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3 조선시대의 서예 동향과 서예가01. 조선시대의 서예 동향조선 전기 서예 동향3. 서예 의식의 변화

역대 서예에 대한 인식

조선 초기의 서론은 문학론이나 시론 등에 비해 관심이 낮았다. 이 때문에 고려조 이규보(1168∼1241)와 같이 문화적 정체성을 강조한 서평이나 다양한 서예론이 적었다. 그러나 성리학의 인성론을 바탕으로 서예를 이해하려는 경향이 많아지면서 새로운 성향의 서론이 등장하였다.

다음의 자료를 보기로 한다.

문순공(이규보)이 평론한 <동국서결(東國書訣)>은 김생을 신품 제1로 놓고, 탄연을 제2, 진양공은 제3, 류신을 제4로 놓았으며, 또 학사 홍관, 재상 문공유, 종실승 충희, 도림, 시랑 박효문, 재상 유공권, 소성후 김거실, 재상 기홍수, 학사 장자목, 산인 오생(悟生)·요연(了然)을 묘품·절품의 순서로 삼았다. 또한 말하기를 나는 아직 그 글씨를 보지 못한 것이 있기 때문에 지금 그 우열을 말할 수 없다고 하였다.

우리 동방은 시와 문장이 적어 전하는 서화가 드물다. 문순공 때는 오히려 보지 못한 글씨가 남아 있었지만 지금은 남아 있는 필적이 하나도 없으니 탄식할 만하다. 고려 말에 글씨로 이름난 이로는 유항, 한수, 독곡 성석린, 승 환암이 근 100여 년 사이에 있었지만 전하는 것이 많지 않다. 본조의 행촌 이암, 직제학 최흥효, 안평대군 용, 인재 강희안, 삼재 성임, 판서 정난종, 사간 박효원, 임사홍, 박경 등은 모두 공서(工書)이다. 최흥효의 초서와 이용의 행서는 세상에 성하였지만 지금은 이미 드물고 귀해졌다.24)

<강희안 해서 <윤형 묘비명>>   

이처럼 강희안(1418∼1465)은 고려 말 조선 초에 글씨를 잘 쓰는 자들이 많았지만 당시에 전하는 작품이 적어 아쉬움을 표하고 있다. 또한, 고려 말 조선 초의 작가에 대한 품평이 없이 단순히 나열하는 것에 그치고 있다.

다음 자료에서는 명서가에 대한 간단한 품평을 하고 있다.

고금의 서법은 오직 왕일소(王逸少)와 조자앙(趙子昂)을 제일로 추앙하니 이백(李白)과 두보(杜甫)의 시와 같을 뿐이다. 왕일소는 준미단경(遒媚端勁)하며 법도삼엄(法度森嚴)하고, 조자앙은 비건호매(肥健豪邁)하며 기격웅려(氣格雄麗)하여 각기 그 묘함에 이르렀다. 세상에서 말하기를 왕일소가 쓴 『난정기(蘭亭記)』는 당 태종의 소릉(昭陵)에 들어간 이후 다시 세상에 나왔으니 서로 굴러다니고 모서(摹書)가 전하는데 배우는 자가 진의(眞意)를 본받지 못하고 오히려 (범을 그리려다) 개를 닮은 근심이 있게 되었다. 신라 때 김생(金生)이 능서(能書)로 왕일소의 전형을 깊이 체득하였는데 애석히도 그의 글씨는 지금 많이 볼 수 없다. 조자앙이 쓴 글씨는 세상에 많이 있어 지금 배우는 자가 모두 조자앙을 법 삼는다. 고려 때 그 법을 얻어 핍진한 이로 문정공 행촌(杏村) 이암(李嵒) 혼자이다.

우리 국조에서 글씨를 잘 쓰는 사람으로는 창녕(昌寧) 성임(成任), 동래(東萊) 정난종(鄭蘭宗), 인재(仁齋) 강희안(姜希顔)이 있는데 모두 조자앙을 배웠고, 정난종은 왕일소를 함께 배웠다. 안평대군의 서법은 근대에 비할 자가 없고 조자앙과 나란히 할 만하며 천하에 뛰어나서 제자(諸子)들이 미칠 바가 아니다. 근래에 처사(處士) 성수침(成守琛) 또한 글씨를 잘쓴다고 칭하는데 자못 조자앙의 필체를 얻었다. 상사(上舍) 강한(姜翰)은 자성일가하여 필획을 연마하여 교묘해서 많은 사람들이 보배롭게 여겼다. 상사 황기로(黃耆老)는 어려서부터 글씨에 공교하여 해법(楷法)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고, 행초가 신기호일(神奇豪逸)하며 대부분 간행되어 전한다. 이암(頤庵) 송인(宋寅)은 또한 조자앙을 배워 얻은 바가 많았으며 황기로 이후의 거벽으로 칭한다. 퇴계 이 선생은 서법이 순정하여 그 사람됨을 닮았으며(類其爲人), 그것을 보면 존경할 만하다. 일찍이 ‘점필서원(佔畢書院)’ 네 글자를 써서 우리 선조인 점필재(佔畢齋) 서원(書院)에 걸어두었다. 그 중에 ‘필’ 자(字)는 엄연하게 방정(方正)하여 마치 공이 우뚝 서있는 기상과 같아서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우러르게 한다.25)

<이황 행초 <오언율시>>   

이 품평을 보면 박재(璞齋) 김조(金紐, 1527∼1580)는 우리나라 서법을 왕희지와 조맹부 서체를 중심으로 구분하여 비평하고 조선 초기의 명서가들 대부분이 조맹부체를 썼다고 여겼다. 그 중에서 퇴계의 글씨에 대해 ‘유기위인(類其爲人, 그 사람됨을 닮았다)’의 관점으로 평하였는데, 주자의 예와 덕이 서로 관련이 있다는 ‘예덕상관론(藝德相關論)’의 시각을 반영하는 것이다.

조선 초기의 역대 서예에 대한 인식은 단순 비평정도여서 서예에 대한 정체성 의식이 비교적 낮았다고 판단된다. 그렇지만 이면에는 성리학적인 비평기준이 점차 자리 잡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필자] 이성배
24) 『稗林』 제5집, 「諛聞瑣錄」.
25) 『璞齋集』 권5, 「閒中筆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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