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몸’으로 본 한국여성사를 내면서

인간의 몸은 생물학적으로 크게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된다. 사회 안에서 인간의 몸은 자연적인 상태에 머물러있지 않고 삶의 경험을 반영하고 투영하는 매개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몸이 있어야 존재하고 행위할 수 있는 반면, 장애나 노쇠, 남성 또는 여성 등 몸의 상태에 의해 규정되기도 하므로 여기에는 사회적 차이와 차별이 투영되어 있다.

다시 말하자면 몸은 겉으로 보기에 생물학적인 형태를 띠고 있지만 거기에는 여성과 남성으로 살아가는 삶의 형태가 낱낱이 새겨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의 몸은 젠더의 역사를 읽어내는 자료이자 현실의 장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여성은 몸으로 결정되었다. 자궁이 있는 여성은 아이를 낳을 수 있으나 자궁이 ‘있음’으로 인해 오랜 세월 여성성이나 모성의 이름으로 갇혀 지냈다. 지모신앙(地母信仰)으로 대표되는 여성의 몸을 숭배하던 원시시대를 제외하고 자궁이 있는 여성은 아이를 낳고 기르는 임무를 떠안게 되었고 그것이 곧 여성성의 원천으로 인식되었다.

18세기 이후 과학이 발달하면서 여성과 남성의 차이에 대한 연구가 구체화되었다. 과학의 발달은 여성의 몸이 연약하다는 증거를 쏟아내었고 출산과 양육에만 적합한 몸이라는 논리를 이끌어 내었다. 19세기 근대에 접어들면서 과학은 여성의 몸이 모성을 발휘할 때에만 가치가 있다 는 논리를 뒷받침하였다. 여성의 몸이 생물학적인 ‘자연(自然)’을 넘어 사회 및 문화적인 요소에 의해 규정되고 제한된 것이다.

1970년∼1980년대를 거치면서 여성학자들은 몸을 자연적인 범주로 보지 않고 사회나 문화적인 권력 관계를 반영하는 것으로 파악하기 시작하였다. 여성에 대한 이데올로기와 남성의 시선이 어떻게 여성의 몸에 스며 있는지를 분석하여 여성의 ‘몸’이 처한 현실에 주목하였던 것이다. 예컨대, 1851년에 소저너 트루스(Sojourner Treth)가 던진 유명한 질문 “저는 여자가 아닙니까?”처럼 문화적으로 어떤 여성을 여성으로 간주하는지는 생물학적인 요소로 결정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한국 역사 속에서 여성의 몸은 어떤 이데올로기와 사회적 요소로 파악되고 해석되었을까? 이 책은 2008년에 한국 여성사를 전공하는 필자들이 모여 몸에 대한 이론을 공부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책에 참여한 필자들은 대부분 한국여성연구소 여성사연구실에 소속된 연구자들이다. 그동안 공동 작업으로 펴낸 책이 『우리 여성의 역사』(1999), 『혼인과 연애의 풍속도』(2005)이며 이 책은 공동 연구의 세 번째 결과물이다.

세 번째 공동작업을 위해 모인 필자들은 ‘여성의 몸이란 무엇인가’라는 소박한 질문에서 출발하여 한국사에서 여성의 몸을 이데올로기의 전쟁터로 이해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지를 타진해 보고 싶었다. 이 책의 필자들에게 ‘몸’이란 주제인 동시에 소재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외국의 관련 연구 성과에 힘입어 여성미, 임신, 출산, 성(性), 모성, 치장 등을 공통 주제로 하여 시대별 특징과 변화 양상, 이를 바라보는 시선과 담론을 이리저리 사료들을 찾고 재해석해 보았다.

이 책은 한국 고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크게 3부로 구성되었다. 시대에 따라 여성의 몸이 어떻게 인식되고 어떤 의무가 부과되었는지를 살펴보기 위해 한국사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시대 구분을 따랐다. 제1부는 원시시대부터 고려, 제2부는 조선, 제3부는 개항 이후 1970 년대까지의 내용을 담았고 총 8편의 글이 실렸다.

