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4장 개항에서 일제강점기 쌀 수출과 농촌 사회1. 개항과 쌀 수출쌀 수출의 증대와 유통의 확대

쌀 수출의 증가와 유통권

전통적으로 한반도의 유통권은 크게 두 개의 권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하나는 서해안을 따라 형성된 유통권으로 영산강의 나주, 금강의 강경, 한강의 마포, 대동강의 남포 등의 포구를 연결하는 것과 다른 하나는 동해안을 따라 형성된 유통권으로 동래와 원산을 연결하는 것이었다. 조선 후기 쌀의 유통은 서해안 유통권과 동해안 유통권 내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함경도 지역의 쌀 부족 현상으로 인해 삼남의 쌀이 부산으로 하납(下納)되어 원산을 통해 함경도 전역에 공급되기도 하였다.

<한강 포구>   
어느 한강 포구에 항아리가 쌓여 있는 모습을 촬영한 사진이다. 먼 곳의 물건은 한강을 통해 서울로 들어왔다. 서울 포구 중 가장 큰 마포까지는 큰 증기선이 들어올 수 없어서 제물포 또는 양화진에서 범선으로 물건을 실어 날랐다.

그러나 1876년 부산항을 통해 삼남 지방의 쌀이 일본으로 수출되면서 쌀 유통 구조가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부산항을 통해 일본의 면제품과 조선의 곡물이 교환되면서 전라도와 충청도 일대의 곡물이 수출을 위해 부산항으로 집적되기 시작하였다. 예전 하납의 형태로 일부 곡물이 부산항을 거쳐 원산으로 수송되기는 하였지만, 개항 이후에는 이보다 대량의 쌀이 부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수출되었다.

전라도와 충청도 쌀의 유통로의 변화는 서울의 곡물 가격 상승에 영향을 미쳤다. 조선 후기 이래 삼남 지역의 쌀은 서해안을 경유하여 서울로 수송되어 서울을 비롯한 주변 지역에서 소비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개항 이후 삼남 지역의 쌀이 부산항에 집적된 이후로 서울 유입량의 감소를 초래하기 시작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의 발발에는 도성 쌀값의 등귀가 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여기에 1880년대 성행한 쌀의 밀무역은 서울 곡가의 등귀를 더욱 부추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제물포항>   
1905년에 제물포 항구를 촬영한 사진이다. 최대 시장인 서울과 인접해 있는 인천의 시장권은 개항기에 전국 각지로 확대되었다.

쌀의 밀무역은 이미 개항 이전부터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1875년(고종 12) 동래부에서 올라온 보고에 따르면 왜선(倭船)이 곡물을 몰래 매입하고 있는 상황이었다.256) 밀무역은 개항 이후 더욱 증가하였다. 공무역을 빙자하여 잠매(潛賣)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세곡미(稅穀米) 중 일부를 빼돌리거나, 밀무역 후에는 고의로 배를 침몰시켜 단속을 모면하고자 하였다. 곡물의 일본 밀무역은 선상 객주(船上客主) 등의 곡물 상인과 지방관이 결탁하여 진행하는 경우가 많았고, 1890년(고종 27) 이후 일본 상인의 개항장 밖 행상(行商)이 본격화되고 호조(戶曹)의 발급 자체가 형식화되기 전까지는 줄어들지 않았다.257)

한편 1890년부터 인천항은 조선 수출입 무역액 최다를 기록하면서 부산항을 제치고 1위의 무역항으로 등장하였다. 수출입 무역 상품이 인천항으로 집중되면서 인천항을 중심으로 한 서해안 유통권에 변화가 일어났다. 특히 1894년 이후 평양의 진남포, 군산, 목포 등이 개항되면서 인천은 이들 지역에 수입 상품을 공급하고 이들 지역으로부터 쌀을 공급받아 일본에 수출하는 기능을 담당하게 되었다.

<종로 싸전 거리>   
19세기 말에 외국인이 종로에 있던 싸전 거리를 그린 그림이다. 인천항을 통해 쌀을 대량 수출하자 서울의 수요를 감당하지 못하여 서울의 쌀값이 상승하였다.

인천항이 쌀 수출항으로 대두되면서 종래 쌀 유통 양상에 변화가 일어 났다. 종래 삼남 지방의 세곡이 서울에 집중되어 서울의 쌀 소비를 충당할 수 있었지만, 인천항을 통해 대량의 쌀이 수출되다 보니 서울 소비를 위한 쌀이 부족해지는 현상이 발생하였다. 상인들은 인천과 서울의 쌀값을 비교하여 높은 가격으로 판매하기 시작하였고, 서울의 쌀값은 상승하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조선 정부는 1893년 만석동회선령(萬石洞回船令)을 내려 인천 쌀의 수출을 일시적으로 금지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258)

<군산항의 미곡 수출>   
구한말 군산항에서 인부들이 쌀을 선적하기 위하여 지게로 지어 나르는 광경을 촬영한 사진이다. 곡물의 수출 증가는 지주제를 강화하여 소작인의 생활을 어렵게 하였으며, 국내 곡물가의 앙등을 불러일으켜 영세민의 생계를 위협하였다.

부산, 원산, 인천을 중심으로 하던 쌀 수출은 1897년 진남포, 목포, 1898년 평양, 1899년 군산, 마산포, 성진 등이 개항되면서 더욱 증가하는 양상이었다. 개항 초기 부산항의 일본 수출액 중 쌀이 차지하는 비중이 3.3%였던 상황은 1879년 풍년으로 인해 58%로 급격히 비중이 높아졌다. 그러나 쌀은 일상생활의 소비와 직결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수출 비중이 높아질 수 없는 상품이었다. 일본 수출액에서 쌀이 차지하는 비중은 농작물의 풍흉(豐凶)에 따라 크게 좌우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품적 특성에도 불구하고 쌀 수출을 위한 항구가 추가로 개항되면서 쌀의 수출 비중은 점차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1880년에서 1904년까지 5년을 단위로 한 쌀 수출 비중을 보면, 1881년에서 1885년까지 일본 수출액 중 평균 5%였던 쌀 비중은 점차 증가하여 1886년에서 1890년 평균 비중이 15%를 상회하였고, 1891년에서 1895년까지는 38%, 다음 5년은 54%, 그리고 1901년에서 1904년까지는 47%를 차지하였다.

진남포의 경우를 보면 쌀의 “산출 지방은 황해도 안악, 재령, 봉산이 가장 중요해 수출 전액의 7할이 이 지방에서 나오는 것”이었고, 주요 산지는 대부분 간행이정(間行里程)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259) 진남포는 상품 유통에서 인천항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는데, 기선(汽船)을 이용하면 해로의 험지(險地)로 유명한 황해도 장산곶도 자유로이 통행할 수 있었고, 바람이 없으면 운항을 못하는 조선 선박보다 훨씬 안정적으로 유통을 장악할 수 있었다.

[필자] 김윤희
256)하원호, 앞의 책, 154∼158쪽.
257)日本農商務省, 『韓國土地農産調査報告 2-慶尙道·全羅道』, 1906, 513쪽.
258)강만길 엮음, 『한국 자본주의의 역사』, 창작과 비평사, 2000, 73∼76쪽.
259)김도형, 「대한제국 시기의 외래 상품 자본의 침투와 농민층 동향」, 『학림』 6, 연세대학교 사학연구회, 1984, 81∼1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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