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2 양품과 근대 경험

06. 미국 타운센드 상회, 일상을 바꾼 석유

1900년 경성의 짙은 어둠을 밝힌 전등불은 현기증 나는 근대 ‘별천지’를 경험하는 충격이었다. 이후 식민지시대 경성 진고개와 혼마치[本町]의 일본 상점가는 ‘금가루를 뿌린 듯 불야성’을 이루었고, 조선사람 사이에서는 저녁나절 뚜렷한 목적 없이 일본 상점가를 배회하는 풍습이 생겨났다. 그러나 개항 이후 우리의 일상 속 ‘밤의 문화’를 빠른 시간에 바꾸었고, 또 그 영향을 장기 지속적으로 미친 상품이 있다면 이는 바로 석유일 것이다.

개항 초기만 해도 석유는 조선 사람에게 익숙한 존재가 아니었다. 황현은 “석유는 영국과 미국 등의 나라에서 생산되는데 더러는 바다 가운데서 얻는다하고, 더러는 석탄에서 빼낸다 하며, 또 어떤 이는 돌을 짜낸 것이라 하여 그 설명이 같지 않다.”라고 낯선 양품을 소개한다. 석유는 1884년 일본 상인에 의해 수입되기 시작하였는데, 석유 한 홉을 가지면 사나흘에서 길게는 열흘까지도 등잔을 밝힐 수 있었다. 이에 황현은 “석유가 나오면서 산이나 들판에서 기름을 짜는 열매는 번성하지 않게 되었고, 온 나라에서 석유로 등을 켜지 않는 자가 없게 되었다.”고 하였다. 아주까리, 동백, 들깨, 관솔, 쇠기름의 등잔불이 사라진 것이다. 이렇게 되자 일본상인들은 석유 사용에 적합한 양철 칸데라, 즉 남포등을 곁들여 들여왔다.

<스탠더드 석유회사가 판매한 솔표 석유>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된 석유는 미국산 ‘송인(松印)’ 석유였다. 이는 1879년 존 데이비스 록펠러(John Davidson Rockefeller)가 설립한 거대기업 스탠더드 석유회사(The Standard Oil Co.) 제품이었다. 1889년에는 러시아산 석유가, 1896년에는 일본산 ‘월후유(越後油)’가 수입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악취와 매연이 없는 높은 품질 때문에 송인석유는 다른 제품에 비해 가격이 훨씬 비쌌지만 시장점유율에서 타의추종을 불허하였다.87)

석유의 국내가도 다른 물품에 비해 고가였다. 1897년 당시 최상품 쌀 한 되는 10전 2돈, 최상품 서양목 한 자가 4전이었으나 석유 값은 한 궤에 14냥이었다.88) 이듬해인 1898년 쌀 상품 한 되는 9전 9푼, 서양목 상품 한 자는 24전이었으나 석유 한 궤 값은 15냥이었다.89) 그럼에도 석유의 수입량은 급속하게 늘어났다. 통계에 따르면 1886년 석유수입량은 59,425갤론에서 불과 10여 년 만에 835,120갤런까지 늘어난다.90)

석유 등잔을 사용하는 집이 늘어나자 화재사고도 심심치 않게 생겼다. 서울 동부 우물골 정대년의 협호 김치화가 화재로 사망하였다. 이유인즉 김치화는 병으로 일어나지 못하고, 밤이면 석유 등불을 켜 놓고 밤을 지샜는데, 그의 처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석유가 이불에 기우러져 불이 났던 것이다.91) 또한, 제경궁 앞에 사는 홍종호의 며느리는 석유 등불 아래서 다림질을 하다가 석유등이 넘어지는 바람에 결국 불이 일어나 연기에 질식해 죽었다.92)

조선 석유시장이 폭발적 수요와 잠재성을 보이자, 미국인 타운 센드(Walter Davis Townsend, 陀雲仙, 1856∼1918)는 석유시장을 독점하기 위한 노력을 전개하였다. 그는 1878년부터 일본에 있는 모스(Morse)의 American Clock and brass Company에 고용되어 미국산 상품 수입과 위탁판매, 무기판매업 등에 종사하였다. 타운센드는 이 회사가 이름을 바꾼 American Trading Company의 조선대리점으로, 1884년 5월 국제 무역항인 인천항에 등장하였다. 첫 이름은 모스 타운센드 상회(Morse & Townsend & Co.)였다. 그 후 사업을 확장하면서 1895년 타운센드 상회로 독립한다.

