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1 토기의 등장과 확산

05. 선사시대 토기의 기능

일반적으로 토기의 기능은 그릇으로서의 기능이다. 토기가 사용되기 이전에도 식물 줄기를 엮어서 만든 바구니나,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용기는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도구에 비해 깨어지기 쉽고, 무거워서 운반도 어려운 토기가 그릇의 기능을 한 것은 신석기시대의 도래와 관련이 있다.

빙하기가 물러가고 기후가 따듯해지자 사람들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만 하였다. 500만여 년에 걸친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정착생활을 시작하였으며,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기 시작하였다. 아울러 구석기시대의 깬석기[打製石器]와 더불어 새롭게 개발된 간석기[磨製石器]를 사용하여 정교한 작업이 가능해졌다. 농경의 시작과 정착생활로의 변화는 무겁고 깨어지기 쉬워 장거리 운반이 어려운 토기의 단점이 더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제 인류는 토기를 이용하여 음식물을 조리하여 담아 먹으며, 남은 음식을 저장하거나 짧은 거리를 운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특히, 음식을 조리하는 기능은 다른 도구로는 불가능하여 토기만의 장점이 되었다. 물론 구석기시대에도 사냥한 짐승고기를 익혀 먹을 수 있었지만, 신석기시대에는 토기를 사용하여 곡물을 끓여 먹을 수 있게 되었으며, 끓인 음식은 소화가 쉬워 영양섭취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집터 내부의 화덕과 토기>   
진주 대평리 어은1지구유적의 92호 집터(청동기시대) 내부의 화덕이다. 신석기시대부터 집터 내부에는 화덕이 설치되었으며, 형태는 돌을 돌려 만든 것과 아무런 시설 없이 땅을 약간 파고 만든 것 등 다양하다. 화덕 내부에는 작은 돌들과 함께 토기를 세워둔 예가 많은데, 화덕에 바닥이 뾰족한 토기를 세워놓고 조리를 한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의 부뚜막과 같은 아궁이 시설은 초기철기시대 이후에 주로 사용된다.[동아대학교 박물관]

한편, 변형이 쉬워서 원하는 형태를 자유롭게 만들 수 있는 점토의 성질 이용해 다양한 물건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아주 오랜 기간 자연에 적응하며 살아온 인류는 각종 자연재해를 경험하였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각종 상징물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또는 사냥과 농사, 후손의 번창을 기원하기 위한 상징물도 필요하였을 것이다. 그러한 정신활동의 대표적인 예로 유럽의 후기구석기시대 동굴벽화를 들 수 있다. 또한, 인류 최초의 토기 역시 그릇이 아니라 여성 상(像)이라는 점도 이러한 생각을 뒷받침해 준다. 물론 토기를 발명하기 이전에도 돌을 이용해 가슴과 엉덩이가 강조된 여성상을 만드는 등 상징물 제작이 이루어졌지만 토기가 발명됨으로써 훨씬 더 쉽게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토기의 기능은 일반적인 그릇으로서의 기능과 상징물로서의 기능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그릇으로서의 기능은 토기의 주된 기능인데, 선사시대 그릇의 기능을 구체적으로 추론하기는 쉽지 않다. 선사시대 토기의 기능을 알아내기 위해서 학자들은 토기 안팎에 남아있는 사용 흔적을 분석한다. 음식물을 끓이는 데 사용한 토기의 표면에는 그을음이나 끓어 넘친 음식물의 흔적이 남게 되고, 그릇 안쪽에는 음식물이 끓으면서 거품이 엉겨 붙은 흔적이 남게 된다. 최근에는 토기 안쪽에 남아있는 미세한 유기물의 흔적에서 단백질을 추출하여 어떤 종류의 음식을 조리하였는지 분석하기도 한다.

