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5 전통음악 공연에 대한 역사적 엿보기

01. 전통음악 공연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

공연이라는 것은 오늘날의 개념이다. 하지만 역사적 기록들을 통해 20세기 이전에도 오늘날의 공연개념에 해당하는 활동은 존재하였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오늘날의 공연에 비해 시스템이 달랐을 뿐이었다. 전통음악의 공연들에 대한 과거와 현재를 조망함으로써 우리는 오늘날 더 진실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시대나 음악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자기 자신을 위한 음악’이고, 다른 하나는 ‘남을 위한 음악’이다. ‘자기 자신을 위한 음악’은 자신의 필요에 의해 연행하는 음악이고, 이는 공연이라는 형태를 보일 필요는 없다. 민요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삶의 현장에서 자신의 일과 함께 연행되었고, 때로는 일의 기능에 따라서, 때로는 신세한탄을 위해서 다양한 형태로 노래되었던 음악이다. 벼슬에서 물러난 양반이 자신의 방안에서 타던 아마츄어 악기연주 역시 자기 자신을 위한 음악의 경우에 해당한다. 이런 경우는 연주자와 감상자가 구분되지 않는다.

반면 ‘남을 위한 음악’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제공하는 음악이다. 연주자와 감상자는 구분되며, 이 경우 연주자는 오랫동안 음악을 훈련한 전문가이고, 감상자는 그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춘 인물이다. 이런 음악의 연행은 공연이라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전통음악에 있어서 ‘공연’이라고 이야기하려면 전문음악가와 감상자라는 두 축의 설정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이전 전문음악가와 감상자는 어떠한 부류의 사람들이었으며, 오늘날 전문음악가와 감상자는 어떠한 부류의 사람들인가? 이 점이 전통음악과 관련된 공연 행위를 이해하는 핵심적인 키워드가 될 것이다.

조선시대 이전의 전문음악가는 크게 세 부류였다. 하나는 국가기관에서 공식적인 음악연주를 담당하는 악공(樂工)이고, 다른 하나는 어릴 때부터 가·무·악을 집중적으로 학습 받은 기녀들이며, 나머지 하나는 민초들의 희로애락을 함께 하던 무속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악공들은 주로 궁궐에서 연주행위를 담당하였지만, 그들의 모든 연주행위가 궁궐 안에서 이루어진 것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의 연주행위가 활발한 곳은 서울의 시정(市井)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악공과 기녀는 지배계급을 위한 음악연행에 충실하였던 전문가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무속 집단은 거의 피지배계급의 이해에 충실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무당이라고 흔히 일컬어지는 성직자와 그를 둘러싼 반주 악사들로 구성되며, 종교적 의례를 담당하면서도 과거 민초들에게 가장 쉽고 흔하게 전문적인 가무악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왔다.

그런데, 이 중에서도 이른바 굿의례의 경우는 종교의식와 관련되기 때문에 순수한 가무악(歌舞樂) 공연의 요소만을 갖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악공과 기녀를 중심으로 한 전문음악가들이 연행하던 음악들이 ‘공연’이라고 하는 행위에 부합하는 것이었고, 그렇다면 과 거 전통음악의 공연 행위는 결국 지배계급을 위한 음악연행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피지배계급과 함께 하던 민요나 무가는 그 성격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두 순수한 공연의 모습과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말은 이른바 ‘공연’을 감상하는 사람들이 주로 지배계급이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조선시대 이전 전통음악 공연에 있어서 공연을 제공하는 담당층인 전문음악가는 악공이나 기녀처럼 신분적으로 하층에 해당하는 사람들이었고, 공연을 감상하는 수용층은 지배계급에 해당하는 사람들이라고 대략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반면, 오늘날 국악 공연의 담당층과 수용층은 당연하게도 조선시대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시장’이 지배하는 시대이고, 음악가들의 대다수가 고등교육을 받은 이들이기 때문이다. 전통음악 공연을 담당하는 전문음악가들은 대부분 대학교육을 받은 이들이고, 그들 중 상당수는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 과정까지 12년 이상을 학습한 엘리트 음악가들이다. 따라서 그들의 학력은 그들의 음악을 감상하는 수용층보다 낮지 않다. 하지만 그들의 음악은 수용자들에게 곧바로 전달되지 않는다. 과거에는 음악 담당자들의 연주행위가 수용자들에게 곧바로 수용되었지만, 오늘날에는 그 사이에 ‘시장’이라는 필터가 존재한다.

