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사행원이 남긴 일본 사행록
조선시대의 통신사 연구 또는 한일 관계사 연구에 일본을 직접 견문한 통신사 일행의 사행록이 제일차 사료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일본 사행록은 특정한 직책을 맡은 사람이 쓰는 공식적 보고서가 아닌 개인적 동기에 따라 쓴 기행록의 일종이다. 따라서 통신사행원이라면 누구든지 쓸 수 있었는데, 현전하는 사행록 43권의 저자를 사행 당시의 직책별로 분류해 보면 표 ‘사행 당시 직책별 사행록의 수’와 같다.
사행 당시의 직책 |
삼 사 | 제술관 | 서기 | 군관 | 자제군관 | 역 관 | 미상 | 계 | ||||
정사 | 부사 | 종사관 | 당상역관 | 압물통사 | 한학상통사 | |||||||
사행록의 수 | 8 | 7 | 6 | 2 | 6 | 4 | 2 | 1 | 2 | 1 | 4 | 43 |
사행록 저자의 직책은 매우 다양한데, 초기일수록 삼사의 사행록이 많은 데 비해 후기로 갈수록 저자가 다양해진다. 제술관이 지은 사행록은 1719년(숙종 45)부터, 서기의 사행록은 1763년(영조 39)부터 나오는데, 이는 통신사의 임무 가운데 문화 교류의 역할이 커지는 사실과 비례한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현상이다. 또 후기로 갈수록 저자의 다양성과 함께 사행록의 수도 많아지는데, 1763년의 계미(癸未) 통신사행의 경우 10편이나 된다.
조선시대 통신사행원이 저술한 사행록으로 현재 전하는 것을 정리해 보면 표 ‘조선시대 통신사의 일본 사행록’과 같다.
일본 사행록은 대개 사행 중 매일 일기를 쓰고 견문을 적어 두었다가 귀국 후 그것들을 정리하여 저술하는 것이 일반적인 서술 방식인 것 같다. 예외적으로 신숙주(申叔舟, 1417∼1475)의 『해동제국기(海東諸國紀)』는 귀국한 지 30여 년이 지난 뒤에 임금의 명에 따라 저술한 것이며, 일반 사행록과 다른 점이 많다. 일반적인 일본 사행록은 개인적인 동기에 따라 저술하였기 때문에 조정에 제출할 의무가 없으며, 실제 그렇게 하지도 않았던 듯하다. 그러므로 사행록의 보존과 정리가 공식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한 채 개인적인 차원에 머무르게 되었고 허술해지기도 하였다.
일본 사행록은 개인이 자유롭게 쓴 기행록이었으므로 체재나 형식이 다양하며 내용도 사행록에 따라 차이가 많다. 현존하는 일본 사행록을 체재별로 분류하면 다음의 여섯 가지 형태로 나눌 수 있다.
○ 사행 일기만으로 되어 있는 것 : 출발에서부터 귀국 후 복명할 때까지의 과정을 일기체로 적은 것이다. 이 경우 문견 사항은 따로 분리하지 않고 일기 속에 포함하여 서술한다. 현존하는 사행록 43편 중에서 이 체재를 취하고 있는 것은 11편이다.
○ 시문만으로 되어 있는 것 : 사행 과정을 시로 묘사한 서사시(송희경의 『일본행록(日本行錄)』, 김인겸(金仁謙)의 『일동장유가(日東壯遊歌)』 등)도 있고, 풍경이나 서정을 읊은 시만으로 구성된 것도 있다. 현존하는 사행록 가운데 이 체재를 취하고 있는 것은 여섯 편이다.
○ 사행 일기에 견문록이 붙어 있는 것 : 이 형식이 가장 일반적이다. 문견록이라는 별도의 형식을 갖추는 경우가 보통인데 ‘문견잡록(聞見雜錄)’, ‘문견총록(聞見總錄)’, ‘문견별록(聞見別錄)’, ‘총기(總記)’, ‘추록(追錄)’, ‘문견록(聞見錄)’ 등의 명칭이 붙어 있다. 현존 사행록 가운데 18편이 여기에 해당된다.
○ 사행 일기에 시문이 붙어 있는 것 : 시문은 사행 중 읊은 것도 있고 일본의 문인과 창수한 것도 있다. 조엄(趙曮)의 『해사일기(海槎日記)』를 비롯하여 세 편이 이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해사일기』의 경우 ‘수창록(酬唱錄)’이라고 제목을 붙여 놓았다.
