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4장 예절로 다스리는 사회의 종법 질서1. 불교 의례에서 유교 의례로『가례』의 보급

『가례』의 전래와 보급

고려 말기에 원나라에서 성리학을 수입하고 『가례』가 전해지면서 일부 사대부 계층에서는 유교적 가정의례를 행하게 되었다. 『가례』가 우리나라에 전래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1308년(충렬왕 34) 백이정(白頣正)이 원나라의 연경에서 돌아올 때 정자·주자의 서적들과 함께 가지고 왔다는 기록이 있다.154) 『가례』의 예법을 실천한 사례는 공민왕대(1351∼1374)의 윤귀생(尹龜生)155) 및 우왕대(1374∼1388)의 정습인(鄭習仁)156) 등의 기사에서 보인다. 또 조정에서 공식적으로 『가례』의 시행을 주장한 기사는 창왕(1388∼1389) 때 올린 조준(趙浚)의 상소문과157) 공양왕 때 올린 정몽주의 상소문158) 등에서 보인다. 당시 비록 소수이기는 하지만 사대부 계층에서 『가례』를 준행(遵行)한 사람들이 있었으므로, 그 도입은 훨씬 이전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안향(安珦), 백이정(白頣正), 이제현(李齊賢) 등이 원나라에서 성리학을 도입하면서 『가례』도 함께 들여온 것으로 보인다.159)

그 결과 1390년(공양왕 2)에 이르러 『가례』에 의한 ‘사대부가제의(士大夫家祭儀)’가 제정, 반포되었다. 이것은 당시 보편화되어 있던 제사의 윤행(輪行) 관습을 지양하고 종자(宗子)가 주관하도록 하였으며, 아울러 신분에 따라 제사의 대수(代數)를 한정하여 가묘(家廟)를 건립토록 권고하는 것이 었다. 이는 고려 말에 새로운 지배 세력으로 부상한 사대부 계층의 유교적 성향을 보여 주는 것이며, 새로운 예속 정립에 표준이 된 조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듬해 6월에는 조정에서 관료들에게 가묘를 설치토록 하는 지시가 있었다.160)

고려 말기에 전래되어 조정에서 수용한 『가례』는 조선 왕조가 개창되면서 본격적인 국가 정책으로 시행되었다. 이는 숭유 억불(崇儒抑佛)을 표방하고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내세운 조선 왕조에서 불교적 예속을 불식(拂拭)하고 유교적 사회 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정책이었다. 불교 예속은 삼국시대에 시작된 뒤로 고려시대까지 1,000여 년의 세월을 지내면서 생활 습속으로 굳어진 것이어서 그것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조선 건국의 중심 세력인 사대부 계층은 불교 세력에 기반을 둔 구 귀족 세력을 타파하기 위해서도 불교의 약화와 유교적 질서의 확립을 필요로 하였다. 이것이 『가례』의 시행을 통한 유교 예속의 보급을 장려하게 된 계기였다. 그들은 화장(火葬)·법석(法席)·칠재(七齋)·불공(佛供)·단상(短喪) 등 불교적 상례와 장례를 불효(不孝)와 폐습으로 비판하고 유교 예속의 시행을 주장하였다.

<『주자가례』의 가묘지도(家廟之圖)>   
『주자가례』의 서두에는 가례도(家禮圖) 부분이 있는데, 가묘지도와 같은 도식을 통해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가묘는 사당(祠堂)이라고도 하며, 고조(高祖)까지 4대의 신주를 모신다.