토기의 기능을 추론하기 위해 흔히 사용되는 방법은 토기의 형태를 분석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기능에 적합하도록 그릇을 만들기 때문에 형태는 기능을 반영하게 된다. 즉, 밑이 뾰족하거나 둥글고 아가리가 넓은 그릇은 음식물을 끓이는 데 적합한 반면, 바닥이 둥근 것은 열과 접촉하는 면적이 넓어서 열효율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아가리가 좁고 목이 긴 모양의 그릇은 액체를 담아서 운반하는 데 유리하며, 아가리가 넓고 납작한 그릇은 음식물을 담아먹는 데 적합하다. 또한, 어깨가 넓고 키가 큰 그릇은 저장에 적합하다. 그러나 형태를 분석하는 방법으로는 토기의 구체적 기능을 추론하기 어렵기 때문에 대체적인 기능만을 추론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학자들이 토기의 이름을 지을 때 기능과 관련해 물병, 술병, 밥그릇, 국그릇, 김칫독, 간장독 등과 같이 구체적인 명칭을 사용할 수 없는 것이다. 바리, 독, 항아리, 단지, 병, 사발, 보시기, 자배기, 접시, 솥 등과 같은 명칭은 그릇의 기능을 반영하는 것이지만, 기능을 확실히 알 수 없는 경우에는 특징적인 모양을 참고하여 굽접시(高杯 또는 豆形土器) 등과 같은 명칭을 사용하게 된다.

한반도 신석기시대의 토기는 대체로 바리 모양의 그릇이다. 물론 신석기시대 후기에는 일부 지역에서 목이 달린 항아리나 자배기 등 새로운 모양의 그릇이 사용되지만 대체로 바리 모양 그릇이 주를 이루고 있다. 바닥의 모양은 뾰족한 것과 납작한 것으로 구분되지만, 납작한 바닥의 토기도 아가리에 비해 바닥이 매우 좁아서 뾰족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전형적인 빗살무늬토기의 경우 크기에 따라 대·중·소형으로 구분하는데, 소형은 평균 4ℓ, 중형은 평균 17ℓ, 대형은 평균 56ℓ 가량으로 나누고 있다. 이 중 대형은 저장용으로 생각되고, 중형은 조리용, 소형은 음식을 담아 먹는 배식용으로 추정된다.

<토기를 이용한 밥 짓기>   
선사시대의 뾰쪽 밑 토기를 제작하여 실험적으로 밥을 짓는 모습이다. 선사시대의 토기는 처음 제작하였을 당시 흡수율도 낮고 단단하여 조리에 사용할 수 있다. 청동기시대 이후에는 유적에서 쌀, 보리, 조, 콩, 수수, 기장 등 다양한 곡물이 출토되고 있으며, 토기를 이용해 조리를 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복천박물관]
<토기를 이용한 밥 짓기>   
<덧띠토기 시루>   
광주 신창동유적의 저습지에서 출토된 것으로 이중의 겹아가리 아래에 한 쌍의 쇠뿔 모양 손잡이가 달려 있고, 바닥에는 구멍이 뚫려 있다.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시루가 사용되는 것은 초기철기시대의 일인데, 이때부터 음식물을 쪄서 익히는 조리법이 유행하게 되었다.[높이 21.7㎝, 국립중앙박물관]
<덧띠토기 시루 밑부분>   

사냥과 물고기잡이 외에도 신석기시대에는 초보적인 작물 재배를 시작하였으므로 토기를 이용해 조리한 재료는 식물의 열매나 곡물 로 추정된다. 실제로 한강변의 암사동과 미사리유적 등지에서는 많은 양의 도토리가 출토되며, 빗살무늬토기를 이용해 끓여 먹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도토리 외에도 여러 유적에서 조, 피, 기장 등의 곡물이 출토되고 있어서 다양한 곡물의 씨앗을 조리해 먹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곡물은 낟알 그대로 끓여 먹었을 수도 있겠으나 집터에서 많은 수의 갈판이 출토되는 점으로 미루어 곡물을 가루로 만들어 끓여 먹었을 가능성이 크다.

