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3 조선시대 사람들의 춤04. 기녀와 무동의 춤

기녀의 선발

인조반정 이후 장악원에 상주하던 경기가 혁파되자, 궁중 잔치에서 정재를 맡은 기녀는 선상기로 충원되거나, 의녀나 침선비 등의 경기로 충원되었다. 영조 20년(1744)의 진연은 선상기로만 기녀를 선발하였고, 정조 19(1795)의 진찬은 화성 향기와 경기를 선발하였다. 이후 순조 29년(1829)의 진찬과 헌종 14년(1848)의 진찬 및 고 종 14년(1877)과 고종 24년(1887)의 진찬에서는 선상기와 향기가 함께 정재를 담당하였다. 시기별로 선상기 수는 달랐으며, 고종 대에는 선상기 비율이 적었다.

선상기가 궁궐로 올라오는 과정을 보자. 먼저 중앙에서 각 지역의 감영에 여령 숫자를 배정하여 공문을 보낸다. 감영은 다시 해당 읍으로 공문을 보내고, 각 읍에서 수향리(首鄕吏)의 책임 아래 여령을 선발하면, 여령의 명단을 우선 궁궐로 올려 보낸다. 각 읍에서 선발된 여령은 다시 감영에 모여, 적절성을 검토 받은 뒤에 담당자와 함께 말이나 배를 타고 궁궐에 올라간다. 선상기의 나이는 대체로 20∼30대였으며, 평안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가장 많은 여령이 선발되었다. 평안도는 중국으로 오가는 사신, 경상도는 일본으로 오가는 사절단 접대를 위해 평소에 많은 관기가 상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처용무는 경상도의 경주와 안동, 연화대의 동기와 항장무(項莊舞)는 평안도 지역에서 주로 선발되었다.

정재여령의 선발 과정을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여령 선발 과정의 어려움은 헌종 무신년 『진찬의궤』에 잘 드러난다.180) 이 책은 1848년 순조비 순원왕후(1808∼1890) 김씨의 육순을 축하하기 위해 베푼 진찬의 절차를 기록한 책이다. 그것에 의하면, 공연이 시작되기 약 4개월 전부터 정재 여령의 선발 기준을 세워 각 도에 공문을 내렸다.

<1847년 11월 21일「(移文)」>

상고할 일: 이번 진찬 때, 각 차비여령을 적은 수의 경기로 배정하기 어려우므로, 전례대로 후록하여 공문을 보내니, 각 해당 읍에 거듭 분명히 알려, 반드시 오는 12월 초5일까지 책자를 만들고 색리(色吏)를 정해 인솔하여 올라오게 하라. 만약 늙고 병들어 가무를 잘하지 못하는 자인 데도 구차히 숫자만 채우는 폐단이 있으면, 해당 수령은 무겁게 추궁됨을 면치 못할 것이니, 예사롭게 보지 말고 유념하여 거행하도록 일체 알려 시행함이 마땅하다.【경상도 26명 중 6명은 처용무를 잘 추는 자로, 경주와 안동에 나누어 정함. 평안도 30명. 강원도 8명. 충청도 6명. 황해도 10명. 전라도 20명】

<헌종 무신『진찬의궤』>   
1848년(헌종 14) 헌조비 순원왕후의 육순을 경축하여 열린 진찬의 전모가 기록되었다.

