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리학의 정치 이상
성리학은 북송 오자(北宋五子, 주돈이(周敦頣)·장재(張載)·정호(程顥)·정이(程頣)·소옹(邵雍))와 주희(朱熹, 1130∼1200) 등 송나라 사대부(士大夫)가 자연학(自然學)과 심성론(心性論)을 결합하면서 만들어 낸 학문 체계이다. 성리학은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사유 체계에만 머무르지 않고 고유한 사회 제도론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점에서 성리학은 전면적인 사회 시스템의 변혁을 모색하였다고 볼 수 있다. 성리학의 역사적 탄생은 불교의 사유와 습속(習俗)에 대항하면서 고대 유교의 사회 구조를 재건하려는 방향에서 형성되었다.
성리학이 출현할 당시의 중국은 불교, 도교 등 출세간적(出世間的) 이념이 지식인 사회에 만연해 있었다. 공맹시대(孔孟時代)의 유교는 지식인들이 삶과 죽음의 문제를 비롯하여 심오한 철학적 문제에 대해서 제기하는 질문에 명쾌한 답을 주지 못하였다. 수많은 전란과 현실적 좌절 속에서 지식인들은 불교, 도교 같은 형이상학에 침잠(沈潛)해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지식인들의 현실 도피는 일반화되었다. 청담(淸談)과 은둔(隱遁)이 지식인들의 중요한 삶의 지표로 정착되고 있었던 것이다. 주희도 젊을 때 불교에 심취한 경험이 있을 정도로 이러한 당대 분위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러한 지적 분위기에 대한 반성이 지식인 사회에서 점차 일어났다. 이를 주도한 것은 송나라 사대부들이었다. 그들은 중국 사회가 쇠락한 원인을 불교 같은 외래 종교의 만연(蔓延)과 그로 인한 유교의 퇴조에서 찾았다. 오랑캐의 종교와 이념이 중국에 들어오면서 중국 옛 성인의 가르침이 막혀 버렸고, 성인의 올바른 가르침이 전해지지 않자 결국 중국은 약해졌다는 주장이다. 이는 북방 민족에게 세폐(歲幣)를 바치면서 평화를 약속 받던 송나라의 무력한 현실과 만나면서 상당한 설득력을 얻어 갔다.
사대부들이 불교의 대표적인 폐해로 지적한 것은 현실 도피였다. 현실 세계를 떠나 생산 활동에 종사하지 않으며 군역(軍役)을 부담하지 않는 승려들을 가차 없이 비판하였다. 이러한 비판과 함께 사대부들이 역점을 둔 것은 공맹 유교의 재생이었다. 이것이 성리학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그들은 불교와 도교가 지닌 고도의 형이상학을 유교적 언어로 재해석하고 융합하여 새로운 사유를 만들어 내었다. 그 안에는 공맹시대의 유교가 분명히 답하지 못하였던 우주 생성의 문제, 삶과 죽음의 문제 등과 같은 형이상학이 담겨 있었다. 그러면서도 유교 본연의 현실적 사회 체제와 정치 이념에 충실하였다. 그러한 점에서 성리학의 탄생은 중국 역사에서 중요한 획을 긋는 사상사의 일대 사건이라고 이를 만하다.
성리학이 불교와 도교에 비해서 우월하게 구성된 형이상학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당대 지식인 사회에서 설득력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갖는 시의성(時宜性) 때문이었다. 송대(宋代)는 중소 지주와 농민들의 경제력과 정치적 힘이 증대되어 가던 시기였고, 이들의 현실에 부합하는 이념 체계가 힘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성리학이 불교보다 단순한 이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불교를 압도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 때문이었다.
그러나 송나라가 몽고에게 멸망하면서 정작 성리학은 제대로 구현될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성리학이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사회에서 국정 교학(國定敎學)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데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송나라를 붕괴시킨 몽고(원나라)의 역할이 컸다. 남송을 멸망시키고 중원의 새로운 주인이 된 원나라는 불교를 숭상하고 있었지만 통치 이념으로는 성리학을 수용하였다. 그 과정에서 원나라의 영향권에 있던 고려에도 성리학이 전파되었다.
고려 후기에 전래된 성리학은 새로운 지식인 운동으로 자리 잡으면서 고려 사회에서 불교에 대항하는 정치 이념으로 변모해 갔다. 당대 고려의 현실도 송나라 사대부들이 직면하였던 그것과 매우 흡사한 점이 많았다. 그들은 몽고라는 이민족의 침입, 농업 생산력의 위기, 불교의 현실 도피 등 기존 사회 체제로 해결할 수 없는 총체적인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이 과정에서 개혁 세력으로서 신진 사대부(新進士大夫)가 힘을 얻어 갔고, 비로소 성리학을 국시(國是)로 하는 조선이 건국될 수 있었다.