『가례』의 보급에 대한 국가의 의지는 관료를 선발하기 위한 과거(科擧)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곧, 소과(小科)로 불린 진사시(進士試)와 생원시(生員試)에는 『소학』과 『가례』가 필수 과목으로 정해져 있었다. 이 두 과목에 대하여 조흘강(照訖講)이라는 간단한 구두시험(口頭試驗)을 실시하였는데, 이를 통과하지 못하면 과거에 응시할 수 없었다. 그리고 조정에서 지속적으로 보급하고자 하였던 향약도 향촌 사회에 유교 예속을 장려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노력을 통하여 고려 말에 전래된 『가례』는 먼저 조정의 관료와 사대부 계층에서 시행되고 점차 일반 백성들에게도 전파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일반 백성들에게도 교양 교육의 기회가 점차 확대되었고, 그들이 사대부 계층의 예속을 선망하였기 때문에 하층민에게도 『가례』 예속을 전파시킬 수 있었다.

<유생시과(儒生試科)>   
조선 후기에 유생들이 소과(小科)를 치르는 모습을 그린 풍속화의 밑그림이다. 소과인 진사시와 생원시에는 『소학』과 『가례』가 필수 과목으로 정해져 있었다.

성리학적 소양을 지닌 사대부가 중심이 된 조정에서는 국가 차원에서 유교적 왕조례(王朝禮)를 정비하기 위한 오례의(五禮儀) 정비와 함께 일반 사서인(士庶人)들에게 『가례』를 보급하기 위하여 공권력을 사용하였다.

태조는 조선 건국 직후에 반포한 즉위 교서(卽位敎書)에서 “관혼상제는 나라의 중요한 규범이니, 예조에서는 경전(經傳)을 자세히 연구하고 고금의 시세(時勢)를 참작하여 표준이 될 만한 예를 정하여 인륜을 두텁게 하고 예를 바로잡으라.”고 지시하였다.161) 이는 조선 왕조가 지향하는 예속의 방향과 원칙을 천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1395년(태조 4)에는 유학자 권근(權近)에게 관혼상제의 구체적 절차와 규정을 정하도록 명령하였다.162) 이에 따라 권근은 『가례』를 저본으로 한 『상절가례(詳節家禮)』를 저술하여 바쳤고 국가에서 이를 반포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 책은 현재 전하지 않고 보급과 시행도 잘 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태조 어진>   
1913년에 함경남도 영흥 선원전(璿源殿)에 있던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촬영한 사진이다. 태조는 건국 직후 권근에게 명하여 관혼상제의 구체적 절차와 규정을 정리한 『상절가례』를 짓게 하고 전국에 반포하였다.

그런데 원래 사대부 계층의 예서였던 『가례』를 제왕가(帝王家)에 적용하려는 노력이 조선 초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는 성리학을 국시로 한 조선 왕조가 불교 의례를 유교식으로 대체해 나가는 과정에 있었던 것인데, 태종∼세종대 제도 정비기에 왕조례가 아직 마련되지 못하였던 부분에서 『가례』의 활용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태종이 태조의 치상(治喪) 절차를 한결같이 『가례』에 의하도록 한 것이 그러한 예이다.163) 그래서 『국조오례의』 「흉례(凶禮)」의 국휼(國恤) 부분에는 특히 『가례』가 많이 수용되었다.

[필자] 이영춘
154)『가례(家禮)』의 우리나라 도입에 대하여는 고영진, 「15·16세기 주자가례(朱子家禮)의 시행과 그 의의」, 『한국사론』 21, 서울 대학교 국사학과, 1989 참조.
155)『고려사(高麗史)』 권121, 열전(列傳)34, 윤귀생(尹龜生).
156)『고려사』 권112, 열전25, 정습인(鄭習仁).
157)『고려사』 권118, 열전31, 조준(趙浚).
158)『고려사』 권117, 열전30, 정몽주(鄭夢周).
159)고영진, 앞의 글, 84쪽.
160)『고려사』 권63, 예지(禮志)5, 길례(吉禮), 대부사서인제례(大夫士庶人祭禮).
161)『태조실록』 권1, 태조 원년 7월 28일(정미).
162)『태조실록』 권7, 태조 4년 6월 6일(무진).
163)『태종실록』 권15, 태종 8년 5월 24일(임신) 및 26일(갑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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