음악을 소비하고 수용하는 이들과 음악을 생산하는 이들 사이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손’은 전체 공연예술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음악가들은 수용자의 가면을 쓴 시장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몸부림쳐야 하고, 시장에서 살아남지 못하면 곧 도태된다. 시장은 수용자들의 경향과 취향을 대변하는 것 같지만 때로는 그것을 조작함으로써 전체 공연 예술의 판을 왜곡시키기도 한다. 그렇다보니 그 속에서 보다 효과적으로 생존하기 위해서 음악은 산업화의 길을 가게 되고, 갈수록 전통음악을 둘러싼 상품화의 경향이 가속화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전통음악 공연에 있어서 담당층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급화된 인력들로 채워졌지만, 수용층은 시장이라는 필터 뒤에 감추어져 있으며, 그로 인해 담당층의 생존은 시장이 요구하는 이미지 관리나 홍보와 같은 음악외적인 여러 요소들에 의해 간섭받고 있다.

그렇다면 전통음악의 공연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요건들은 무엇이 있을까? 이 문제는 조선시대와 현대를 연결하고 구분하는 중요한 관건이다. 조선시대 이전에는 당시의 대부분 예술들이 그렇듯이, 전통음악의 연행을 가능하게 해주는 가장 중요한 조건은 ‘신분’과 ‘경제력’이다. 하지만 이 양자가 갖는 무게는 시대적 차이를 갖는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전통음악 공연에 있어서 17세기 이전에는 신분이 가장 중요한 조건이었지만, 대동법이 실시되고 나서 18세기 이후가 되면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과 함께 경제적 요인의 중요성이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17∼18세기 조선사회 음악공연의 변화를 가져온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던 당시의 몇 가지 사회변동 양상이 있다. 그것은 농촌사회 변동과 농민층 분화, 상업발달과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 신분제 이완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현상은 독립적이지 않고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조선 후기 농촌은 농업생산력의 발전과 토지 소유 구조의 변화, 그리고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에 따라 내적 변동을 겪고 있었다. 토지를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이들 사이의 격차가 커지고, 토지 소유 역시 대토지를 소유하는 이들이 생기면서 소수에게 부가 집중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다수의 토지 없는 농민들이 소작농으로 전락하였고, 다수의 농민들이 농토를 떠나 도시로 유입되어 새로운 상공업 발달의 조건하에서 임노동자층을 형성하였다. 서울 외곽 상업지구를 중심으로 잡가(雜歌)와 같은 새로운 장르가 태동하고 각지의 상업 중 심지를 중심으로 예인집단의 활동이나 가면극 연행이 활발해 지는 현상은 이와 관련이 있다.

<함흥 시장>   

한편, 대동법 실시 이후 조선 사회에서 가장 두드러진 모습 중 하나가 상업발달이다. 상인층의 성장과 도고상업의 전개에 따라 독점적 상업이 발달하고 상업자본이 축적되었다. 이는 교통통신과 장시의 발달이 기반이 된 것이었다. 특히, 서울은 행정 중심지로서의 모습뿐만 아니라, 17∼18세기 이후 가장 큰 소비시장이면서 동시에 전국 시장권의 중심 도시로 변모하였다. 아울러 개성, 평양, 전주, 대구, 함흥 등지도 상품유통의 중심지로 성장하면서 도시의 발달을 이루었다. 상업자본이 성장하면서 경강상인들의 경우는 전국적인 유통망을 움직일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갖게 되었으며, 특히 권력층과의 유착관계가 상업자본 성장의 중요한 요소였기 때문에, 상업발달이 주류 지배계급의 물적 토대가 되기도 하였다. 이런 상업발달은 그에 따른 새로운 예술장르를 낳을 수밖에 없었으며, 예능의 상품화를 조금씩이나마 가능하게 하였다. 또한, 기존의 신분제적 기준에 의한 예능 연행구조를 서서히 변모시켰으며, 이로 인해 경제력이 예능 수요의 중요한 요소로 점점 떠오르고 있었다.

