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인간 정신의 소산인 음악, 두껍게 읽기

고대 사회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음악은 노래와 춤, 기악이 결합된 종합예술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음악을 담당하였던 계층도 신분이 높은 집단이었다. 음악을 담당한 관리의 업무 가운데 중요한 것이 곧 자라나는 2세들, 귀족의 자제들을 잘 가르치는 일이었다. 그들이 자라서 나라를 잘 다스리려면 음악을 잘 배워 덕(德)을 갖춘 인물이 되어야 하였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음악을 가르치는 사람과 음악을 업(業)으로 하는 사람의 신분적 위상은 점차 낮아졌다. 음악하는 행위와 음악하는 사람에 대한 인식의 분열도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로 하여금 ‘음악’이란 무엇이며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성찰하도록 요구한다.

음악이란 인간 정신의 소산이다. 이는 음악의 기원을 살피기 위해 시기를 거슬러 위로 올라갈수록 자명해진다. 음악의 존재 양상과 존속 형태를 살피고자 할 때 음악이 인간 정신의 소산이라는 점을 잊지 않고 접근한다면 우리에게 더 많은 정보가 포착된다. 음악을 문화사적으로 연구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책의 제목은 ‘음악, 삶의 역사와 만나다’라고 한 것도 그와 같은 이유에서이다.

신을 찬양하고 감사를 드리기 위해, 정서를 함양하기 위해, 인격을 고양하기 위해, 작열하는 태양 아래 힘겨운 일을 할 때,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휴식을 취할 때 사람들은 각각 다른 목적으로 노래하고 음악을 연 주한다. 울어대는 갓난아기는 엄마의 자장가를 듣고 잠이 들며, 몸이 고단한 농부는 노래를 부르며 잠시 노고를 잊는다. 나라를 잃은 사람들은 서러운 마음을 노래에 실어 시름을 달래며, 부당하게 해고된 노동자들은 노동운동을 하며 노래를 부른다. 이처럼 음악은 우리의 정신 활동에 의해 만들어졌다. 인간 정신의 소산인 음악은 우리 곁에서 늘 우리를 지켜보았다. 이제 우리가 음악을 지켜볼 때이다.

우리는 이 책의 본문을 크게 다섯 부분으로 구성하였다. 음악의 근원, 음악과 일상생활, 조선 사람들의 춤, 전환기의 삶과 음악, 음악공연과 생활이 그것이다.

제1장에서는 음악의 근원을 이루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이를 위해 예(禮)와 악(樂)의 기원, 음악과 이념의 문제, 의례와 상징, 음악과 경제의 관점에서 이 문제에 대해 접근해 보았다. 고대 사회에서 음악과 제의는 밀접한 관련성을 지니고 있었다. 음악의 기원을 논할 때 특별히 종교기원설에 많은 학자들의 논의가 모아지는 것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인간이란 우주 대자연의 무한한 변화 안에서 그 변화를 바라보며 지극히 미약한 존재로 살아 왔다. 인간이 절대적 존재자에 대해 그를 경배하고, 숭배하며 존경하는 행위가 의례로 드러나고 그 의례에 반드시 수반되는 것이 음악임을 전제한다면 음악의 기원에 대하여 어쩌면 분분한 논의가 쉽게 수렴될 지도 모르겠다. 예(禮)와 춤[舞]의 상형(象形)을 보면 그 또한 제사 행위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옛 사회에서 행하였던 제사의례에서 예와 악, 그리고 춤과 기악이 함께 하였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조선시대는 유학적 이념으로 건국되어 예와 악을 균형적으로 추구하는 정치를 펼치고자 하였다. 오례(五禮)로 규정된 조선시대의 의례에서도 기악과 노래, 춤을 아우르는 형태의 종합예술이 구현되었다. 제사를 지낼 때나 연향이 있을 때에도 악·가·무가 연행되었다. 엘리트 교육에서 반드시 음악을 가르쳤던 것은 음악 교육의 궁극적 목적이 기예의 차원을 넘어 ‘덕(德)’을 갖춘 훌륭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데에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왕실에서 오례의 하나로 행하였던 의례는 ‘정형성’과 ‘반복성’을 통해 획득한 정형화된 행동을 통해 당대 사람들의 의례행위와 그들이 소속되어 있는 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예법적 틀을 이해할 수 있도록 인도한다. 의례란 각 시대마다 일정 맥락을 지니고 제정되었으므로 그 시대의 사회적·역사적 변화를 충실하게 담지하고 있다. 따라서 일종의 ‘지표’와도 같은 특성을 띠게 된다. 이것이 의례를 통해 그 시대의 예가 어떻게 상징화되고 드러나는지 알 수 있는 이유이다. 특정한 의례가 어떠한 상징 체계를 지니며 어떠한 방식으로 양식화되고 형식화되는지 살펴보면 의례의 상징화 과정과 내용이 드러난다.