<고대 여성의 몸, 숭배와 통제 사이>는 선사시대부터 삼국시대에 걸쳐 여성의 몸이 신성한 존재로 추앙되다가 아들 낳는 몸으로 세속화되는 과정을 밝히고 있다. 구석기에서 신석기시대의 여성상(女性象)의 출토는 여성의 몸을 개인의 몸이 아닌 사회적 재생산자로서 신성하게 여기고 숭상하였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삼국시대에 여성의 몸은 시조모(始祖母)나 여성 산신, 노구(老軀)의 형태로 국가적으로 숭상되었으며, 신을 대리하는 사제로도 활동하였다. 불교가 유입된 이후에도 여성의 몸은 관음의 현신으로 여겨졌다. 뿐만 아니라 가계의 시조로 숭앙받는 여성도 있었다. 이는 여성의 몸이 생산과 번식의 신비한 능력을 가진 존재로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점차 남성을 중심으로 한 가부장적 질서가 형성되면서 여성의 몸은 통제되기 시작하였다. 여성의 몸은 가계 계승자인 아들을 낳아야 하는 몸이 되었고 투기나 간음 등 가부장적인 가족 질서를 위협하는 행위는 통제되었다. 하지만 혼전 순결이나 재혼에 대한 금기가 보이지 않고 있어 여성의 몸이 여전히 출산이라는 사회적 재생산이라는 측면에서 중시되었다고 해석하였다.

<친족 일부로서의 몸>은 고려시대 여성의 몸에 대한 전반적인 고찰이다. 불교 및 법제에서 규정하는 여성의 몸에서부터 왕비, 귀족 여성, 평민 여성에 이르기까지 결혼과 출산, 공납, 사랑 등 다양한 소재를 통해 여성의 몸이 어떻게 규정되었는지 살펴보았다. 불교에서 몸이란 공(空)으로서 고정된 실체가 아니며 생로병사의 고통을 낳는 원천이었다. 불교에서 여성은 해탈을 방해하는 성욕과 동일시되었다. 불교 교리에서는 부부 사이의 정절을 중시하여 간음은 물론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두는 것조차 금지하였다. 여성의 출산은 왕비에서부터 천인에 이르기까지 국가와 가정을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동력이었으며 여성의 중요한 성취 수단으로 작용하였다. 특히, 재생산 능력을 가진 여자 하인은 남자 하인보다 더 가 치있게 여겨졌다.

불교에서 몸과 깨달음은 별개의 것으로 간주하였으므로 고려 여성들은 아름다운 외모를 과시하였으며 각종 기록에도 여성의 미모에 대한 묘사가 빈번한 편이다. 여성들은 외모를 가꾸기 위해 화장을 하였으며, 검은 머리, 하얀 피부, 요염한 눈과 반달같은 눈썹, 통통한 볼, 날씬한 몸매가 미인의 조건이었다. 그러나 고려가 원 간섭기에 있을 때 여성의 몸은 위태로워 공녀로서 희생을 강요당하였다.

<예와 수신으로 정의된 몸>은 조선시대 유교 사회에서 양반 남성들이 여성의 몸을 어떻게 인식하고 규정하였는지 살핀 글이다. 조선 사회에서 여성에게 요구된 많은 규범은 모두 예(禮)로 정의되었고 예의 실천은 도덕적 강제성을 띠었다. 유교에서 여성은 덕녀(德女)와 악녀로 이분화되어 유교적 여성 윤리에 충실하면 덕녀가 그렇지 못하면 악녀가 되었다. 유교에서 여성에게 요구한 예의 기본원리는 남녀유별로서, 음양론 및 내외 관념에 기반하여 여성과 남성은 질적으로 다른 세계에 속한 존재이자 수직적 관계임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여성은 화의 근원이라는 여화론을 통해 이러한 인식을 강화하고 고착시켰다. 곧, 여성의 몸을 불온한 욕망을 유발하는 재앙으로 간주하여 여성의 몸과 성(性)을 철저하게 관리해야 할 대상으로 만들었다. 그 결과 여성의 몸은 아들 낳는 몸, 가문을 살리는 몸, 절개를 지키는 몸으로 규정되었다.

유교에서는 누구나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고 하면서 수신을 통해 인욕을 극복하도록 권장하였다. 조선 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한 수신은 여성 자신의 완성보다 남편의 완성에 초점을 두었으며, 남편과 가문을 위해 여성이 가진 생산능력을 관리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출산하는 몸>은 여성의 출산과 가계 계승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글은 여성의 몸이 출산하는 주체로서 의미가 컸다는 점을 전제한 뒤 조선 사회에서 이루어지던 임신과 출산의 양상을 검토하였다. 조선에서 신분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는 어머니의 혈통이었으므로 양반 남성은 양 반 여성을 적처로 삼았고 적처는 배타적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건강한 출산을 위한 조건으로 건강한 신체를 선호하면서도 성격이나 품행 등 좋은 성품이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있다고 보았다. 임신한 후 여성의 몸은 태교에 힘썼는데 건강한 아이 못지않게 사회가 요구하는 바람직한 인간상, 곧 도덕성을 갖춘 아이를 희망하였기 때문이다.

