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2장 조선시대 성리학의 발전4. 예학의 발달

『가례』 연구의 심화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까지 조선 성리학계에서 특히 주목되는 경향은 예학의 발달이다. 이는 성리학의 학문적 심화와 사회적 실천 단계에서 나타난 현상이다. 이 시대 예학의 성격은 주자가 지은 것으로 알려진 『가례』의 연구와 실천이었다.73) 14세기 후반 이래 신흥 사대부층이 형성되고 불교 의례가 쇠퇴하면서 그들의 가정에서 활용할 유교 의례서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때 중국에서 『가례』가 수입되었고, 조선 왕조의 개창과 함께 국가적으로 장려되었다. 15세기까지는 잘 시행되지 않았지만, 16세기에 양반 사회가 정착되면서 보편적 의례로 자리를 잡았다.

『가례』는 송나라 사대부 계층의 사회에서 성립된 예법으로 종래의 국가 중심적 왕조례(王朝禮)와는 지향하는 바가 달랐다. 이것이 16세기 이후의 조선 사회에서 광범위하게 수용된 것은 당시 조선의 사회 체제가 송대의 중소 지주층 사대부가 중심이었던 사회 성격과 유사한 면모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선시대 예학 연구가 『가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은 곧 학술 연구에서 성리학 일변도로 나아간 경향과 일치하는 것이다.

<『가례』>   
18세기에 간행한 『가례』이다. 주자가 편찬한 예서로 알려져 있다. 『가례』는 14세기 후반 신흥 사대부들이 가정에서 활용할 유교 의례서가 필요함에 따라 중국에서 들여온 것으로, 조선 왕조의 개창과 함께 국가적으로 장려되었다. 15세기까지는 잘 시행되지 않았지만, 16세기에 양반 사회가 정착되면서 보편적 의례로 자리를 잡았다.

『가례』에 경도된 조선의 예학자들은 그것을 사회 전체로 보급하여 시행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는 곧 의례 생활에 있어서 신분적 차별을 초월하려는 의식을 보여 주는 것이다. 국가와 왕실의 의례를 위하여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가 마련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박지계(朴知誡, 1573∼1635)와 같은 일부 예학자는 왕실에서까지도 『가례』를 준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는 궁극적으로 왕실과 사대부가의 차별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의식을 표현한 것이었다.

<이현보 초상>   
16세기에 그린 농암(聾巖) 이현보의 초상화이다. 이현보의 『제례』는 제사 음식의 배열법과 제사의 의식 진행 순서, 각 의식에서 지켜야 할 법도 등을 구체적으로 서술한 글로, 그의 문집인 『농암집』에 수록되어 있다.

조선 중기 사대부들이 『가례』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고 또 깊이 연구하고 있었던가는 당시의 예학 관계 저술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16세기 중반부터 17세기 중반까지 조선에서 저술·편집·역주된 예서는 대략 90여 종에 이르고 있다. 이 중에서 90% 이상이 『가례』와 관계된 예서이다.74) 그 중에서 중요한 것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가례』와 관련된 초 기의 저서로는 16세기 중반에 저술된 이현보(李賢輔)의 『제례(祭禮)』, 이언적의 『봉선잡의(奉先雜儀)』, 송기수(宋麒壽)의 『행사의절(行祀儀節)』, 김인후의 『가례고오(家禮考誤)』, 이황의 『퇴계상제례답문(退溪喪祭禮答問)』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저술은 대체로 주자의 『가례』를 실용적으로 재편집하거나 간단한 주석을 붙이는 정도의 수준이었다. 이들보다 조금 후대인 16세기 후반에는 이이의 『제의초(祭儀草)』, 유운룡(柳雲龍)의 『추원잡의(追遠雜儀)』, 박지화(朴枝華)의 『사례집설(四禮集說)』, 심수경(沈守慶)의 『상제잡의(喪祭雜儀)』, 김륭(金隆)의 『가례강록(家禮講錄)』, 김성일의 『상례고증(喪禮考證)』, 유희경(柳希慶)의 『상례초(喪禮抄)』, 이정암(李廷馣)의 『상례초(喪禮抄)』 등이 저술되었다. 이들 예서는 『가례』에 대한 이해가 한층 심화되고 또 제례나 상례 등의 연구로 전문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의례문해』>   
김장생이 제자나 벗들과 예에 대해 문답한 것을 아들 김집이 엮은 예서이다. 경전에 나타나지 않는 변칙적인 사례인 변례(變禮)를 주로 다루었다.