상업발달은 신분제 이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전통적인 신분제의 내적분화가 일어나면서 양반층과 농민층, 중간층이 각각 내부적으로 사회적 위치에서의 차이가 발생하였다. 이는 주로 빈부 차이 혹은 경제력 차이에 의한 것으로, 기득권층 양반과 몰락양반, 그리고 부농과 빈농의 분리가 일어나고, 중간층의 급속한 경제적 성장이 두드러졌다. 기존 양반층과 신흥 요호(饒戶) 부민층 사이의 갈등이 생기기도 하였고, 신흥 부민층이 수령권과 결탁하면서 점차 공적인 부 세행정에 참여하면서 영향력을 키워갔다.

18세기 중반 이후 기존 신분질서가 동요하고 신구 세력간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기존 사족지배구조가 동요되면서, 양반이라고 해서 모두 특권적 지위를 가질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새로운 부민층은 기존 신분질서의 양반층 못지 않은 지위와 사회적 영향력을 보유하게 되었고, 새로운 예능의 주된 수용층으로 등장하였다. 여기에 부세제도 왜곡에 따른 중하층민 동요와 기득권 세력의 부패 등의 요인도 신분질서의 저변을 위협하고 있었는데, 다만 기존 신분제가 동요하였다고 해서 곧바로 해체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신분제적 기준의 양반층의 배타적 지배는 불가능해졌으며, 임노동의 출현으로 인해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성격도 신분적 지배·종속의 구조로부터 경제적 고용·노동의 모습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조선 후기 농촌의 분화와 도시의 발달, 임노동발생,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양반층·농민층의 분화 및 신분제 이완 등 제반 사회변동은 결과적으로 새로운 경제적 헤게모니의 등장을 가져왔고, 음악의 연행 역시 절대적인 신분적 예속에서 벗어나서, 서서히 경제력에 구속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농촌 사회 분화와 상공업 발달은 도시화를 낳았고, 도시발달은 도시민들의 경제력과 관련된 예술연행을 촉진시켰으며, 이것이 조선 후기 가장 대표적인 음악들인 가곡, 판소리, 잡가, 기타 예인 집단 음악의 경제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이들의 발달은 음악내적인 것의 요인, 즉 천재적인 음악가의 탄생이나 가객·광대들의 각성 등과 같은 요인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일차적으로는 사회변동에 의한 새로운 경제적 기반이 바탕이 된 것이었다. 기존 신분제의 규정력이 약화되면서 사회질서의 변화가 일어나게 되고, 예술분야도 단순한 신분적 주종관계에 의한 연행이 아니라 경제적 소유여부에 기초한 연행이 두드러졌다. 주요 음악적 예능담당층도 신분적 기준의 악공이 아니라 상공인(잡가), 중서민(가곡) 등으로 다양해졌다.

<유랑 예인>   

예술은 정치, 법률, 종교, 철학 등과 함께 사회의 상부구조를 이루며, 이는 그 물적 ‘토대’와 조응하면서 규정받는다. 이 때 ‘토대’는 생산관계들의 총체로 이루어진 사회의 경제적 구조이면서 상부구조를 규정짓는다. 조선 후기의 음악을 이해하는 중요한 지점은 바로 이 ‘토대’의 변모에 있다. 예술이 신분적 예속 외에 경제적 요소에 의해 규정받기 시작하였으며, 그 수요조건이 경제적 요인에 의해 커다란 영향을 받게 되었다. 민요나 궁중음악과 같이 전적으로 고유한 한정된 계층을 가질 수밖에 없는 장르들 외에 대부분의 예술 음악 장르들의 속성이 신분적 예속에서 경제적 종속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물론 완전한 경제적 관계로 변모한 것은 아니며 여전히 신분제적 구속은 남아 있었고, 다만 경제적 요인이 신분제적 요인 못지않게 중요한 요인으로 부각되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이런 변모는 곧 음악에 있어서의 ‘가치’ 변화로 연결된다. 가치는 어떤 것의 본질적인 쓰임의 측면을 말하는 것이다. 사용가치는 어떤 물건이 가지는 그 자체의 물리적, 화학적, 생물학적 특성에서 비롯된 효용성을 말하는 반면, 교환가치라는 말은 상품으로서의 음악을 조건으로 한다. 즉, 하나의 물건이 이 본래적 효용성에 의해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돈이나 특정 물건에 상당하는 것으로서 평가된다. 만일 ‘생수 한 병=콜라 두 잔=500원’이라고 한다면, 생수 한 병의 가치는 그것이 가지는 생산비용과 노동력 및 목마른 자에 대한 효용성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콜라 두 잔이나 500원짜리 동전 하나와의 교환과정을 통해서 표현되며, 이는 그 물건이 상품일 것을 조건으로 한다. 그리고 그 물건은 본래적 가치를 벗어나 상품으로서만 평가되고, 그 물건을 처음에 만든데 들었던 고유의 가 치, 즉 노동력을 포함한 생산력과 관련된 제반 조건 및 노동자 자신은 그 상대적 가치의 평가에서 소외된다.