○ 사행 일기에 문견록과 시문이 붙어 있는 경우 : 김세렴(金世濂)의 『해사록(海槎錄)』을 비롯하여 세 편이 여기에 해당하는데, 『해사록』의 경우 문견록은 ‘견문잡록’, 시문은 ‘사상록(槎上錄)’이라고 제목을 붙여 독립시켜 놓았다. 형식 면에서 가장 잘 갖추어진 체재라 할 수 있다. 『해사록』 이외에 남용익(南龍翼)의 『부상록(扶桑錄)』과 정후교(鄭後僑)의 『부상기행(扶桑紀行)』이 있다.
○ 문견록만 있는 것 : 사행 일기 없이 일본에 관한 문견 사항만으로 구성되어 있는 형식이다. 신숙주의 『해동제국기』와 원중거(元重擧)의 『화국지(和國志)』가 여기에 해당된다. 형식 면에서 볼 때 사행록이라기보다는 일본에 관한 인문 지리서 또는 일본 국지적(國志的) 성격을 띠고 있는 독특한 체재이다. 그러나 저자가 통신사행의 일원이고 그 내용도 사행과 관련된 견문록 위주이므로 사행록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사행록의 내용을 보면, 사행 과정을 쓴 일기와 일본에서의 견문을 정리한 문견록으로 구성된 것이 가장 일반적이다. 또 대부분의 사행록에는 공통적으로 사행의 원역과 노정, 주고받은 서계(書契) 등의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문견록의 내용은 주로 일본의 국정, 풍속, 유학, 시문, 종교, 군제, 법제, 지리, 대외 관계 등이다. 사행록에 따라 질과 양에 차이가 있는데, 1763년(영조 39) 계미(癸未) 통신사행 서기였던 원중거의 『화국지』의 경우 76개 항목으로 세분하여 상세하고 방대한 내용을 수록하고 있다. 서술 분량 면에서 김세렴의 『해사록』, 조엄의 『해사일기』, 남옥(南玉)의 『일관기(日觀記)』와 같이 방대한 것이 있는가 하면 소략한 것도 있다.
한편 서술 주체에 따라 일정한 경향성이 엿보이기도 한다. 삼사가 쓴 사행록은 대체로 체재가 갖추어져 있고, 내용도 일본의 국정과 사회에 대한 깊은 관찰과 견문한 바를 서술하여 사행 목적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제술관과 서기의 사행록은 통신사행의 문화 교류가 본격화한 18세기 이후에 많이 저술되었다. 그들이 일류 문사였던 만큼 체재나 내용 면에서 풍부하고 뛰어난 것이 많다. 문견록도 상세하고, 특히 일본인과의 문화 교류 기록이나 일본 문화에 대한 서술이 많아 좋은 참고 자료가 된다. 대표적인 예로 신유한(申維翰)의 『해유록(海游錄)』, 남옥의 『일관기』, 원중거의 『승사록(乘槎錄)』·『화국지』 등이 있다.
역관이 쓴 사행록에는 실무 담당 전문가답게 사행 일정, 진행 과정, 경제적 측면과 관련된 기록이 상세하다. 자제군관이 쓴 사행록도 특색 있다. 자제군관은 군관이라는 명칭과 달리 문인이고 실질 임무가 별로 없어 비교적 여유로운 편이다. 그래서인지 그들이 쓴 사행록에는 실무 내용은 거의 없고 문학적인 내용이나 풍경 묘사, 일본의 풍속과 필담 창화에 관한 기록이 매우 풍부하다. 정후교의 『부상기행』과 홍경해(洪景海)의 『수사일록(隨槎日錄)』이 여기에 해당된다.
1763년 계미 통신사행의 정사로서 사행 당시 이전의 사행록을 모두 읽어 보았다는 조엄은 그 내용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전후의 일기가 이와 같이 많아서 없는 말이 거의 없다. 산천, 풍속, 관직, 법제, 의복, 음식, 기명(器皿), 화훼(花卉) 및 거행할 의절(儀節), 일공(日供)의 가감(加減) 등의 일이 모두 실리지 않은 것이 없다. 자세하게 다 갖추되 번거롭고 쇄쇄함을 꺼려하지 아니하여 마치 그 모든 광경을 그려낸 것과 같으니, 족히 통신사행으로 갈 때의 등록(謄錄)이 될 수 있겠다.82)
조엄이 밝힌 바와 같이 통신사행원이 남긴 사행록은 단순한 기행록이 아니라, 일본의 국정을 알아내고 또 후일의 사행에 참고하도록 하기 위한 의도에 맞게 충실히 씌여졌다.
82) | 조엄(趙曮), 『해사일기(海槎日記)』 계미년 10월 초6일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