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가
1920년대 중반까지 전통음악을 중심으로 약간의 찬송가와 예술가곡, 서양 음악이 녹음되어 왔으나 한국 대중가요 음반시장의 가능성을 확인시켜 주는데 촉매제 역할을 한 곡은 1926년 일동축음기회사의 윤심덕이 부른 <사(死)의 찬미>였다. 당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인텔리 신여성이었던 윤심덕은 조선총독부의 관비생으로 일본에 유학하여 일본의 관립음악학교에서 공부하면서 대표적인 신극 단체인 토월회 배우로 활동한 바 있던 소프라노 전공자였다. 또한, 이 곡은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토월회의 중심적인 멤버였던 극작가이자 애인이었던 김우진과 함께 현해탄에 투신하기 직전에 취입한 곡이었기에 가수의 성격과 노래의 정황이 결합하여 대중적인 센세이션을 일으킬 수 있었다.
이 당시 대중들의 폭발적 반응은 단지 노래에 대한 관심이었다기 보다는 인테리 남녀의 자유연애와 비극적 정사(情死)라는 줄거리로 인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대중문화의 소비 기제의 하나인 명사들의 ‘스캔들’에 의해 우연히 촉발된 것이라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그러므로 <사의 찬미>를 흔히 한국대중가요사의 시작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이는 다시 재고해야 한다. 이 곡의 대중적 성공에는 음악외적인 우연적 사건의 개입이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이보다 대중가요사에서 좀더 의미있게 조명되어야 할 것은 일본 창가를 번안한 유행창가에서 한국인 스스로 창작한 유행가의 성공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일 것이다.
192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 창가는 교육창가 및 계몽창가 외에 유행창가로 분화되어 전개되는데, 대중가요의 전신은 바로 이 유행창가라 할 수 있다. 초기 유행창가는 1925년 도월색과 김산월이 유성기음반으로 취입한 <이풍진 세월>(청년경계가), <압록강절>, <시드른 방초>, <장한몽가>를 들 수 있는데 이 노래들은 모두 당시 일본 유행창가를 번안한 것이었다. 1920년대 후반에 들어서게 되면 유행창가라는 이름으로 이제 우리나라 사람이 지은 김서정 작사, 작곡의 <낙화유수>(강남달), 이규송 작사, 강윤석 작곡, 강석연 노래의 <방랑가> 등이 나오게 된다.
본격적으로 식민지 조선의 대중가요 시장을 활성화시킨 작품은 1932년에 발매된 <황성옛터>이다. 이 노래는 식민지 조선의 대중가요 시장을 활성화시킨, 한국대중가요의 첫 창작가요라는 역사적 중요성을 갖는다. 이 곡은 번안가요가 아닌 순수 우리 창작곡으로 당시 5만장이라고 하는 대대적인 판매 기록을 올린 노래로 한국 대중가요의 가능성을 본격적으로 타진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인들에게는 ‘조선의 세레나데’로 불렸고 이 노래를 취입한 이애리수가 ‘민족의 연인’으로 불렸던 것을 보면 당시 이 곡이 얼마나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는지를 실감할 수 있다.
이 곡은 특히 양식적으로 한국 대중가요사의 미래를 예견하는데 의미가 있는 곡이다. 일본의 엔까 양식에 사용된 요나누끼 단음계 의한 한국 유행가 양식이 정립된 최고(最古)의 히트곡이이라는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황성옛터>를 취입하는 데 큰 역할을 한 빅타 레코드의 문예부장 이기세의 증언은 우리에게 몇 가지 시사점을 던져준다.
지금으로부터 8년전 봄, 처음으로 조선 유행가를 여러장 일본 내지인의 감독으로 취입하였습니다. 그러나 실패를 보게 된 빅타 축음기 회사에서는 그 실패의 원인이 오로지 조선말을 모르는 일본 내지인이 취입 감독하였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하고 조선은 아직 문화 정도가 저급하여 조선말은 레코드 취입에 적당하지 못하다는 그릇된 속단으로 조선 유행가는 다시 취입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일본 빅타 축음기 회사 사장 과 여러번 상의한 결과 그 후 3년이 지난 소화 6년(1931) 이른 봄에야 다시 조선 유행가를 취입하여 보기로 한 것입니다. “이번에 또 실패하면 조선 유행가는 영영 실패이다. 어찌하든지 이번에는 훌륭한 가수를 발견하여 일반 대중의 열광적 격찬을 받을 걸작을 내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깊이 마음 먹은 나는 좋은 가수를 찾기에 고심을 다하였으나 그렇다할 만한 가수는 좀처럼 나오지 않았습니다. … 빅타의 마이크로폰을 통해 이애리수의 그 비단결 같이 아름다운 멜로디가 삼천리 거리거리에 흩어지자 조선 레코드 팬들의 열광적 격찬은 실로 눈물겨웠던 것입니다. 그 판매 매수의 놀라운 숫자는 빅타회사에서 조선 레코드 취입을 놀랍게 격중하게 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콜럼비아, 폴리돌 등의 여러 회사에서 조선 유행가 취입을 하게 한 것입니다. 이로써 나니와부시(浪花節)와 오륙고부시(鴨綠江節)와 같은 종류의 레코드 소리만 들리던 삼천리 방방곡곡에는 조선 정서를 자아내는 조선 유행가의 노랫소리가 많아져 가니 각 레코드 회사의 가수 쟁탈전은 날로 격심해지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이기세, 「명가수를 엇더케 발견하였든가」, 『삼천리』1936년 11월호).