각종 산전 산후병은 여성의 몸을 위협하였다. 산전 산후병은 출혈 증세가 큰 비중을 차지하였으며 유종(乳腫), 변비, 부종도 여성을 괴롭힌 증세였다. 한편, 조선 사회는 혼인 관계에서 여자 집안의 영향력이 컸기에 아이를 낳지 못하는 적처를 내쫓는 대신에 다른 대안을 찾았다. 곧, 양자들이기라는 유용한 출산 대체를 통해 적처의 지위를 유지해 주었다. 결론적으로 출산은 가계를 계승하는 수단이었고 아들 낳은 어머니이야 말로 여성 가운데 가장 높은 지위를 누렸다고 할 수 있다.

<타자화된 하층여성의 몸>은 일기(日記)나 호적 등 일상 관련 자료를 토대로 하여 조선시대 여자 하인의 몸과 성(性)을 조명하였다. 조선은 계층 구분이 엄격한 사회로 최하층에 노비가 위치하였다. 사노비는 주인의 소유물이자 성(姓)없이 단지 이름만 가진 존재로 전체 인구의 30∼40% 정도를 차지할 만큼 비중이 높았다. 여비의 몸은 몸종과 유모, 취사, 방아찧기 등 각종 가사노동에 시달렸을 뿐만 아니라 양잠과 길쌈, 장사 등 생산 노동에도 종사하였다.

주인 입장에서 노비의 몸은 재산을 늘리기 위한 수단이었으므로 여비의 혼인에 일정한 통제력을 가하였고 성관계도 규제하였다. 더구나 여비의 몸은 양반에게 농락을 당하기 일쑤였다. 여비가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의 몸은 어머니를 따라 노비가 되어 주인집에 사환하였고, 그 아이가 딸이면 어린 나이에 성적 수탈을 당하는 악순환이 되풀이되었다. 또한, 양반은 본인 소유의 비를 첩으로 삼기가 매우 수월하였으므로 여비가 주인의 첩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여비의 몸은 각종 노동과 성적 수탈에 그대로 노출된 채 고단하기 이를 데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여성의 외모와 치장>은 조선시대 외모의 의미와 여성의 치장 문제를 여성의 ‘작은’ 저항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조선에서는 ‘부용(婦容)’이라 하여 여성의 용모에 대한 기준을 마련하였다. 부용이란 여성의 아름다운 외모가 아닌 청결을 강조하는 논리로서 몸과 얼굴을 깨끗이 씻고 의복을 청결하게 입는 것을 의미하였다. 여성의 몸이 마음의 투영체로서 중시되다보니 청결과 예의바른 몸가짐이 강조되었고, 여성의 몸짓, 자세는 덕스럽고 조신한 동작을 훈련하도록 권장하였다. 그리고 여성의 근검과 절약을 이끌어내기 위해 여성의 미모를 불온시하고 꾸밈이나 치장을 사치라는 이름으로 경계하면서 여성의 다양한 욕구를 제한하였다. 여성을 대상으로 한 교육서에 사치가 여성의 ‘덕’을 측정하는 가치 기준으로 들어선 이유도 여성의 치장을 억제하고자 하였던 위정자들의 의도가 담겨있었다.

하지만 여성들은 치장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에도 불구하고 남보다 외모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치장을 서슴치 않았다. 사회적으로 수용될 수 없는 경계선마저 넘나들면서 다양한 치장을 시도하였다. 특히, 18세기 후반 가체(加髢)로 대표되는 여성의 머리치장은 국가의 강력한 규제에도 불구하고 그 틈새를 비집고 오랫동안 지속되었다는 측면에서 눈여겨볼 만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몸의 가치와 모성의 저항>은 한국 근대사회에서 여성의 몸을 둘러싼 변화를 다양한 측면에서 검토한 글이다. 근대란 육체가 정신에서 분리되면서 몸의 가치나 중요성이 새롭게 인식된 시기라는 전제에서 시작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근대적 서구스타일의 잣대에 기반한 미적 기준이 마련되었으며 근대적 위생도 강조되었다. 여성의 정신미도 예의미, 동작미, 언어미, 품성미, 심정미, 자상미, 기술미 등으로 세분화되었다. 신여성은 여성의 몸이 자아와 연결되어 있음을 지각하고 검소함에서 벗어나 근대적 개성미를 추구하는 데에 힘썼다. 의복 개량은 획기적인 변화로서 근 대적 실용성과 여성미 그리고 건강에 대한 고려를 바탕으로 긴 저고리에 짧은 치마를 입고 양산을 들고 하이힐을 신은 옷차림이 등장하였다. 또 쪽진 머리에서 단발의 유행, 나아가 퍼머 머리도 출현하였다.