조선 후기 전통음악 공연 변모양상의 한 특징은, 음악이 서서히 상품화되면서 사용가치가 아닌 교환가치에 의해 재단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조선 후기 이전에도 음악이 지니는 가치형태는 전적으로 본질적인 사용가치가 아니었다. 본질적인 사용가치의 구현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모습은 교환가치적 속성이 두드러진다는 점에서 이전과는 다르다. 물론 조선 후기 당시가 본질적으로 신분제 사회였기 때문에 신분에 의한 기본적 규정력은 저변에 깔려있지만, 신분제 자체의 이완이 강화되면서 갈수록 경제적 특질이 서서히 그것을 대체해 갔다.

예컨대 조선 후기 판소리, 잡가, 가곡, 기타 사당패를 비롯한 예인집단의 음악은 신분적 예속의 기능이 크게 약화되고 대신 예능의 ‘양과 질’ 및 ‘교환가능성’의 합체(合體)로서 가치의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이 때 예능의 ‘질’은 사용 가치적인 본질이 아니라 수용자의 효용성과 기대치 충족도에 해당한다. ‘교환’은 주로 예능에 대한 금전적 보상이나 예능 담당층에 대한 경제적 후원의 형태이다. 이 과정에서 예능의 수용자는 수용자이면서 동시에 소비자의 모습을 갖추게 되고, 그는 타인의 활동이나 사회적 관계에 대한 권력을 가진다. 그의 권력은 그가 재화의 보유자라는 점에서 나오며, 예능인의 능력은 상품의 능력과 효용성으로 치환된다.

<『조선풍속도』 사당 무동, 김준근>   

교환가치로서의 음악은 소비를 위한 사물로서 기능한다. 가곡이나 잡가를 연행하던 전문적·직업적 예인의 등장은 곧 음악의 상품성과 교환성을 의미한다. 음악의 연행이 과거 악공들의 신분적 예속 위에 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전문적이고 직업적인 음악 담당층이 등장하였다는 것은 곧 음악가의 직업화를 의미하는 것이며, 이는 음악의 연행이 자신의 노동으로 임금을 받는 형태로 서서히 전환되어간다는 것을 말해 준다. 즉,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구조 하에서 음악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예컨대 19세기 들어서 가곡이 권력가와 재력가의 통속적 수요에 종사하게 되는 것, 잡가와 가사가 시정의 유흥 공간에서 통속성과 오락성을 담아내는 모습으로 정착하게 된 것, 판소리 수용층이 양반층까지 확대되면서 전문소리꾼으로서 광대의 생존 기반이 보다 공고하게 된 것 등은 결국 음악의 연행이 신분적 예속에 기반한 예능적 봉사나 동호인적 애호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경제적 가치 창출의 수단이 될 때에 가능한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처럼 본격적인 형태는 아니지만, 음악이 상품으로서의 교환가치적 평가대상이 되는 양상은 조선 후기(특히 19세기)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와 같은 음악의 교환가치적 변모는 몇 가지 보다 세부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첫째, 소비의 필요성에 의한 음악의 전문화와 양식화 경향인데, 소비는 그것을 취하려는 이들의 감성과 경제력에 좌우된다. 이는 음악을 보다 전문화시키고 예술적 숙련도를 높여야만 가능해진다. 예를 들어 가곡이 19세기 들어 지극히 전문적인 예술음악으로 변모하게 된 것 역시 이런 측면에 해당한다. 이는 다시 전문적, 직업적 음악의 생존 가능성을 높여주는 결과로 이어진다. 이것은 음악을 양식적으로 다듬어진 모습으로 향하게 만들었다.