이 기사는 첫째 1928년, 즉 20년대 후반에 조선유행가를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는 점과 둘째, 일본에서는 조선의 문화 및 시장 형성이 저급하여 조선 유행가가 가능하지 않게 생각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그 실패 원인을 다르게 찾고 있는데 조선인의 정서와 언어를 모르는 일본인이 조선 가요를 감독한 것에서 원인을 찾고 있다. 또한, 조선 유행가를 성공시키기 위해 제일 고심하였던 부분은 조선 정조를 담아낼 수 있는 조선인의 기획과 가수의 발견이었다. 그리하여 1930년대 초 이애리수의 <황성옛터>의 성공을 계기로 레코드 회사에서는 일본 유행가 대신 조선 유행가를 자체 제작하고 이를 소화할 가수 쟁탈전이 벌어져서 본격적인 조선 음반 산업이 경쟁 구도에 들어서게 되었다는 점을 알려준다.
<황성옛터>는 개성에서 공연을 마친 왕평과 전수린이 고려의 영화를 되새기며 만월대의 옛터를 찾은 뒤 여인숙에서 전수린이 그 느낌을 바이올린으로 즉흥적으로 연주하고 그 위에 왕평이 가사를 붙임으로써 만들어졌다고 한다. 또한, 망국의 슬픔이 은유된 노래로 해석되어 이애리수가 단성사에서 연극공연의 막간에 부르자 모두 울음바다가 되고 대 유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음반은 날개 돋힌듯 팔려나갔지만 일본 당국에 의해 금지곡 처분을 받게 된다.
<황성옛터>의 성공 이후 식민지 민중의 설움을 대변하는 눈물코드로서 요나누끼 단음계를 사용하여 우리 민중의 고향과 나라를 상실한 슬픔을 잘 대변해 주는 비슷한 곡들이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해방 이후에도 트로트의 고전으로 생명력을 유지하며 한 세대를 넘어 사랑을 받게 되는 노래는 <타향살이>, <목포의 눈물> 등이라 하겠다.
<타향살이>(김능인 작사, 손목인 작곡, 고복수 노래)는 정든 고향 산천을 떠나온 이향민의 억제할 수 없는 향수와 조국에 대한 그리움이 반영된 곡이다. 이러한 슬픈 노래들은 식민지 백성의 설움과 눈물을 담아냄으로써 당시 엄청난 인기를 모으게 되었고 음반회사들은 이러한 노래들을 ‘유행가’라는 곡종명을 붙여서 음반을 판매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조선 대중가요 시장에서는 고가마사오의 <슬픈 눈물인가, 한숨이런가>, <슬퍼진 청춘> 등이 번안되어 조선 유행가를 만드는 대열에 합류하게 되어 슬픈 노래의 전성시대를 열게 된다. 이러한 곡들은 해방 이후 트로트로 불리워 한국 대중가요사에서 중요한 장르로 자리를 잡는다.
<목포의 눈물>(손목인 작곡, 이난영 노래)은 오케(Okeh) 레코드 회사가 조선일보 후원으로 전국 6대 도시 ‘향토찬가’로 모집하였을 때 당선된 노래로서 곡종명이 지방 신민요로 분류되었던 곡이다. 당시 5만장이 바로 팔리면서 이난영을 엘레지의 여왕으로 만드는데 결 정적인 역할을 하였던 노래이다. <목포의 눈물>은 임을 잃은 여인의 애달픈 정조를 그리는 노래로 가사 2절이 원래는 ‘3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이었다가 경찰 당국의 검열로 “3백연원안풍(三柏淵願安風)”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노적봉은 목포 유달산에 있는 봉우리로서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군량미를 쌓아 둔 것처럼 가장한 위장전술을 펴서 왜적과 싸우지 않고 이겼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다. 여기서 3백년이란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후 기간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 노래는 반일 감정을 은유한 것으로 비칠 수 있었다. 그런 까닭에 이 노래의 ‘임’은 단지 연인이 아닌 잃어버린 조국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는 곡이었다.
이러한 노래들은 당시 유행가라는 곡종명으로 발매되었기 때문에 유행가는 요즘 사용되는 대중가요의 대체어가 아닌 특정 양식의 장르명으로 주로 사용되었다. 또한, 유행가로 불린 대부분의 노래는 <황성옛터>, <타향살이>, <목포의 눈물>처럼 애상적 분위기의 단조 트로트에 해당하였다. 조선 정조라는 이미지를 애상적이고 비극적이며 신파적인 정서로 고착화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던 장르가 바로 당시의 유행가, 즉 오늘날의 트로트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