청동기시대의 민무늬토기는 훨씬 다양한 모양으로 제작된다. 청동기시대 초기의 덧띠새김무늬토기는 단순한 바리 모양이지만 전기 이후에는 다양한 형태의 그릇이 등장한다. 청동기시대에 들어와서 새롭게 등장하는 그릇으로는 목이 달린 항아리와 굽접시, 뚜껑 등과 손잡이가 달린 토기, 귀때[注口]가 달린 토기 등이 대표적이지만, 크기에 있어서도 다양한 차이를 보인다. 이러한 변화는 그릇의 기능이 이전시기에 비해 훨씬 다양해졌음을 의미하며, 음식물의 조리법에도 변화가 있었음을 뜻한다. 실제로 초기 철기시대에는 시루가 처음으로 나타나는데, 이 시기에 들어와서 음식물을 쪄서 익혀 먹는 새로운 조리법이 채택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민무늬토기 저장용 항아리>   
강릉 교항리유적에서 출토된 청동기시대 단지 모양의 토기로 아가리에는 깨어진 바닥을 재사용한 뚜껑이 덮여 있다. 청동기시대 집터에서는 항아리나 단지에 곡물이 담긴 채로 출토되는 예가 많은데, 집터 내부의 저장용 토기는 비교적 작은 크기이다. 한편, 집터 바깥에 별도의 구덩이를 파서 만든 저장시설도 많이 확인된다.[높이 34㎝, 복천박물관]

한편, 토기는 생활용기 외에 의례용으로도 사용된다. 신석기시대에는 의례용 토기를 구분하기 어렵지만 청동기시대가 되면 무덤에 부장되는 토기가 등장한다. 청동기시대 전기에는 붉은간토기가 고인돌 등의 무덤에서 출토된다. 붉은간토기는 일반적인 민무늬토기보다 아주 고운 바탕흙을 사용하였으며, 두께도 훨씬 얇다. 토기의 표 면에는 산화철 계통의 안료를 바르고 문질러서 광택을 내었는데, 형태는 항아리와 굽접시의 두 종류가 있다. 또한, 초기 철기시대에는 덧띠토기와는 제작 전통이 다른 검은간토기가 사용되는데, 역시 고운 바탕흙을 사용해 얇게 만들었으며, 표면에는 흑연을 바르고 문질러서 광택을 내었다. 검은간토기는 목이 긴 항아리가 일반적인데, 청동기시대 붉은간토기와 마찬가지로 무덤에서 주로 출토된다. 청동기시대의 붉은간토기는 집터에서 출토되기도 하지만 초기 철기시대의 검은간토기는 거의 무덤에서 출토되며, 덧띠토기 바리와 청동단검, 옥 등과 함께 묻은 예가 많다.

이러한 토기는 죽은 자를 위해 무덤에 묻어주는 특수 기능의 토기가 별도로 존재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밖에 부장용은 아니지만 굽접시는 형태상의 특징으로 보아 제사용 토기로 생각된다. 또, 붉은간토기 항아리와 같은 형태에 가지 모양의 장식이 채색된 토기 역시 의례용 토기로 생각된다.

<선사시대의 특수한 토기들 1>   
청동기시대에는 일반적인 민무늬토기에 비해 정교하게 제작된 토기들도 사용되었는데, 매우 정선된 바탕흙을 사용하였으며, 표면에 산화철이나 흑연을 바르고 문질러서 붉은색 또는 검은색의 광택을 내었다. 이러한 특수 토기들은 집터에서 출토되기도 하지만 무덤에서 출토되는 예가 많아 부장용이나 의례용으로 사용된 것이라 생각된다.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품(높이 12.4㎝)]
<선사시대의 특수한 토기들 2>   
경북대학교 박물관 소장품(높이 16.3㎝)
<선사시대의 특수한 토기들 3>   
대전 괴정동의 초기철기시대 무덤에서 출토되었다.

