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2 고려시대의 문자생활과 서체

01. 고려시대 초기

고려는 초기에 과거제도의 시행으로 서사문화의 발달에 많은 영향이 미쳤다. 과거의 대과로 제술과와 명경과 두 과목을 두었다. 이 두 과목은 본과로서 문반관료로 진출하는 사람은 반드시 거쳐야 했는데 작품의 우열이 당락의 기준이 되었지만 서체로도 심사가 정해지므로 서법의 훈련을 게을리 할 수 없었다.

서학(書學)은 국자감에 속하되 학생은 모두 8품관 이상인 관원의 자제 및 서인(庶人)에게 입학의 자격을 주었다. 이들을 양성하는 기관은 성균관에 서학박사를 두어 팔서(八書)를 맡아 가르쳤다. 국자감의 학생들은 반드시 여가에 글씨를 하루에 한 장씩 쓰며, 아울러 『국어(國語)』·『설문(說文)』·『자림(字林)』·『삼창(三倉)』·『이아(爾雅)』 등을 학습하였다. 더구나 잡과에 서업(書業)을 둠으로써 서체가 발달하는 계기가 되었다. 서업은 서사(書寫)를 전업으로 하는 관원을 많이 필요로 하는 정부가 둔 관직이다. 고려 인종 때 잡과의 한 과목인 명서업(明書業)의 감시(監試)는 첩경(貼經) 방법으로 하되 2일 내에 실시하였고, 첫 날에는 『설문』에 6조, 『오경자양(五經字樣)』에 4조를 첩경방법으로 시험하여 모두 통하여야 하며, 다음날에는 서품(書品)에서 장구시(長句詩) 1수 와 해서·행서·전서·인문(印文) 등 하나씩을 시험하되, 『설문』의 10궤 안에서 문리와 글 뜻을 안 것이 6궤가 되어야 하며, 글 뜻은 6을 묻고, 문리는 4궤를 통하여야 한다는 기준이 정해져 있다. 서업의 감시는 『자설문(字說文)』 30권 안에서 백정은 3책, 장정은 5책을 각각 문리를 잘 알아서 읽고, 또 해서로 쓰게 하였다. 서업을 양성하는 기관으로 성균관에 서학박사가 있고, 서리로는 각 관청마다 서령사(書令史)·서예(書藝)·시서예(試書藝)·서수(書手) 등이 배치되어 서사를 담당하였다. 이 같은 관련제도의 정비는 서법의 발전과 보급을 촉진하였다.

<광조사 진철대사보월승공탑비(924) 탁본>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비(924) 탁본>   

고려시대 초기에는 신라를 이어 왕희지·구양순·우세남·안진경·유공권 등의 글씨가 유행하였다. 특히, 고려시대의 석비에는 문장, 글씨 등 당시의 대표적인 명필이 왕명에 의하여 조성되었으므로 당 대를 대표하는 뛰어난 수준을 보여준다. 고려 초기에는 신라의 전통을 계승하여 당나라 여러 대가들의 필법을 수용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구양순의 서체가 즐겨 사용되었던 것이다.

<봉림사 진경대사보월능공탑비(933) 탁본>   
<봉림사 진경대사보월능공탑비 제액 탁본>   

구양순체는 신라 후기부터 고려 초기에는 남종선 사상을 주창해 온 선사들의 탑비에 사용되었는데, 이환추·구족달·장단열·한윤 등은 모두 이 시기의 명필들이다.

이원부와 장단열은 우세남체(虞世南體)에도 능하였다. 이원부는 <반야사 원경왕사비(般若寺元景王師碑)>를 우세남체로 썼고, <칠장사 혜소국사비(七長寺慧炤國師碑)>는 구양순체로 썼다. 장단열은 <봉암사 정진대사원오탑비(鳳巖寺靜眞大師圓悟塔碑)>를 우세남체로, <고달사 원종대사혜진탑비(高達寺元宗大師慧眞塔碑)>를 구양순체로 썼다. 이 밖에 김원은 <용 두사 철당간기(龍頭寺鐵幢竿記)>를 유공권체로 썼으며, 현재는 없어진 <승가굴중수기비(僧伽窟重修記碑)>는 안진경의 서법이다.

