성을 발휘할 수 없게 되었고 다른 학설이나 이론에 대한 배척이 심해졌다. 결국 당론에 따라 퇴계와 율곡의 이기심성론을 고집하여 큰 틀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퇴계의 제자로는 조목(趙穆), 이덕홍(李德弘), 정구(鄭求), 유성룡(柳成 龍), 김성일(金誠一) 등이 있었다. 이들은 대체로 퇴계의 학설을 그대로 고수하고 자신의 이설을 세우지 않았다. 조목은 퇴계의 공식적인 적전(嫡傳)으로 인정을 받았으나 별로 독창적인 학설을 남기지 않았다. 유성룡과 김성일은 다 같이 임진왜란에서 충정을 다하여 존경을 받았고, 성리학에도 깊은 조예가 있었다. 이들은 퇴계의 대표적인 제자였으나 후일 이들의 서원 배향(配享) 차례 문제로 제자들 간에 시비가 일어나 병론(屛論)과 호론(虎論)으로 분파되었고, 이것이 퇴계학파를 둘로 나누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유성룡 계열의 병론은 정경세(鄭經世)-유진(柳袗)-유원지(柳元之) 등으로 계승되었고, 김성일을 추종하는 호론은 장흥효(張興孝)-이현일(李玄一)-이재(李栽)-이상정(李象靖)-유치명(柳致命)-김흥락(金興洛) 등으로 계승되었다. 호론은 근대에 이르기까지 저명한 학자를 많이 배출하여 퇴계학파의 주축을 이루었다.

<하회>   
이의성(李義聖)이 그린 하외도(河隈圖) 병풍 여덟 폭 가운데 육곡(六曲) 하회이다. 하회는 유성룡의 고향이다. 유성룡은 퇴계의 대표적인 제자로, 이생기설(理生氣說)과 이선기후설(理先氣後說) 등의 주리설을 강조하였다.

유성룡(1542∼1607)은 이생기설(理生氣說)과 이선기후설(理先氣後說)을 강조하여 퇴계의 주리설을 강화하였다. 그의 손자 유원지도 ‘상수소설(象數小說)’, ‘이기설(理氣說)’ 등을 지어 이(理)의 주동과 무궁함을 역설하고 율곡의 기발이승일도설을 비판하였다. 정구(1543∼1620)는 예학에 조예가 있어 『가례집람보주(家禮輯覽補註)』, 『오선생예설(五先生禮說)』, ‘오복연혁도(五服沿革圖)’, ‘심의제도(深衣制度)’ 등의 저술을 남겼다. 그의 예학은 이후 남인계 예학의 선구가 되었다.

영남학파에서 퇴계의 학설을 옹호하고 율곡의 이기론을 가장 비판한 학자는 이현일(1627∼1704)이었다. 그는 이에 동정(動靜)이 있으므로 기에 동정이 있게 된다고 하여 퇴계의 이선기후설을 지지하고 ‘율곡이씨사단칠정서변(栗谷李氏四端七情書辨)’을 지어 율곡의 설을 본격적으로 비판하였다. 그의 학설은 이재(1657∼1730), 이상정(1711∼1761), 유치명(1777∼1881) 등으로 계승되었다. 유치명은 이가 우주의 주체요 마음의 본체라고도 하였다. 이의 능동적인 활동을 강조하고 기의 능력을 무력화시킨 이론이었다.

[필자] 이영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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