한편, 조선 후기 경제력의 향상과 함께 예술의 향유층이 두터워져 가는 시기에 음악 연주행위에 대한 보상이 어떠한 형태로 이루어졌는지 살펴보는 것은 음악을 경제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한다. 음악인들에 대한 보상형태에 대해 파악하는 일은 전통시대의 예술인들이 어떠한 물적 토대에서 예술 활동을 펼쳤는지 알아보는 일과 같다. 조선시대에 특별하게 고정된 예술 후원제도는 없었으나 예술인들은 각각 다른 후원 형태에 노출되어 있었고, 그러한 후원 형태를 통해 조선시대 예술 활동을 가능하게 하였던 사회·경제적 토대를 진단해 볼 수 있다. 이는 나아가 조선시대 음악사회의 구조를 진단해 보는 일과 맞닿아 있다.

제2장에서는 음악과 일상 생활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우리 민족에게 음악은 생활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생활이 곧 음악이었다. 아이가 품에 안겨 잠을 잘 때에 엄마는 자장가를 부르며 아이를 재웠다. 농부가 농삿일을 할 때에도, 일을 하다 힘에 겨울 때면 노래로 시름을 달랬고, 여러 사람이 공동 작업을 할 때에도 노동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노래를 불렀다. 흥겨운 놀이를 할 때에도 노래가 곁에 있었으며 잔치가 있을 때 면 반드시 음악과 춤이 함께 하였다. 사람이 죽어 저승길을 갈 때에도 만가(輓歌)가 곁에 있었다. 이처럼 우리 민족의 삶에서 음악은 생활과 분리된 것이 아니었다.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는 우리 민족의 가장 기층적인 노래이다. 특히, 놀이하며 부르는 노래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우리 음악의 심층적 특성을 알려준다. 아기를 위해 부르는 자장가의 노랫말에는 우리 민족의 세계관이 담겨 있으며, 그 선율과 리듬은 아이를 편안한 세계로 이끌었다. 아이를 달래거나 어를 때에도 노래를 불렀다. 아이들은 그 노래를 들으며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느끼게 된다.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면 그들이 역시 자신의 아이들을 위한 노래를 불렀다. 이들이 일터로 나가면 모를 심으며, 밭을 갈며, 고기를 잡으며 노래하였다. 이런 노래들은 지역마다 각각 특성을 달리 하며 일을 위한 노래로 전승되었다.

종교적 성격을 띠는 노래도 있다. 조선의 역대 왕과 왕비를 제사할 때는 종묘제례악을 연주하였다. 공자와 유학자들을 제사하는 문묘제례 때에도 노래와 춤, 악기가 함께 어우러지는 음악을 연주하였다. 불교 의례인 범패를 연행할 때에도 노래를 불렀고, 무용에 해당하는 작법(作法)이 추어졌으며 기악 반주가 어우러졌다. 무당이 굿을 할 때에도 노래와 춤, 반주음악이 수반되어 종교의례는 의례이기도 하였고 신명이 함께 하는 현장이 되기도 하였다. 굿 음악은 그 역사가 긴 만큼 우리나라 전역에 분포되어 각 지역의 특성을 달리하며 전승되었고 여타 전통음악의 모태가 되기도 하였다. 대풍류, 시나위, 판소리, 사물놀이, 살풀이춤, 태평무 등이 굿음악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음악이다. 무당은 사제이자 음악가이자, 연극인, 춤꾼으로 최고의 예술성을 자랑하였다. 이들의 음악을 반주하는 삼현육각도 각 지역별 특성을 지니며 발달하였다.

