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3장 조선 성리학의 정치 이념과 갈등5. 호락 논쟁과 성리학 경세관의 대립

호락 논쟁의 전개

호락 논쟁의 주제는 권상하(權尙夏, 1641∼1721)의 문인들인 강문 팔학사(江門八學士) 사이에서 처음 비롯되었다. 그들 중 논의의 중심에 섰던 인물은 이간(李柬, 1677∼1727)과 한원진(韓元震, 1682∼1751)이었으며, 그들 논의의 중요한 주제는 ‘인성과 물성의 본성이 같은가 다른가’ 하는 문제였다. 그 논의 과정에서 스승 권상하는 한원진의 ‘인물성이(人物性異)’를 지지함으로써 호서 지역 노론 내의 이 논쟁은 한원진이 우세를 점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때는 엄격한 의미에서 지역 간 논쟁을 의미하는 ‘호락 논쟁’으로 부를 수는 없다.

<권상하 초상>   
18세기에 이명기가 그린 권상하의 초상화이다. 권상하의 문하에서 ‘인성과 물성의 본성이 같은가 다른가’를 놓고 벌인 호락 논쟁이 처음 비롯되었는데, 권상하는 인성과 물성의 본성이 다르다고 주장한 한원진을 지지하였다.

이 논쟁이 지역 간 학풍의 차이를 반영하는 호서 지역과 서울·경기 지역 노론의 논쟁으로 본격화한 것은 박필주(朴弼周, 1665∼1748)·어유봉(魚有鳳, 1672∼1744)·이재(李縡, 1680∼1746) 등 한양과 경기 지역 노론 학자가 이 논쟁에 관심을 갖고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면서부터였다. 특히, 지역과 학문이 서로 대립하는 본격적인 호락 논쟁은 1746년(영조 22) 이재가 ‘한천시(寒泉詩)’를 짓고 이것에 대한 응답으로 한원진이 1747년(영조 23) ‘제한천시후(題寒泉詩後)’를 지어 이재의 학설을 비판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호론과 낙론은 각기 지역의 학문으로 고착화되어 갔으며, 논쟁은 감정적인 부분으로까지 발전하면서135) 자연히 정치적인 색채를 띠게 되었다. 더욱이 호락 논쟁이 본격화되는 이 시기는 경신처분(庚申處分, 1740)과 신유대훈(辛酉大訓, 1741) 이후 노론이 정국을 주도하면서 자체 내 분열의 조짐을 보이던 때였다.

<이재 초상>   
18세기에 그린 이재의 초상화이다. 이재는 호락 논쟁에서 인성과 물성의 본성은 같다는 인물성동론을 주장하였다.

한양과 경기 지역 노론은 기본적으로 이간의 주장에 동조하였다. 그들은 호서 지역 노론이 ‘천하 사람들이 선으로 가는 길을 막는(沮天下爲善之路)’ 매우 우려할 만한 생각에 빠져 있다고 개탄하였다. 이에 반해 한원진과 윤봉구(尹鳳九, 1681∼1767)는 한양과 경기 지역 노론이 무분(無分) 논의에 빠져 있음을 비판하면서 자기 방어에 나섰다. 논쟁 과정에서 얼마간의 첨삭(添削)이 있었지만 한원진·윤봉구는 지속적으로 인성과 물성은 다르며, 미발심체에 선악이 존재하며, 성인과 범인의 심체가 다르다고 주장하였다. 반면 박필주·이재는 인성과 물성은 같고, 미발심체는 본래 선하며, 성인과 범인의 심체가 같다고 주장하면서 끝내 합의된 결론을 이끌어 내지 못하였다.

그들은 ‘인간 성선(人間性善)’의 근거를 정합적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성리학적 목적 의식은 같았지만 그것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는 서로 다른 방법과 입장을 취하였다. 낙론계가 본연성(本然性)이 지닌 선의 본래적 절대성을 강조하고자 한 반면, 호론계는 본연성이 지닌 선의 이질적으로 독특한 고귀성을 주장하고자 하였다.136) 이러한 차이가 발생하게 된 데에는 낙론계가 ‘이통(理通)’의 관점에 서서 보편성을 중시한 데 비해 호론계는 ‘기국(氣局)’의 관점에서 차별성을 중시한 데 이유가 있다. 성선(性善)을 설명하기 위한 목적은 같았지만 그것을 설명하는 방식은 달랐고, 결국 그 설명의 차 이는 사상과 경세관의 차이로 귀결되었다. 호락 논쟁 과정에서 설명 방식의 차이는 그들 사상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다.