토기는 일반적인 그릇의 기능으로 사용되었지만 독널로 사용된 예도 있다. 1996년 남강댐 건설 중에 조사된 진주시 상촌리유적에서는 많은 수의 신석기시대 집터와 빗살무늬토기가 발굴되었다. 이 중 기원전 3,000년경으로 추정되는 집터의 한쪽 모서리에는 빗살무늬토기가 내부에 사람의 뼈가 들어 있는 채로 묻혀 있었다. 이는 토기를 널로 사용한 최초의 사례이다. 독널은 모두 두 점이 발굴되었는데, 아가리에는 빗살무늬가 새겨져 있었으며, 두 점 모두 바닥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큰 토기의 경우 높이는 40㎝, 아가리 폭은 38㎝가량으로 중형의 빗살무늬토기이다. 더욱 놀라운 점은 토기 내부에 묻힌 사람의 뼈가 화장(火葬)을 한 것이라는 점이다.23) 일반적으로 죽은 사람을 화장하는 것은 불교가 전래된 이후의 일로 생각해 왔으나 이미 신석기시대에 시작된 것이다. 상촌리유적의 독널은 토기에 시신을 안치하여 매장한 최초의 사례이며, 선사시대 사람들의 사후세계에 대한 인식의 일면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살아 있을 당시에 사용하던 토기를 죽은 후의 매장에도 사용하였다는 것은 토기가 사람의 일상 생활에서 뿐만 아니라 사후에도 중요한 의미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청동기시대에도 토기를 독널로도 사용하였다. 지금까지 조사된 자료를 보면 청동기시대의 독널은 주로 호서 지역에서 확인되는데, 송국리형토기를 독널로 사용하였다. 전라북도 익산 석천리유적에서 출토된 독널은 바닥이 좁고 몸통이 불룩하며, 좁은 목과 짧은 아가리가 달린 전형적인 송국리식토기이다. 독널로 사용된 토기의 바닥에는 구멍을 뚫었는데, 제작 후에 구멍을 뚫은 점으로 보아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던 토기를 독널로 재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독널을 묻기 위해서 먼저 수직으로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독널을 세워서 시신을 매장하고 아가리에 돌뚜껑을 덮은 후 흙으로 덮어 마감하였다.24) 독널로 사용된 토기의 높이는 53㎝ 가량 되는데, 다른 유적에서는 이보다 큰 독널이 발굴되기도 한다. 독널의 전통은 초기 철기시대에도 계속되는데, 광주 신창리에서는 두 개의 항아리를 아가리를 맞댄 채 눕혀서 묻은 독널이 발굴되었다. 독널로 사용된 토기는 목이 달린 길쭉한 몸통의 항아리로 몸통에는 쇠뿔손잡이[牛角形把手]가 달린 것이 많다. 독널의 크기는 두 개를 합쳐도 70∼80㎝가량으로 작은 편이다. 한편, 이러한 독널무덤의 전통은 삼국시대까지 계속되는데, 주로 영산강 유역에서 지배자들의 전용 독널무덤이 축조된다.

<복원된 청동기시대 독널>   
청동기시대 후기의 송국리식토기를 사용해 만든 독널무덤을 복원한 모습이다. 땅을 수직으로 파고 납작한 돌을 놓고 독널을 세운 후 다시 두 장의 돌을 덮어 마무리한 모습이다. 토기의 바닥에는 구멍이 뚫려 있는데, 선사시대의 독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징이다.[높이(오른쪽) 53㎝, 국립중앙박물관]
<초기철기시대 독널>   
광주 신창동유적에서 출토된 독널로 쇠뿔손잡이가 달린 두 개의 항아리를 맞대어 널로 사용하였다. 신창동 저습지 유적 뒤쪽 언덕에는 53기의 독널무덤이 조성되어 있는데, 선사시대의 독널무덤 대부분이 집터 주변에서 1∼2기씩 발견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크기로 보아 성인을 매장하였다고 보기 어려우나 세골장이나 화장 등의 방식으로 성인을 매장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특히, 집단 묘지라는 점에서 성인이 매장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길이(오른쪽) 40.8㎝, 국립중앙박물관]

