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3 조선시대의 서예 동향과 서예가01. 조선시대의 서예 동향조선 전기 서예 동향3. 서예 의식의 변화

고법(古法) 중시

유가사상은 고법을 중시하는 상고(尙古)의식이 강하다. 고법 중시는 ‘지금의 사람은 옛사람에 미치지 못한다(今人不及古人)’는 의식과도 유사하여 옛날은 지금을 판단하고 논의하는 기준이 된다. 서예에서 고법을 중시한다는 개념은 고인의 서법을 중시하고 전통의 서법을 중시하며, 역사적 계통 또는 전통을 지켜야 한다는 의미이다. 새로운 서체가 등장하고 서체 변화가 일어날 때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우열 논쟁을 야기한다.

<성수침 행초 <칠언시>>   
<성수침 행초 <칠언시>>   

조선 초의 서론 유형 중에서 고법 중시의 유형을 먼저 살펴보기로 한다. 정유길(鄭惟吉, 1515∼1588)은 머리는 크고 꼬리는 뽀족한 전서(篆書)를 썼는데 과두서(蝌蚪書, 올챙이 글씨) 같았으며, 그의 서법은 법을 본받아서 아주 고박(古樸)하여 말기에 나타나는 ‘춘인추사(春蚓秋蛇)’와 같이 힘없고 멋대로 쓴 필체가 아니었으며, (그의 글씨에서) 고인(古人)이 글씨에 마음을 썼던 곳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33)

성수침(成守琛, 1493∼1564)은 명종 때의 유학자로 조광조의 문인이며, 우계 성혼의 부친이다. 글씨는 행초에 뛰어 났고, 웅건창고(雄建蒼古)하며 고아하여 세상 사람들이 보배롭게 감상 하였다. 다음의 기록은 그의 서예 유형을 보여준다.

성수침의 필법은 가장 고기(古氣)가 있어서 안평대군 이후로 짝할 만한 이가 드물다. 그러나 오직 호음(湖陰) 정사용(鄭士龍)이 사랑하지 않아서 말하기를 “친구 모씨를 방문하고자 해도 그 집에 성모(成某)가 쓴 병풍이 쌓여 있어서 갈 수 없다.”고 하였다. 황고산(黃孤山)의 초서는 한 때에 독보적이었으나 송강(松岡) 조사수(趙士秀)가 사랑하지 않아 매 번 인가(人家)에서 황의 글씨를 보면 반드시 치워버린 후에 들어갔다. 두 공(公)의 글씨는 비록 한 글자의 작은 조각이라도 사람들이 반드시 보배롭게 여겨 잘 간직하고 수집하였다. 그러나 둘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바는 사람들과 다르니 왜 그런가.34)

성수침은 고법을 중시하는데 비하여 황기로는 광초를 좋아하며 고법에 얽매이지 않고 창의를 중시한다는 면에서 대립 관계이다. 또한, 정사룡은 창의를 좋아하고 조사수는 고법을 중시하여 서로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이 다르다.

<성수침 행서 <칠언율시>>   

성수침의 글씨는 안평대군 이후 고기를 갖고 있으며 송설체와 왕희지체를 바탕으로 하여 고아하다는 평가를 들었다. 고법을 중시한 성수침은 황기로의 글씨에 대해 필력은 여유가 있으나 스스로 창조한 것은 옛 필법이 아니어서 세상을 속인다고 하였고, 성수침 글씨를 편드는 사람도 황기로를 배척하기에 이르렀다.35)

따라서 고법 중시 유형은 전통적인 서법을 중시하며 글씨에서 고아함을 추구한다. 이 유형은 주자의 ‘지금 사람은 옛사람에 미치지 못한다는 설(今人不及古人說)’과 서로 맥락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그 런데 이 유형은 단지 고법의 중시나 묵수보다는 고법을 통해 전통성을 수립하는 의지를 드러낸다는 의미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성리학에서 고법 중시는 성인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한 배움의 과정으로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이해를 인식하여야 하듯이 서예에서 고법 중시 유형도 왕희지나 조맹부의 단계에 나도 이를 수 있다는 ‘학서(學書)’과정의 측면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필자] 이성배
33) 『어우야담』 3권, 「서화」.
34) 『패림』 제6집, 「송계만록」 하.
35) 『어우야담』 3권, 「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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