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4장 개항에서 일제강점기 쌀 수출과 농촌 사회2. 일제강점기 쌀 생산과 농촌 사회쌀 생산과 유출을 위한 경제 기반 정비

토지 조사 사업과 지세 개정

1910년부터 실시한 토지 조사 사업은 토지를 측량하고 토지 소유권, 토지 가격 등을 조사하여 조선의 농업을 식민지 통치 기반으로 삼고자 한 사업이었다. 1914년 실시한 지세 개정과 함께 토지세를 확보하여, 식민지 경영 재원을 마련하는 한편, 일본 자본이 조선 농업에 대한 투자를 촉진하고 보장하는 제도적 정비 사업이었다.

<토지 조사 사업>   
토지 조사 사업을 위해 측량 기사가 토지를 측량하는 모습을 촬영한 사진이다. 토지 조사 사업은 일제가 조선의 농업을 식민지 통치 기반으로 삼고자 1910년부터 1918년까지 실시한 사업이었다.

토지 조사 사업은 먼저 신고주의에 의해 토지 소유자가 토지 신고서를 임시 토지 조사국에 제출하도록 하였다. 이 과정에서 지주 총대(地主總代)는 결수연명부(結數連名簿)와 신고서를 확인하여 이상이 없을 경우 토지 신고서에 날인하였다. 지주 총대가 확인한 소유 상황은 특별한 이상이 없는 한 그대로 인정되었고, 토지 신고서를 근거로 토지 대장을 작성하고 법적으 로 소유권을 인정받는 토지 등기 제도를 수립하였다. 이 과정에서 토지 소유권에 대한 분쟁이 발생하였다. 조선 총독부가 조사한 분쟁지(紛爭地) 총수는 3만여 건이었으며 10여만 필이었다. 토지 소유권 사정 면적이 1,900만여 필이었던 것에 비하면 약 0.5%의 필지에서 분쟁이 발생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분쟁이 발생한 토지는 대부분 국유화된 토지였다. 소유권과 경계 확정 문제로 제기된 분쟁은 끊이질 않았다. 분쟁지 사정에 대한 불복 신청도 2만여 건이 넘었다. 그러나 분쟁지 심사는 분쟁지 심사 위원회나 고등 토지 조사 위원회의 행정 처분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분쟁 신청자의 의견이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농부>   
1905년 서울 부근의 논에서 땅을 고르고 있는 농부들을 촬영한 사진이다. 일제는 1910년부터 토지 조사 사업을 실시하였고, 그 과정에서 막대한 토지가 조선 총독부의 소유지가 되었다.

1918년 토지 조사 사업을 완료한 결과 그 이전에 비해 많은 토지가 파악되었다. 1910년 말 조사된 토지 면적과 비교해 보면, 논은 84%, 밭은 79%가 증가되는 등 전체 경지 면적이 81%나 증가하였다. 증가된 토지는 1905년 이후 토지 간척 사업이 진행됨에 따라 늘어난 것도 일부 포함되긴 하였지만, 거의 대부분은 조사 과정에서 색출(索出)된 것이었다.

<동양 척식 주식회사>   
일제가 1908년 조선의 토지와 자원을 수탈할 목적으로 설치한 식민지 착취 기관인 동양 척식 주식회사 사옥 사진이다. 줄여서 동척(東拓)이라고도 한다. 동척은 토지 조사 사업 과정에서 막대한 토지를 소유하였고, 일본인 농업 회사나 수리 조합에 토지 개량 사업 자금을 대출하기도 하였다.

또한, 토지 조사 과정에서 막대한 토지가 조선 총독부의 소유지가 되었다. 예전부터 농촌의 농민들이 공동으로 이용하였던 삼림과 산야 그리고 미개간지 등은 소유권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가 뚜렷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919년 조선 총독부와 동양 척식 주식회사가 소유한 토지는 전체 조사 면적의 약 4.2%가 되었다. 또한 일본인이 소유한 토지도 전체 조사 면적의 약 8%나 되었다.267)

조선 총독부는 1914년 제정되었던 조선 지세령(朝鮮地稅令)을 토지 조사 사업이 완료된 1918년 개정하여 토지세의 안정적 확보를 위한 제도를 정비하였다. 지세령의 내용을 보면, 먼저 토지 소유권자를 납세자로 확정하여 납세에 대한 법적 책임을 부과하여 징세 대상을 확보하였으며, 토지세 과세를 토지 가격을 기준으로 삼아 생산량을 기준으로 하던 조선시대 결부제(結負制) 방식을 폐기하였다.

지목과 소유권을 법적으로 보장하고, 지역마다 편차가 심하던 토지세를 균등하게 책정하여 일본인이 토지를 구입하여 경영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등 토지의 상품화를 촉진시켰다. 한 예로 1911년 217건이던 토지 매 매 등기 건수는 1918년 26만여 건으로 크게 증가하였으며, 1920년 중반에는 약 50만 건을 상회하였다.268)

식민지 조선에서 진전된 토지의 상품화가 촉진되고 있던 상황은 농민의 대다수였던 소작농의 지위를 매우 불안정하게 만드는 요인의 하나로 작용하였다. 토지 소유주가 자주 변경될수록 소작 계약을 체결해야 하는 소작농에게는 소작지를 상실할 가능성이 늘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반면, 금융 조합을 통한 자금 지원을 받을 수 있었던 지주에게는 더 유리하였다. 더구나 단순 비례세였던 토지세는 지주의 토지 확대에 유리한 환경이었다. 여기에 1926년 농업 공황이 발생하기 전까지 곡물 가격의 상승률이 일반 물가 상승률을 상회하였던 환경은 지주의 토지 경영에 높은 이윤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필자] 김윤희
267)장시원, 「산민 증식 계획과 농업 구조의 변화」, 『한국사』 13, 한길사, 1994, 237∼288쪽.
268)박수현, 「일제하 수리 조합 사업 실태와 반대 운동(1920∼1934)」, 『한국 근현대 이행기 사회 연구』, 신서원, 2000, 307∼3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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