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2장 조선 후기의 대외관과 일본 인식3. 조선 후기 대외관의 전개 양상

17세기 지식인의 소중화 의식

조선 전기에 형성된 소중화 의식(小中華意識)은 조선 후기에 와서 양상을 달리하며 좀 더 심화되는 변화상을 보였다.

17세기의 대외관 형성 배경에는 양 난과 대륙에서의 명청 교체가 있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조선 전기에 조선 사람들이 일본과 여진에 가졌던 우월 의식은 큰 상처를 입었다. 또 왕조가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교체된 사건은 전통적인 화이관과 국제 질서가 무너지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사대(事大) 관계가 정치적으로는 ‘명나라에 사대하면서(事明)’, 문화적으로는 ‘중화 문명을 섬기는 것(事華)’으로 관념적으로 모순이 없었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 와서는 정치적으로 ‘청나라에 사대하면서(事淸)’, 문화적으로는 ‘오랑캐 문화를 섬기는(事夷)’ 구조가 되었다. 즉, 사대라는 정치적·외교적 체제와 화이관이라는 문화 의식 간에 분열이 생긴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지식인들의 사상적 노력이 소중화 의식의 강화로 나타났다. 이 소중화 의식은 17세기 중반 이후에 당색(黨色)과 학파, 조야(朝野)의 구별 없이 일반화되어 18세기 중반까지 한 세기를 풍미(風靡)하였다.

<17세기의 소중화 의식>   
화(華) : 조선 / 이적(夷狄) : 청나라, 일본, 류큐 / 금수(禽獸) : 서양

조선 후기의 소중화 의식은 형성 배경에 따라 대명 의리론(對明義理論)과 반청 북벌론(反淸北伐論)에 기초하고, 거기에 전기 이래의 문화 자존 의식(文化自尊意識)이 결합된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소중화 의식의 핵심은 문화 자존 의식으로 명나라가 멸망한 후 조선이 중화 문명의 유일한 계승자이자 수호자라는 의식이다. 이것이 청나라와 일본 및 서양에 대한 인식의 기조가 되었다.

<송시열 초상>   
45세 때인 1651년(효종 2)에 그렸다는 설과 그가 살아 있을 때 노년의 모습을 그린 본을 따라 정조 때 옮겨 그렸다는 설이 있는 송시열의 초상화이다. 송시열은 조선 후기의 소중화 의식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였다.

조선 후기의 소중화 의식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한 사람은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었다. 그는 조선이 명나라의 적통(嫡統)을 잇는 후계자로서 ‘화(華)’를 지켜 나가야 하고, 청나라를 벌하는 것은 춘추대의(春秋大義)로서 일의 승패와 존망(存亡)은 논할 바가 아니라고 하였다.108) 나아가 그는 명나라에 대한 사대를 ‘천리(天理)’로 규정하는 한편, 광해군대에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진행한 상황주의적 외교를 ‘인욕(人欲)’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는 이와 함께 조선이 예의의 나라로 천하 사람들이 소중화라고 불러 왔으며,109) 기자 조선(箕子朝鮮) 때부터 문화가 발달하여 중국에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였다.110) 그는 중화는 지계(地界)에 관계없이 성립될 수 있는데, 당시 중국은 이적(=청나라)에 의해 점령되어 중화 문명이 소멸되었고, 이를 대신 보존하고 있는 조선이 유일한 중화라는 논리를 전개하였다. 송시열의 이 문화 자존 의식은 대명 의리론 및 북벌론과 표리일체(表裏一體)를 이루면서 조선 후기 대외 인식의 주류가 되었다.

<허목 초상>   
1794년(정조 18)에 이명기(李命基)가 그린 허목의 초상화이다. 기호 남인인 허목은 『동사』를 저술하면서 주변 민족을 다룬 ‘외이열전’과 ‘흑치열전’을 수록하여 조선 중심의 화이관을 드러내었다.

한편 소론계(少論系)의 윤선거(尹宣擧), 박세당(朴世堂), 조귀명(趙龜命) 등은 노론계(老論系)만큼 적극적이지는 않았지만 소중화 의식과 북벌론에 동조하였다. 남인계(南人系)는 광해군대에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 양다리 외교를 주도하였던 만큼 대명 의리론과 북벌론에서는 소극적이었다. 17세기 후반 이후 청나라가 안정되면서 북벌론이 허구화되자 가장 통렬하게 비판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조선이 중화 문명의 후계자라는 의식은 남인계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역사의식에 반영되어 정통론(正統論)의 전개로 나타났다. 홍여하(洪汝河, 1621∼1678)는 『동국통감제강(東國通鑑提綱)』에서 정통론을 적용하였고, 그의 『휘찬여사(彙纂麗史)』와 허목(許穆, 1595∼1682)의 『동사(東事)』에서는 각기 ‘외이열전(外夷列傳)’과 ‘흑치열전(黑齒列傳)’을 수록하여 조선 중심의 화이관을 표명하였다.

그러나 같은 소중화 의식이라 하더라도 조선 전기와 후기는 내용상 차이가 있다. 17세기의 소중화 의식은 조선이 바로 ‘중화’라고 주장한 점에서 ‘조선 중화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전기의 소중화가 ‘중국 다음’이라는 의미가 강하였다면, 17세기에는 중화 문명의 ‘유일한 계승자’라는 적극적인 의미가 핵심이다. 그러한 구분의 필요성 때문에 최근 이것을 ‘조선 중화주의’로 파악하는 경향이 있다.111)

그런데 17세기의 소중화 의식은 형식 논리 면에서 조선 중화주의의 요 소를 갖추고 있지만 명나라의 그림자, 즉 ‘숭명성(崇明性)’을 완전히 탈피하지 못하였다는 점에서 근대적 민족주의 의식이라기보다는 중세적 문화 보편주의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기존의 중화주의적 화이관에 조선을 대입하였을 뿐 국제 사회에서의 현실성과 대등한 국제 의식이 결여되어 있었다. 따라서 종족적·지리적 화이관을 완전히 극복하고 문화 중심의 화이관과 결합되면서 조선 중화주의가 좀 더 체계화되는 것은 18세기 중반 이후의 실학파에 의해서였다. 요컨대 같은 조선 중화론이라 하더라도 17세기 이전의 성리학자와 18세기 실학자 간에는 질적인 변화와 함께 논리의 세련도나 체계화 수준에서 큰 차이가 있다. 이 차이는 중세적 국제관과 근대적 국제 관념을 가르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구분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필자] 하우봉
108)송시열(宋時烈), 『송자대전(宋子大全)』 권213, 삼학사전(三學士傳).
109)송시열, 『송자대전』 권213, 삼학사전.
110)송시열, 『송자대전』 권214, 김삭주형제복수전(金朔州兄弟復讐傳).
111)조선 중화주의에 관해서는 정옥자, 『조선 후기 조선 중화사상 연구』, 일지사, 1998 참조.
창닫기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