16세기 말에는 신의경(申義慶, 1557∼1648)이 처음 편찬하고 김장생과 김집이 증보하여 『상례비요(喪禮備要)』가 이루어졌는데, 이는 정밀하기로 유명한 예서였다. 이때부터 조선 예학은 중국의 수준을 뛰어넘어 발전하게 되었다. 유성룡의 『상례고증(喪禮考證)』과 이덕홍(李德弘)의 『가례주해(家禮註解)』도 중요한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신식(申湜, 1551∼1623)은 『가례언해(家禮彦解)』와 『의례고증(疑禮考證)』 등을 저술하였는데, 『가례언해』는 당시까지 축적된 『가례』 연구를 망라하여 반영한 것이었다.

송익필은 『가례주설』, 『예문답』 등을 저술하였고, 그의 예학을 계승한 사계(沙溪) 김장생은 『상례비요』 외에도 『가례집람(家禮輯覽)』, 『의례문해(疑禮問解)』, 『전례문답(典禮問答)』 등을 저술하여 17세기 조선 예학을 집대성하는 대 가가 되었다. 이 밖에도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의 『사례훈몽(四禮訓蒙)』,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의 『독례수초(讀禮手鈔)』 등을 중요 저술로 들 수 있다. 사계의 예학은 유계(兪棨, 1607∼1664)와 윤선거(尹宣擧, 1610∼1669)의 『가례원류(家禮源流)』로 발전하였고, 후에 이의조(李宜朝)의 『가례증해(家禮增解)』로 집대성되었다.

<이항복 초상>   
조선 중기에 그린 이항복의 초상화이다. 1622년(광해군 14)에 간행한 이항복의 『사례훈몽』은 관혼상제 즉 사례(四禮)에 관한 계몽서이다. 이언적의 『봉선잡의』를 많이 참고하여, 가례의 의절보다는 그 속에 숨어 있는 정신적인 예의 본질을 강조하였다.

이 시기 예학 연구와 저술은 주로 『가례』에 치중되어 있었고, 『주례(周禮)』, 『의례(儀禮)』, 『예기(禮記)』 등의 고례(古禮)에 대한 연구는 그다지 활발하지 못하였다. 고례의 연구는 세종대에 국가 전례의 정비 차원에서 이루어져 『국조오례의』로 정리된 후에는 큰 성과가 없었다. 그러나 17세기에 이르러 예학의 연구가 심화되자 소수의 학자가 고례 연구도 함께 추진하였다. 한강(寒岡) 정구는 당시에 김장생과 쌍벽을 이룬 예학자였는데, 『가례』의 연구와 더불어 고례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가 저술한 『오선생예설분류(五先生禮說分類)』, ‘혼의(婚儀)’, ‘관의(冠儀)’, ‘예기상례분류(禮記喪禮分類)’, ‘오복연혁도(五服沿革圖)’ 등은 이러한 연구의 결과였다. 정구의 예학을 계승한 허목(許穆, 1595∼1682)은 『경례유찬(經禮類纂)』을 저술하였고, 고례에 대한 이러한 연구는 남인의 예학과 예론에서 고례를 중시하는 경향으로 나타났다. 남인계 예학에서 고례 연구는 훗날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집대성하였는데, 『상례사전(喪禮四箋)』, 『제례고정(祭禮考定)』 등이 그 결실이었다.75)

[필자] 이영춘
73)『가례(家禮)』가 주자가 저술한 책인지 여부는 논란이 많다. 전승(傳承)에 의하면, 『가례』는 주자가 모친의 상중에 저술하였다가 유실하였는데, 주자의 사후에 비로소 세상에 나왔다고 하여 유래가 불분명하며, ‘가례서(家禮序)’ 외에는 주자의 저술로 단정할 문헌도 없는 편이다. 그래서 청대(淸代)의 고증학자들은 결코 주자가 저술한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주자의 저술로 알려져 권위가 높았고, 특히 조선시대에는 더욱 그러하였다.
74)고영진, 『조선 중기 예학 사상사』, 한길사, 1995, 182∼185쪽, 조선 중기 예서 목록표 참조.
75)이영춘, 「실학자들의 예학 사상(禮學思想)」, 『백산 박성수 교수 화갑 기념 논총』, 1991, 1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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