세시 풍속에서도 음악은 빠질 수 없었다. 설날, 정월 대보름, 오월 단오, 한가위, 동짓날 등 일 년을 펼쳐 놓으면 중요한 시기마다 각종 의식과 함께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정월 대보름이면 액(厄)을 막는 의례가 행 해졌다. 풍물패를 앞세워 집집마다 돌면서 마당밟기를 하며 액운을 막아내기를 하였다. 풍물패는 신명을 다하여 소리로써 액을 막았다. 그런가 하면 사회 풍자를 위한 음악도 있었다. 전국 각지에 산재하는 탈놀이가 그것이다. 탈놀이는 각각의 지역별 특성을 보유하며 발달하였다. 탈놀이를 할 때에는 춤과 음악이 함께 어우러져 때론 잡귀를 쫓았고, 때론 사회를 날카롭게 비판하고 풍자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우리 민족에게 음악은 삶 그 자체였다. 태어나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음악은 늘 우리 곁에 가까이 있었다. 음악과 생활이 밀접한 거리를 유지하며 발달하여 우리 민족의 결집된 힘의 원천으로 작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제3장에서는 조선 사람들의 춤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왕의 춤, 선비의 춤, 백성의 춤, 기녀와 무동의 춤 등, 춤추는 사람의 신분이 다르고 춤의 목적과 지향이 각각 달랐지만 저마다의 방식으로 춤을 연행하였다. 예로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은 흥이 많았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서도 “사흘 밤 사흘 낮을 춤추며 놀았다.”라고 기록하지 않았던가. 그것이 특정 의례를 위한 춤이라 하더라도 그 기저에는 신명의 발산, 흥의 발산이라는 측면에서 연행되는 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성리학적 이념으로 운영된 조선시대 사람들도 흥이 나면 역시 춤을 추었다. 왕의 춤, 선비의 춤, 백성의 춤, 기녀와 무동이 각각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목적으로 춤을 추었다.

역대 왕들 중 춤을 추었다는 기록이 처음으로 보이는 왕은 곧 조선 두 번째 왕 정종이다. 부친 태조에게 헌수(獻壽)하기 위해 춤을 추었고, 공식 연향이 끝난 후 세자와 어울리며 춤을 추기도 하였다. 태종은 역대 임금 중에서 춤추기를 가장 좋아하였다. 세종 역시 부친 태종과 함께 춤추기를 좋아하였다. 효성과 관련이 있는 춤일 것이다. 세조는 세자나 종친, 재신들에게 춤추라고 명하기를 좋아하였다. 성종은 양로연을 베푸는 자리에서 일반 백성인 노인들과 어울려 함께 춤을 추었다. 반면 연산군은 파행적인 춤추기를 좋아하였고, 연산군 이후 왕이 춤추는 일은 기록에서 잘 드러나 지 않는다.

조선의 선비들은 왕 앞에서 신하의 신분으로 춤을 추기도 하였다. 또 어버이 앞에서 어버이를 위해 추기도 하였다. 간혹은 연로한 어버이가 아들을 위해 춤을 추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과거에 합격하여 왕에게 사은(謝恩)하는 자리에서 왕의 권유로 추기도 하였으며 신참이 고참 앞에서 추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춤은 멋스럽고 품위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춤을 추는 행위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았다. 잔치에 참석하여 춤을 추었다는 이유로 비웃음을 당하고 심지어는 관직에 추천을 받을 수 없게 된 경우도 있었다. 춤이란 즐거운 것임에 분명하지만 춤추는 행위에 대해 신중하지 않을 수 없었던 조선 사람들의 고민이 전달되기도 한다.

백성들은 즐거운 일이 있을 때 춤을 추었다. 궁중에서 초대하여 양로연에 참석한 연로한 노인들은 지팡이를 어깨에 메고 춤을 추기도 하였다. 왕이 베풀어준 잔치 자리이고 자신이 수명 장수하여 잔치에 참석할 수 있었으니 지팡이가 더 이상 필요 없었을 터이다. 기녀와 무동들의 춤은 전문가의 춤이라 할 수 있다. 궁중의 정재(呈才)를 담당한 기녀들은 일정 기간 훈련을 거쳐 궁중 정재를 연행하였다. 여성 무용인들이 참석할 수 없는 자리에는 소년 무용수인 무동(舞童)이 나아가 춤을 추었다. 이들은 왕실에서 열리는 온갖 공식 의례에 참석하여 춤을 추었다.

이처럼 조선시대에는 왕과 선비를 비롯한 일반 백성, 기녀와 무동들이 각각 다른 장소에서 다른 목적으로 춤을 추었다. 춤의 목적은 각각 달랐지만 그것의 지향은 곧 화합에 있었다. 화합해야 하는 대상 앞에서 춤을 추는 것을 긍정적으로 바라본 이유가 그것이다. 춤이란 즐거움이 가장 극대화된 표현이다. 이들이 각각 춘 춤의 내용이 무엇인지 그 일부만을 알 수 있지만 우리는 조선시대인들이 춤을 추었던 정황을 통해 춤추는 의미와 그 맥락은 파악할 수 있었다.