<광조사 진철대사보월승공탑비(937) 탁본>   
<보리사 대경대사현기탑비 제액(939) 탁본>   
<비로사 진공대사보법탑비(939) 탁본>   
<비로사 진공대사보법탑비 제액 탁본>   

석비의 제액이나 두전에 있어서 고려시대 초기인 10세기에는 신라의 전통을 이어받아 주로 소전이 사용되었다. 대표적인 예로는 <보리사 대경대사현기탑비(菩提寺大鏡大師玄機塔碑)>[939, 이환추 봉교서병전액(李桓樞 奉敎書幷篆額)]·<비로사 진공대사보법탑비(毘盧寺眞空大師寶法塔碑)>(939, 이환추 봉교서병전액)·<정토사 법 경대사자등탑비(淨土寺法鏡大師慈燈塔碑)>[943, 구족달 봉교서(具足達 奉敎書)]·<흥녕사 징효대사보인탑비(寧越興寧寺澄曉大師寶印塔碑)>(944)·<무위사 선각대사편광탑비(無爲寺先覺大師遍光塔碑)>[946, 유훈율 봉교서(柳勳律 奉敎書)>·<봉암사 정진대사원오탑비>[965, 장단열 봉칙서병전액(張端說 奉勅書幷篆額)]·<고달사 원종대사혜진탑비(高達寺元宗大師慧眞塔碑)>[975, 장단열 봉제사병전액(張端說 奉制書幷篆額)]·<보원사 법인국사보승탑비(普願寺法印國師寶乘塔碑)>[978, 한윤 봉제서병전액(韓允 奉制書幷篆額)]·<연곡사 현각선사탑비(燕谷寺玄覺禪師塔碑)>[979, 장신원 서(張信元 書)] 등이 있다.

<흥법사 진공대사탑비(940) 탁본>   
<정토사 법경대사자등탑비 제액(943) 탁본>   
<무위사 선각대사편광탑비 제액(946) 탁본>   
<봉암사 정진대사원오탑비(965) 탁본>   
<봉암사 정진대사원오탑비 제액 탁본>   
<고달사 원종대사혜진탑비(975) 탁본>   
<고달사 원종대사혜진탑비 제액 탁본>   
<고달사 원종대사혜진탑비 탁본>   

필획과 결구가 소전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 필법으로 역시 소전이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그 중에서도 이환추는 <보리사 대경대사탑비>와 <비로사 진공대사탑비>를 유엽전으로 써서 양각하였다. 구양순체에 익숙하였던 이환추의 유엽전은 소전이지만 필획에 방필(方筆)과 노봉(露鋒)을 사용하였다.

역시 일반적인 전서의 필법에서 볼 수 없는 이환추의 서법으로 볼 수 있으며, 이러한 서법은 김인문이 서사한 것으로 전하는 <태종 무열왕릉비>가 참고되었을 것이다.

<보원사 법인국사보승탑비 제액(978) 탁본>   
<연곡사 현각선사탑비(979) 탁본>   
<연곡사 현각선사탑비 제액 탁본>   
<흥녕사 징효대사보인탑비 제액(944) 탁본>   

11∼12세기의 대표적인 명필로는 현종(顯宗, 992∼1031)·백현례(白玄禮, ?∼?)·손몽주(孫夢周, ?∼?)·임호(林顥, ?∼?)·민상제(閔賞濟)·안민후(安民厚)·이원부(李元符)·탄연(坦然, 1069∼1158)·오언후(吳彦侯)·기준(機俊)·유공권(柳公權, 1132∼1196) 등을 들 수 있다.

현종은 태조 왕건의 손자로 제8대왕이다. 백현례는 구양순체를 가장 잘 구사한 고려시대 중기의 제1인자이다. 임호·민상제·안민 후·오언후 등도 역시 구양순체를 잘 썼던 명필이다. 그러나 이원부는 우세남체에 능하였고, 탄연은 김생과 함께 왕희지체의 대표적인 명필로 제자인 기준이 뒤를 이었다.

[필자] 손환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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