그러나 식민지 사회에서 여성의 몸은 노동력, 출산 능력으로 평가받는 것으로서 어떤 곤란도 감수해야 하였다. 결혼과 임신, 출산 등은 사회의 일로 관리 통제의 대상이었고, 전쟁이 요구하는 남아를 낳아 잘 키우는 것이 여성의 몸에 할당된 의무였다. 또한, 전시 체제에서 여성의 몸에 대한 수요가 증대하면서 여자 군속, 종군 간호부, 여자정신대, 일본군 ‘위안부’ 등 여성 동원이 일상화되었다.

<미, 노동 그리고 출산>은 6·25전쟁 이후 1970년대까지 여성의 몸에 대한 인식을 밝히고 있다. 해방 이후 1950∼1960년대를 거치면서 텔레비전을 비롯해 대중매체가 발달하면서 여성의 몸은 치장하는 몸과 보여지는 몸으로서의 변화가 본격화되었다. 아름다운 여성이란 큰 키와 가슴, 잘록한 허리와 풍만한 엉덩이라는 섹슈얼리티로 각인되었고 이에 따라 각종 잡지에도 미용실, 화장품, 성형 광고가 넘쳐났다. 의복도 한복과 양장의 공존, 유행과 통제가 함께하는 시기였다. 기능성을 강조한 바지와 빌로도 치마, 맘보 바지의 등장, 전시생활개선법, 신생활운동 등을 통한 의복 간소화운동이 공존하였다.

1970년대 이후 한국사회는 산업화와 도시화가 본격화되면서 여성의 몸은 생산의 현장으로 나아갔으나 노동의 가치는 철저히 외면 당하고 실제 기여에 비해 홀대되었다. 한편, 1962년부터 실시된 가족계획사업으로 여성의 몸에는 강제 불임 수술이 강요되었으나 여전히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사회적 인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였다. 해방 이후 군정으로 시작된 미군의 주둔으로 기지촌 여성들이 출현하였고 양공주, 양갈보 등으로 불리며 사회에서 온갖 멸시를 당하였다. 이처럼 양육-재생산 위주로 존재해왔던 여성의 몸은 현대 사회에서 다양하게 변화하였으나 그 흐름 속에서 정작 여성의 몸은 철저히 배제되어 왔던 것이다.

이상으로 이 책에 실린 내용을 소개하였다.

8명의 필자들이 함께 모여 이 책을 엮으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연구 방법론의 부재였다. ‘몸’이라는 화두를 갖고 연구모임을 시작하였으나 필자들이 한국사 전공자다보니 몸을 둘러싼 다양한 학문 분야의 성과를 제대로 흡수하지 못하였다. 예상은 하였으나 한국사 안에서 여성의 몸을 연구하기 위한 적합한 연구방법론을 개발하기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그래서 이 책의 필자들에게 여성의 몸이란 ‘주제’인 동시에 ‘소재’이기도 하였다. 이 책을 읽다보면 여성의 몸에 대해 접근하는 시각이나 연구방법이 제대로 반영되지 못한 부분들이 많다. 소재로서의 몸은 맞지만, 몸에 대한 접근 방식으로서는 아쉬운 점이 있다.

그럼에도 필자들이 이 책을 마무리 지을 수 있던 조그마한 위안은 한국사에서 여성의 몸에 대한 연구로서 첫 발을 내딛었다는 점이었다. 또한, 빈약한 사료 속에서 한국 고대부터 현대까지 ‘몸’이라는 화두를 갖고 일관되게 풀어냈다는 점에 의미도 부여해 보았다. 이 소박한 시작에 대해 독자 여러분들의 따뜻한 질정을 기다릴 뿐이다.

끝으로 이 책을 출간할 수 있도록 도와준 국사편찬위원회와 관계자들에게 감사드린다.

2011년 9월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

[필자] 정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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