<『독립신문』에 보이는 타운센드 광고>   

타운센드는 조선에 들어와 서양목을 팔고 조선 내륙의 쌀을 수집해 수출하였다. 이 과정에서 타운센드 상사로부터 외상으로 받은 부채를 갚지 못하는 조선 객주들이 늘어났고, 이는 한·미간 외채분쟁으로 비화하기도 하였다. 타운센드는 개틀링 기관총(Gatling gun) 및 소총과 탄약 등 무기도 수입해 조선정부에 팔았다. 기선(汽船), 전기용품 구입에도 관련하였다. 화약제조 및 정미업에도 손을 댔고, 식료품·식기류·의약품 등 잡화류 수입과 판매도 겸하였다. 그러나 타운센드의 가장 두드러진 무역 업종은 역시 석유 판매의 독점권을 쥔 것이었다.

타운센드는 1894년부터 부산의 절영도, 인천 월미도 등지에 등유창고 부지를 물색하였고, 그 해 제물포 월미도에 약 5백만 갤런 규모의 석유저장고를 만들었다. 타운센드의 주도면밀한 준비작업은 1897년 스탠더드 석유회사의 조선특약점 계약으로 이어졌다. 조선 내 모든 송인석유 판매권을 장악한 것이다.

같은 해 독일의 세창양행은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의 수마트라(Sumatra)산 석유를 시판하였다. 세창양행은 이 석유를 염가로 조선에 보급하려 하였으며, 『독립신문』을 통해 계속 광고전을 펼쳤다. 하지만 이 석유는 품질이 현격히 떨어져 수입이 중단되기도 하였다. 일본상인들은 러시아산 석유 나 일본 석유를 미국제 중고 석유통에 넣어 미국 상표를 도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타운센드 상회의 석유판매에 다른 석유들이 영향을 미치지는 못하였다. 스탠더드 회사 석유는 각 지역의 조합에 의해 담당 판매되었다. 각 조합은 1905년까지 인천, 부산, 군산, 목포, 원산, 대구에 설치되었는데, 기존의 석유를 판매하던 일본상인들을 조합원으로 끌어들여 완전히 조선 시장을 독점하였다.

근대 조선에 수입되어 생활문화의 구석구석을 바꾸어간 석유의 수입에는 미국 타운센드와 그의 상회가 있었다. 그러나 타운센드 상회는 1905년 일본의 지배력이 커지면서 큰 변화를 맞이한다. 주한 미국 공사 알렌이 본국으로 소환되고 미국 공사관이 철수를 검토하자 상세(商勢)가 급격히 약화되었다. 스탠더드 회사와의 석유 공급 특약이 깨진 것은 1912년이지만, 타운센드는 이미 1905년부터 업종 변경을 시도하였다.

이후 석유공급의 이권은 고스란히 일본인에게로 넘어갔다. 석유는 산업사회를 이끌어간 원동력이었다. 그리고 석유는 지금까지도 수입된다. 석유의 수입과 판매가 미국상인의 손에서 일본상인으로 넘어간 것은 구한말 직포업계와 제약업계와 유통업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루지 못한 정치적 독립과 경제적 자립경제 수립의 아쉬움은 그래서 더욱 크다.

[필자] 이철성
87) 하지연, 「타운센드 상회(Toensend & Co.) 연구」, 『한국근대사연구』 4, 1996.
88) 『독립신문』 1897년 3월 6일자 4면 물가.
89) 『독립신문』 1898년 1월 4일자 4면 물가.
90) 하지연, 앞의 글, p.36.
91) 『독립신문』 1896년 4월 30일자 2면 잡보.
92) 『독립신문』 1896년 9월 19일자 2면 잡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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