제4장에서는 전환기의 삶과 음악에 대해 살펴보았다. 19세기 말과 20 세기 초반, 안팎의 격변하는 사회상에 노출된 우리 민족은 사회, 문화, 정치, 경제 등 총체적인 면에서 전환기의 삶에 놓였다. 전환기적 삶은 우리로 하여금 격변하는 삶의 노정에서 걸어야 할 길이 무엇이었는지 고민하도록 하였고 이러한 상황은 음악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서양 음악의 유입 문제, 일본 근대음악의 수용의 문제, 혼란기 속에서 전통음악의 대응 문제 등은 기존 음악사회와는 다른 새로운 질서를 창출해야 하는 외부적 강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근대적 대중매체의 성장과 함께 레코드 음악이 발달하면서 일본 음반산업의 일부로 편입되어 펼쳐진 대중가요를 비롯한 대중문화가 ‘식민지 근대’라는 공간 안에서 어떻게 펼쳐졌는지 살펴보는 것 또한 전환기적 삶과 음악을 이해하기 위한 주요 축이 된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로 넘어오면서 우리의 음악 향유 양상은 과거와 다른 모습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근대식 극장이 탄생하고 유성기 등의 대중매체를 통해 전통음악은 조선시대와 다른 새로운 공간으로 진입하여 이전과는 다른 향유방식을 지니게 되었다. 개신교를 통해 들어온 서양 음악은 찬송가, 창가의 형태로 유통되었고, 서양식 군대는 군악대를 통해 서양 음악을 연행하였다.

식민지 시기 유성기 음반을 통해 들을 수 있었던 음악과 음악인들의 인기는 요즘의 대중 스타 못지않았다. 1920년대 후반으로 넘어가면서 축음기와 음반은 보다 대중화되어 일상적인 기호품처럼 자리를 잡았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지식인들의 비판이 제기되었던 것은 축음기로 표상되는 문화와 의식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다. 1930년대 유성기 음반이 식민지 근대인의 일그러진 표상으로서의 소위 ‘모던걸, 모던보이’들의 소비문화를 주도하는 매체로 떠올랐던 것이 그러한 의식을 보여준다. 유성기와 유성기를 통해 소비되는 유행가, 댄스, 재즈 등은 가난한 식민지 조선의 전근대적, 봉건적 구태와 식민지 근대가 결합한 착종된 모순이었고, 그 모순적 현실을 잊을 수 있었던 심리적 문화적 도피처로 작용하는 이중적 얼굴을 하고 있었다.

1920년대 중반 이후 30년대 이르는 기간 동안 식민지 조선의 대중가요는 일본의 엔까 양식에 사용된 요나누끼 단음계와 만나 만들어진 <황성옛터>, <타향살이>, <목포의 눈물>과 같은 음악의 히트가 주목된다. 이들 음악의 선율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 노랫말이 지닌 정서는 망국의 슬픔(<황성옛터>), 이향민의 향수, 조국에 대한 그리움(<타향살이>), ‘임’으로 포장된 잃어버린 조국에 대한 향수(<목포의 눈물>)를 담고 있어 조선 정조라는 이미지를 애상적이고 비극적이며 신파적 정서로 고착화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이들 음악의 인기는 오늘날의 트로트로 이어지게 되었다.

1930년대에 만들어진 소위 신속요, 혹은 신민요의 유행은 전래민요의 혼종화(hybridization) 현상으로 설명된다. 서양 음악적인 화성과 악기를 도입하여 새롭게 편곡함으로써 인기있는 음악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들 대부분은 유행가와 민요를 교묘하게 섞은 형태를 띠며 향락적이거나 희망적인 정서를 노래하여 앞서 언급한 유행가의 비극적 정서와 차이를 두고 있다. 또 ‘향토성’과 ‘조선적인 것’을 생각하게 하는 특징도 보인다. 이러한 특성에 대한 당시 대중들의 뜨거운 반응은 어떠한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할까 하는 고민을 우리에게 던진다.

20세기 전후의 우리 삶 속에서 향유된 음악은 여러 얼굴을 하고 있어 그 이해 방식 또한 단선적이지 않다. 따라서 내적, 외적 격변기의 전환기적 삶 속에서 배태된 우리 음악에 대하여는 개인적 취향과 신화화 된 이념을 넘어서는 역사 인식을 가지고 이해되어야 하며 그에 대한 평가는 식민지 근대의 토대 위에 세워진 대중가요의 아이러니와 모순을 직시하지 않으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제5장은 전통음악 공연에 대한 역사적 엿보기로서 전통시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시기 동안 이루어진 ‘공연’에 대해 집중 조명하였다. 전통시대에 ‘공연’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은 무엇이며, 그들은 무엇을 어떻게 보았는지, 또 조선시대의 공연과 일제강점기 이후 현대의 공연은 어떠한 모습이며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졌을까. 그리고 현대 국악 공연의 쟁점과 경향은 무엇일지 살펴보았다.