한편, 독널은 크기가 작아서 시신을 매장하는 방식에 대해 여러 견해가 제시되었다. 그 중 하나는 선사시대의 독널은 유아용이라는 것이다. 보통 독널의 크기는 성인 키의 절반에도 채 미치지 못하는 작은 크기이기 때문에 유아용이라는 것이다. 또 독널이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청동기시대 이후에는 고인돌이나 돌상자무덤[石棺墓] 등 주로 사용되는 무덤양식이 따로 있으며, 독널무덤이 주로 집터 근처에서 발굴되기 때문에 이러한 생각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진주 상촌리에서 출토된 신석기시대의 독널은 시신을 화장한 흔적이 있으므로 선사시대부터 화장을 하였다면 유아용이라는 가설은 근거가 없다. 또한, 신창리유적에서처럼 독널무덤이 집단으로 발굴되는 예도 있는데, 이 역시 유아용 무덤으로 보기 어렵다. 왜냐하면 선사시대에 유아용 무덤만을 집단으로 축조한 사례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흙으로 빚은 얼굴>   
강원도 양양군 오산리유적에서 출토된 것으로 점토를 납작하게 빚은 후 손가락으로 눌러 얼굴을 표현하였다. 한반도에서 출토된 가장 오래된 토제 예술품 중의 하나이다.[높이 5.1㎝, 서울대학교 박물관]
<흙으로 빚은 여성 상>   
울산광역시 신암리유적에서 출토된 신석기시대 흙으로 빚은 조각상이다. 얼굴과 사지가 없으나 가슴과 엉덩이가 강조된 점으로 보아 여성상으로 보인다. 구석기시대 이래로 세계 각지에서 이와 유사한 형태의 조각들이 출토되는데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높이 3.6㎝, 국립전주박물관]

화장 외에도 세골장(洗骨葬)도 유력한 가설 중의 하나이다. 세골장이란 사람이 죽은 후 시신을 일정 기간 임시로 매장하는 등으로 처리하였다가 나중에 뼈만 추려서 독널에 안치하는 방식이다. 백제시대의 예이기는 하지만 원주 법천리유적에서는 독널 안에 사람의 사지 뼈를 우물 정(井)자처럼 포개 놓은 후 그 위에 머리뼈를 올려놓고 매장한 독널이 발굴되기도 하였다.

오늘날 전라남도 진도에는 초분(草墳) 또는 초장(草葬)이라 불리는 세 골장의 전통이 남아 있어 비교가 된다. 초분이란 사람이 죽으면 관에 넣어 집에서 가까운 밭가나 산기슭에 장소를 설치하여 짚으로 덮어두는 것을 말한다. 임시로 매장한 후 3년이 지나면 관을 열어 시신의 뼈만 추려서 칠성판에 올려놓고 본 장례를 치른다.

물론 수천 년 전의 독널무덤과 오늘날의 장례풍습을 직접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독널무덤이 주로 유행하는 지역이 영산강 유역의 전라남도 일대라는 점을 고려하면 선사시대의 전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졌을 개연성이 없지는 않다. 아무튼 신석기시대부터 토기를 독널로 사용하는 전통이 생겨 청동기시대 이후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집터 근처에 매장된 한두 기의 독널무덤은 유아용일 가능성이 크지만, 집단으로 매장된 공동묘지에는 세골장 등의 형태로 성인용 독널무덤도 축조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밖에 점토를 빚어서 만든 얼굴 조각 토기 등이 발굴되기도 한다. 경상북도 울주군 신암리유적에서는 빗살무늬토기와 함께 여성 상이 출토되었으며, 함경북도 청진 농포리에서도 흙으로 빚은 여성상이 출토되었다. 강원도 양양의 오산리유적에서도 점토로 만든 얼굴모양의 토기가 출토되었다. 또한, 청동기시대에도 함경북도 무산 호곡동유적을 비롯한 여러 유적에서 사람이나 짐승 모양의 토우들이 출토되는데,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기 위해 사용된 상징물로 해석되고 있다.

[필자] 최종택
23) 경상남도, 남강유적발굴조사단, 『남강선사유적』, 1998, p.25.
24) 국립중앙박물관, 『特別展 韓國의 先·原史土器』, 1993, pp.4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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