이렇게 전개된 호락 논쟁에서 이기론상 호론과 낙론의 가장 큰 차이점은 다음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는 일리(一理)의 보편성(普遍性)·주재성(主宰性)을 어떠한 방식으로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둘째는 기(氣)를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137) 이(理)와 기는 별개로 인식될 수 없는 것으로 ‘이’를 이야기할 때는 이미 ‘기’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으며, ‘기’를 이야기할 때는 이미 ‘이’의 성격과 의미가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낙론은 김창협(金昌協, 1651∼1708)·김창흡(金昌翕, 1653∼1722)의 ‘이’의 보편성·주재성을 강조하는 논의를 계승하여 모든 사물 속에 균등히 내재되어 있는 ‘이’를 드러내고자 하였다. 그리고 낙론은 이러한 ‘이’의 보편성·주재성을 좀 더 확실히 담보하기 위해서 다시 ‘이’를 본래 모습 그대로 발현시켜 줄 수 있는 매개인 ‘깨끗한 기’를 설정하고자 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와 ‘기’는 서로 떨어질 수 없으므로(理氣不相離) ‘기’가 순수하고 깨끗해야만 ‘이’도 자신의 순수함을 제대로 드러낼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김창흡 초상>   
18세기에 그린 김창흡의 초상화이다. 김창흡은 형인 김창협과 함께 이이 이후의 대학자로 이름을 떨쳤다. 낙론은 김창흡의 이(理)의 보편성과 주재성을 강조하는 논의를 계승하였다.

반면에 호론은 기를 형기지사(形氣之私)로 인식하여 기질(氣質)의 의미로 파악하려는 경향이 강하였다. 따라서 기질과 관련하면 ‘이’는 다른 이름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한원진은 ‘이’는 본래 하나이지만 세 가지로 달리 일컬을 수 있다고 하여 형기를 초월해 말한다면 태극(太極)이 있고, 기질로 인하여 말한다면 건순오상(健順五常)의 이름이 있고, 기질을 섞어서 말한다면 선악의 성이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한원진의 주장은 성삼층설(性三層說)로 불린다.

<석실 서원>   
겸재(謙齋) 정선(鄭歚, 1676∼1759)이 석실 서원(石室書院)을 그린 그림이다. 석실 서원은 1656년(효종 7) 김상헌, 김상용을 기리기 위하여 세웠고, 이후 김창집, 김창협, 김창흡 등을 추가 배향하였다. 이곳은 낙론계의 종장을 자임하던 안동 김씨 일문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이’와 ‘기’ 그리고 그 관계성에 대한 인식 차이는 결국 인물성동이·성범인심동이 논쟁으로 표현되었다. 낙론은 천리는 인과 물, 성인과 범인이라고 하는 차별적인 조건을 넘어서서 그 어디에서나 동일하고 보편적이라고 믿었다. 그러한 관점에서 그들은 천리의 구현인 본연지성은 인과 물의 차이 없이 동일하며 심의 미발 상태에서는 성인과 범인의 심체가 같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깨끗한 심기’ 관념을 통한 천리의 온전한 발현은 성범인심동론의 이론적 배경이 되었다. 이와 같이 낙론은 일리가 인·물, 성인·범인을 넘어서 동일하다는 것을 통해서 이통적(理統的) 관점에서 동론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본연성이 지닌 선의 본래적 절대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반면 호론은 본연지성도 일단 이(理)가 아닌 성(性)인 이상 기질에 영향 을 받아서 청탁수박(淸濁粹駁)의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으니 사람만이 오상(五常)을 구비하고, 사물은 오상을 구비할 수 없다고 여겼다. 이것은 성인과 범인의 미발심체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호론은 마음이 일단 ‘기’인 이상 청탁수박이 있어 일정할 수 없고, 따라서 성인과 범인의 심체는 다를 수밖에 없다고 인식한 것이다.

[필자] 조성산
135)권오영, 「호락논변의 쟁점과 그 성격」, 『조선 후기 유림의 사상과 활동』, 돌베개, 2003, 45∼46쪽 참조.
136)윤사순, 「인성(人性) 물성(物性)의 동이논변(同異論辨)에 대한 연구」, 『한국 유학 사상론』, 열음사, 1986, 131쪽.
137)문석윤, 「외암(巍巖)과 남당(南塘)의 ‘미발(未發)’ 논변」, 『태동 고전 연구』 11, 한림 대학교 태동 고전 연구소, 1995, 2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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