둘째, 권력과 물질에의 종속화 경향인데, 음악이 이전시대의 지배층 음악에서와 같이 의식이나 철학이 강조되기보다는 오락성과 유희적 성격이 강화된 것이다. 오락성과 유희성은 필연적으로 그것을 소비하는 사람들의 취향을 고려해야 가능해지기 때문에, 소위 음악적 소비자들이 가지는 권력과 경제력에 음악이 종속되는 경향 이 심화되게 된다. 음악이 권력에 종속된 것은 과거 봉건시대에 일반적인 모습이지만, 이 시기에 이르면 권력뿐만 아니라 경제력이 중요하게 작용을 하게 되고, 특히 권력과 경제력의 동시적 결합이 음악의 연행과 성격형성에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셋째, 새로운 소비형태의 구축인데, 계급에 기반한 음악 ‘봉사’가 아닌 경제적 생산 관계에 의한 음악적 ‘소비’의 개념에 근접하게 되는 것이다. 음악의 향유가 특정 계급이나 특정 인물과 같은 신분적 제한에 구속을 받지 않으며, 도시의 시정이라는 다소 불특정한 공간에서의 익명의 소비자들이 탄생한 것이다. 이는 음악의 소비가 신분관계만이 아니라 생산관계에 의한 소비구조를 갖게 된 것을 의미한다.

넷째, 음악의 전국적 유통이 가능해졌다는 것인데, 이는 음악 담당층이 이전처럼 철저하게 관에 매인 신분이 아닌 사적인 신분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물론 교통과 통신의 발달이 보다 근본적인 조건이었음은 당연하다. 음악 담당층이 악공이라는 공적인 신분집단인 상황에서는 음악이 전국적으로 유통되는데 한계가 있지만, 19세기 가곡 담당층이나 잡가의 담당층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자연스럽게 전국적인 음악 유통이 가능해졌다.

다섯째, 상업적 목적에 의한 새로운 기층 음악 장르 탄생을 이야기할 수 있다. 전통적인 기층 음악인 민요나 무가와 달리 19세기의 다양한 기층 음악 장르들은 다분히 상품으로서의 존재를 그 생존방식으로 하는 것들이 상당 수 있었다. 선소리산타령, 걸립패 등의 유랑 예인 집단의 음악, 산대놀이와 관련된 음악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장르는 기층 음악이면서도 상품으로서 팔릴 것을 염두에 둔, 교환가치에 의한 소비를 기반으로 하는 음악이었다. 그리고 그 담당층은 자신들의 예능을 생존수단으로 하였다는 점에서 여타의 기층 음악과는 성격이 달랐다. 이들 음악들의 탄생은 당시 상업발달의 상 황과 긴밀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양주별산대놀이 가면>   
1929년 9월 경복궁에서 박람회가 개최되었을 때 공연 후 수집되었다.[서울대학교 박물관]

이상과 같은 모습은 한마디로 요약하면 음악을 지배하는 힘(권력)이 ‘신분’에서 ‘경제’로 옮아가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물론 이와 맞물리게 되는 현상은 20세기 이후 자본주의적 경제구조가 정착하면서 그 완전한 틀을 잡게 된다. 조선 후기의 이런 현상은 음악이 철저하게 시장경제의 논리에 의해 생산된 것이 아니라는 점과 수용층의 요구가 음악 생산의 뒷받침이 되었다는 점에서 자생적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맹아로 보기는 어렵다. 자본주의적 생산구조는 익명의 소비자를 위해 음악이 생산되고, 음악생산이 수용층의 요구에 전적으로 의존하기보다는 생산자측에서 수용층의 요구를 만들어가는 현상이 강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가곡과 같은 경우 익명의 소비자를 위해 대량 생산되지 않았으며, 가객들이 수용층의 요구와 수요를 창출하였다고 보기 어려운 점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이런 모습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심하게 왜곡된다. 일본의 식민지로 편입되는 과정에서 음악 역시 식민지 초과이윤 수탈구조 속에 놓이게 되었다. 이는 당시의 하드웨어 기술 발달과 관련이 있는데, 유성기가 처음으로 등장하게 되면서 빅타, 오케이, 시에론, 폴리도르, 태평 등 일본 음반자본의 한국시장 진출은 자본주의 상품화와 식민지 지배구조 속에서 음악의 생존구조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1896년 미국에서 한국 노동자들이 취입한 에디슨 원통형 음반에 <아리랑>, <매화타령>, <자장가>, <달아달아>, <애국가> 등이 실린 이래, 190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인 유성기 음반시대가 열렸으며, 1910년 일제의 한국 강점 이후 일본 축음기 회사가 들어오면서 많은 경서도·남도민요 및 판소리가 음반에 취입되었다.