각 도의 관찰사는 속속 중앙으로 회답을 올려보냈다. 황해도 관찰사는 12월 초9일에 배정된 10명의 여령 명단을 올렸고, 여령들도 서둘러 보내도록 조치하였다. 평안도 관찰사는 12월 19일에 차비여령 30명을 전례대로 평양·안주·성천·선천·영변 등 읍에 지정하였고, 명단을 올렸다. 또한, 평양 동기인 녹주와 기주, 성천 동기인 금홍과 연옥도 올려보냈으며, 이전에 지정한 여령 30명을 초7일에 이미 보냈다고 하였다. 평안도 관찰사는 가장 많은 여령을 배정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빨리 여령을 올려보냈다. 전라도 관찰사는 12월 21일에 나이가 적고 가무를 잘하는 여령 20명을 올려보내도록 해당 읍에 신칙하였고, 명단을 올려보냈다. 경상도 관찰사는 12월 23일에 차비여령 26명을 가려 뽑아 영군관을 정해 밤낮 없이 인솔하여 올라가게 하고, 명단을 올려보냈다. 충청도 관찰사는 해를 넘겨 헌종 14년(1848) 1월 2일에 여령 6명을 감영의 원기(元妓) 중에 택해, 이름과 나이를 적은 명단을 색리를 정해 올려보냈다.

각 도에서 올라온 정재여령이 퇴짜를 맞아, 다시 뽑아 보내라는 경우도 있었다. 바로 충청감영 소속의 청주와 영춘 두 읍에서 보낸 여령의 경우가 그러하였다. 중앙에서는 “청주와 영춘에서 올라온 자를 보니 모양이 추할 뿐이 아니다. 이는 바로 불 때고 물 긷는 비자(婢子)로 구차히 숫자만 채워 올린 것이니, 연습시킬 것을 생각하면 만만번 놀랄 일이다.”라고 하며 다시 예쁘고 가무를 잘하는 자로 올려보내도록 공문을 보냈다.

강원도에서 정재여령을 뽑아 올리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 강원도 관찰사는 도내의 기생 중 나이가 적고 총명한 자로는 원주가 최고인 데도 현재 명단에 빠져 있다고 하며 원주 기생을 다시 택해 올리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원주 판관에게 실상을 들어보니, 원주 기생은 본래 7∼8명 정도였는데 가을에 3명은 혜민서 의녀로 뽑혀 올라갔고, 몇몇은 늙고 병들어서, 나이가 적은 자는 금선(錦仙)과 윤희(允姬) 뿐이니 이들을 속히 올려보낸다고 하였다.

강원도 강릉에서 올라온 두 명의 기녀도 퇴짜를 맞아 다시 올려보내도록 하였다. 중앙에서는 “강릉의 비자인 매월(梅月)과 순옥(順玉)이 지금 비록 도착하였으나, 순옥이란 자는 원래 정한 비자를 대신하여 올라왔음을 이미 관아의 뜰에서 죄를 실토하였다. 그는 모습이 매우 추하고 가무도 전혀 못한다.”라며 원래 정한 기생 순옥을 부리나케 보내라고 하였다. 또한, 기생을 바꿔 보낸 수향리를 엄히 문책하겠다고 하였다. 강원도 관찰사는 답신을 보내며, 원래 순옥을 제대로 보냈는데, 가는 도중에 말에서 떨어져 크게 부상을 당하였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다른 자로 대신하였다는 것이다. 작년에 혜민서에서 나이 어린 비자 20여 구를 이미 뽑아갔기 때문에 잘 선발하려고 해도 사정이 좋지 않았다는 형편을 알렸다.

결국, 선상기 선발의 어려움으로 애초에 100명의 정재여령을 선발하려고 기획하였으나, 정재여령의 복식 마련 수를 참고하면, 66명을 선발하는 데 그쳤다고 추정된다. 처음 계획된 인원에 비하면 1/3 감소된 숫자이지만, 1829년의 진찬과 비슷한 규모이며, 그 이전의 영조 대에 52명의 여령이 출연한 1744년의 진연과 정조 대에 31명의 여령이 출연한 1795년의 진찬에 비하면 훨씬 규모가 컸다.

[필자] 조경아
180) 헌종 무신년 『진찬의궤』 권1. 48a8-48b1, 1847년 11월 21일 「이문」, 한국예술학과 음악사료강독회, 『국역 헌종 무신진찬의궤』 권1, pp.221∼249.
창닫기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