고려의 불교 습속을 일소(一掃)하고 사회 전반을 성리학의 틀 속에서 정립하고자 한 시도는 종교에 입각한 임의적인 통치를 지양하려고 한 점에서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 비록 한계가 있지만 나름의 합리성을 가지고 일 체의 신비주의를 제거하려고 노력한 점은 세계사적으로 볼 때에도 매우 새로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비슷한 시기 유럽과 아랍 세계가 여전히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지 않은 사회였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연구자에 따라서는 송나라 사회와 조선 사회의 성립을 중세(中世), 근대(近代)와는 구분되는 근세(近世)라고 부르기도 한다.
조선에 뿌리 내린 성리학은 사회 전반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물론 짧은 시일 내에 이러한 변화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조선의 정치 체제와 사유 구조, 나아가 가족의 의미까지 그 내면에서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그것은 워낙 전면적이고 넓은 범위의 것이어서 어느 한 부분만을 특정하여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사회 기저의 총체적 변화는 성리학이 지향하는 정치 이상으로 귀결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과연 성리학이 그리는 이상적인 정치는 무엇이었을까?
우선, 성학(聖學)을 공부하여 성인의 경지에 오른 군주가 있어야 한다. 이 사람은 군주이며 동시에 만백성의 스승이 되는 존재로서 중국 고대의 문왕(文王)과 무왕(武王) 같은 인물이다. 이러한 군주 밑에는 훌륭한 신하들이 있어야 한다. 신하들은 성리학을 충실히 학습하여 본연지성(本然之性), 기질지성(氣質之性), 도심(道心), 인심(仁心), 천리(天理), 인욕(人欲)의 문제를 깊이 성찰한 사람이다. 아울러 실용적인 경세학(經世學)에도 밝은 사람이다. 신하들 밑에는 만백성이 자리하고 있다. 이들은 혼인을 통해서 가족을 구성하고 성리학이 제시하는 가족의 윤리에 따라 충실히 생산 활동을 하는 존재이다. 그러면서 군역과 부세(負稅)의 의무를 수행하고 친족(親族)과 향촌(鄕村)의 윤리 질서에도 귀속되어 있다.
이렇게 군주, 관료, 백성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어우러져 살아가는 대동 사회(大同社會)가 성리학이 지향한 이상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성리학은 그것을 이루기 위한 방법으로 우주론(宇宙論), 심성론 같은 형이상학적 영역과 제도 변통론(制度變通論) 같은 경세(經世) 논의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 은 성리학의 이상 사회를 이루기 위한 방법이라는 측면에서 넓게 보면 모두 성리학의 정치 이념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성리학 정치 이념의 외연(外延)은 성리학 논의 모두를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그 가운데 『대학연의(大學衍義)』 논의를 통한 성리학의 통치 질서 확립 문제, 교화서(敎化書)를 통한 사회 사상의 보급, 예송(禮訟)의 전개와 사상적 갈등, 호락 논쟁(湖洛論爭)과 경세관의 대립 문제를 통해 조선 후기 성리학의 정치 이념이 어떠한 방식으로 구현되었는가를 살펴보았다. 이들 논의는 조선시대 성리학의 정치 이념 가운데 무척 제한된 주제이지만, 이를 통하여 조선시대 성리학의 사회적 구현과 이념적 양태가 부분적으로나마 드러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성리학의 정치 이념은 조선 사회에서 끊임없이 시도되고 좌절되었다. 그것에 대한 평가는 조선시대 성리학의 전체적인 평가와 관련된 문제이므로 무척 어려운 일이다. 고대 사회를 극복하고 근대 사회로의 접점을 잇는 측면에서 보면 성리학은 나름의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한 이유로 앞서 언급하였듯이 중세와도 다르고 근대도 아닌 근세라는 개념으로 설정되기도 하였다. 근대로 들어오면서 성리학의 역사적 역할은 생명을 다하고 더 이상 사회적 설득력을 가질 수 없게 된다. 성리학이 설정해 놓은 군주-관료-백성의 관계가 균열을 일으키면서 일거에 붕괴되어 간 것이다.
이 글에서 서술할 성리학의 정치 이념과 갈등은 군주-관료-백성의 관계를 어떻게든 잘 보존해 보려고 노력한 사유의 흔적들이다. 이 삼자의 균형과 관계를 조절하면서 정치 이념이 형성되었다. 그러한 가운데 수많은 사유가 실험되었다. 이들 실험은 고스란히 조선 사회의 중요한 전통으로 수백 년간 생명력을 가지며 이어졌고, 지금까지도 부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한편 이러한 사유들 간의 경쟁과 충돌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충돌과 갈등은 모순되게도 조선의 사상사를 더욱 풍요롭고 정교하게 만들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