<에디슨의 원통형 축음기>   

조선 후기 도시발달·상품 화폐 경제발달의 구조 속에서 신분구조에서 경제구조로 서서히 음악토대가 변모해 갔던 역사적 상황은 이제 완전히 바뀌었다. 공, 일본 음반자본의 이윤에 의해 음악이 좌지우지되는 단계가 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일본 음반자본은 조선이라는 ‘시장’을 상대로 상품을 팔아서 그 이윤을 얻으려 하였고, 이는 곧 음반자본의 입장에서 잘 팔릴 것으로 판단되는 음악은 음반을 통해서 살아 남고 그렇지 않은 음악은 그 음악의 역사성이나 예술성과 무관하게 도태되는 구조가 생겼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이윤은 일본 자본을 살찌우는 거름이 되었으므로 조선의 음악은 원료생산과 상품시장을 통해 초과 이윤을 수탈하려는 전형적인 식민지 경영구조 속에 놓였다. 이 때 원료는 곧 팔릴 가능성이 큰 음악이 되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음반자본의 이윤추구에 도움이 되는 음악이었던 통속민요와 신민요, 판소리는 어느 정도 성장도 하고 전국적인 규모의 인기도 누리게 되었지만, 가곡, 줄풍류, 잡가(가사)는 이윤추구의 논리에 의해 급속한 쇠퇴와 전승단 절의 위기를 겪게 되었다. 애석하게도 당시 인기를 모았던 유명 명창들의 소리가 음반에 실려 더 많이 팔릴수록 일본의 이윤은 극대화되고 조선 지배의 힘이 커졌던 것이 당시 상황이었다.

조선의 음악은 정상적인 경제 구조의 토대 위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의 음악을 지배하는 힘(권력)은 ‘경제적 조건’ 그 자체가 아니라 식민지 지배권력이었다. 그로 인해 음악의 역사와 예술적 가치와 기존의 향유양상이 완전히 무시된 채 오로지 식민지 자본의 판단에 의해 생존이 규정되어 버리는 왜곡된 구조를 겪어야 하였다. 결국 조선 후기가 음악을 지배하는 권력이 ‘신분’에서 ‘경제’로 이동하는 시기였다면, 일제강점기는 온전한 경제구조가 아닌 식민지 수탈구조에 의해 음악이 규정되어 버린 시기이다. 이는 또한 음악을 규정하는 권력의 왜곡을 경험한 시기라고도 할 수 있다.

이후 20세기 후반기 들어서면서는 시장경제와 상품성의 논리에 의해 완벽하게 전통음악이 자리잡았다. 시장이라는 필터가 갖는 권력은 막강하며, 시장에서 살아 남기 위해 전통음악을 전공한 연주자들은 전통음악을 끊임 없이 변모시킬 것을 강요받고 있다. 대중음악이나 서양 클래식음악, 혹은 재즈 등과 접목하거나 이질적인 요소들을 혼합한 음악들이 관심을 끌면서 이제는 전통음악 그 자체만을 가지고 공연을 하는 것이 오히려 어색해진 상황이 되었다.

많은 전통음악 전공자들은 이런 하이브리드 음악들을 ‘창작’의 이름으로 ‘국악’의 범주에 넣어서 생각하며, 대중들 역시 이들과 같은 착각을 하고 있다. 이런 저런 이질적 요소를 혼합하였으면서도 새로운 국악 혹은 창작국악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이 시대의 감성에 맞게 국악은 변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말들이 공통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전통음악 그 자체만 가지고서는 더 이상 시장에서 생존을 보장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시장에서 생존을 못하면 곧 도태되므로 오늘날 전통음악은 오히려 일제강점기나 20세기 중반 무렵보다 더 위기에 처해 있다. 이것은 시장이 지배하고 있는 막강한 영향력의 결과이다.

[필자] 전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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