전통음악의 연행을 가능하게 해 주는 가장 중요한 조건은 ‘신분’과 ‘경제력’이었다. 물론 이 양자가 갖는 무게는 시대적 차이가 있어서 17세기 이전의 전통음악 공연에는 ‘신분’이 가장 중요한 조건이었고, 18세기 이후로는 경제적 요인이 중요한 조건으로 작용하였다. 조선사회 음악공연의 변화는 사회변동 양상과 무관한 것이 아니다. 농촌사회의 변동과 농민층 분화, 상업발달과 상품화폐경제 발달, 신분제 이완 등의 사회현실은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고, 그러한 현실 또한 음악공연과 관련이 있었다.

상업 발달로 인한 자본의 축적, 그로 인한 도시의 발달은 예술의 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였다. 이때 경제력은 예술 수요의 주요 요소로 부상하였다. 신분제 이완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상업 발달은 사회구조의 변화를 야기하였고, 그러한 사회변동은 새로운 경제적 헤게모니의 등장을 가져왔다. 음악의 연행도 경제력에 구속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예술이 정치, 법률, 종교, 철학 등과 함께 사회의 상부구조를 이루지만 그 물적 토대와 조응하면서 규정받게 되었다. 조선 후기 전통음악 공연 변모양상의 특징 중 하나는 음악이 서서히 상품화되면서 교환가치에 의해 재단되는 것으로 변모하는 점에 있는데, 이는 이전 시기와 다른 특성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이러한 상황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왜곡된 길을 걷는다. 일본의 식민지로 편입되는 과정에서 음악 또한 수탈구조 속에 놓이게 되었다. 유성기의 등장으로 빅타, 오케이, 시에론, 폴리도르 등 일본 음악자본이 한국 시장으로 진출하면서 자본주의 상품화와 식민지 지배구조 속에서 음악이 어떻게 생존하는지 그 구조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일본 음반자본의 이윤에 의해 음악이 좌지우지되는 단계가 되었다. 일본 음악자본은 조선이라는 시장을 상대로 상품을 팔아 이윤을 얻었고 그 이윤은 일본자본을 살찌우는 거름이 되었다. 조선의 음악은 원료생산과 상품시장을 통해 초과이윤을 수탈하려는 전형적 식민지 경영구조 속에 놓이게 되었다. 그 논리에 의해 소위 잘 팔리는 음악과 그렇지 않은 음악의 이분화가 발생하였고 이는 음악전승의 왜곡을 초래하였다.

이러한 현실은 20세기 후반으로 들어와서는 시장경제와 상품성의 논리에 의해 작동되는 방식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음악시장에 살아남기 위해 전통음악을 연주하는 사람들은 이 시대 시장이 작동시키는 ‘필터’라는 권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연주자나 작곡가들은 강요된 시장의 논리로 인해 오히려 더 왜곡된 음악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전통음악의 경우 오히려 일제강점기나 20세기 중반 무렵보다 더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는 시장의 논리로만 작동하는 예술계의 현실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 우리 음악의 미래는 이러한 시장의 논리에 대응하는 건강한 ‘길’을 개척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달려 있는 상황에 놓여 있다.

예로부터 음악은 우리 민족의 삶에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때론 삶 그 자체이기도 하였다. 사흘 밤과 사흘 낮을 음악과 함께 할 수 있었던 그 흥과 신명, 그리고 예술성의 원천은 어디에서, 누구로부터 부여받은 것일까. 드러내려 하지 않아도 이내 드러나고 마는 그 천부의 예술성을 우리는 충분히 발휘하며 살았던가. 역사 속에서 우리는 수차례 전란을 겪으며 핍진한 삶에 노출되었고, 식민지의 삶도 살아 냈으며 분단의 아픔을 몸으로 아파하고 있다. 그러한 과정에서 우리의 신명과 흥과 예술성은 잠시 사라진 듯하였지만 지금 이 시기, 우리의 흥과 신명은 다시 되살아나고 있다. 문화의 도도한 흐름은 우리들 내부에서 움찔거리는, 분출하려 하는 잠재된 예술성의 노출을 허락하였다. 음악과 춤, 영화, 연극, 드라마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예술의 전 분야는 이제 용틀임을 하고 있다.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그러한 원천이 무엇이었는지, 문화사적 시각 으로 우리의 음악을 두껍게 읽어 본다면 일부 해답이 제시될 것으로 기대한다.

2011년 6월

저자들의 마음을 모아 송지원 쓰다

[필자] 송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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