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4 근·현대의 서예 동향

02. 일제강점기의 서예 동향

[필자] 이승연

1910년 일제의 강점 이후 식민정책에 의해 우리 말과 문자의 사용을 금지 당하고, 일본 문자인 가나(假名)를 강제로 학습받게 되면서 문자생활은 혼란한 양상을 띠었다. 서예계 또한 구한말의 사대부와 관료 및 중인들에 의해 정체성을 가지고 유지되어 오던 상태에서 일제강점기를 맞아 침체 일로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민족말살정책은 서예계까지 손을 뻗치면서 일본 서예를 조선 내에 전파시켜 일본서풍을 따르도록 종용시키며 교란정책을 폈던 것이다.

이러한 어려운 현실 속에서의 서예 활동은 독립의 의지와 민족성의 고취를 서(書)로써 표현하고 망국의 비운을 필묵에 의탁하려는 ‘민족서파(民族書派)’와 친일의 수단으로 필묵을 이용하려는 ‘친일서파(親日書派)’로 나뉘어졌다.

독립운동가와 민족 계몽 운동가 등이 주축을 이룬 민족주의 서파로는 김가진(金嘉鎭, 1846∼1922)·윤용구(尹用求, 1853∼1939)·민형식(閔衡植, 1875∼1947)·김용진·현채·오세창 등이 협전을 중심으로 활동하였고, 친일서파로는 박기양(朴箕陽, 1856∼1932)·박제순 (朴齊純, 1856∼1916)·이완용(李完用, 1858∼1926)·박영효·민병석(閔丙奭, 1858∼1940)·김규진·김돈희(金敦熙, 1871∼1937) 등이 선전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이들 중에는 필묵을 이용하여 일본인의 환심을 사려는 계층이 생겨나 일본서풍으로의 동화가 서서히 진행되는 가운데, 일본은 조선에 대한 일본식 학교 교육과 민족문화 말살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리하여 1914년에는 일본 사람이 쓴 교본인 『조선총독부 습자교본』을 보통학교의 습자교본으로 삼게 하였고, 교사도 일본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일본 서풍이 자연스럽게 침투되게 되었다. 더욱이 서예가 지망생들은 등용문이 된 선전에 많은 관심을 갖고 일본인과 함께 출품하여, 일본인에게 심사 받는 과정에서 점차적으로 일본서풍의 영향을 크게 받게 되었다.

또한, 선전에서는 이완용과 김돈희 등의 심사로 인하여 일본색이 짙은 서풍이 자연스럽게 선정되면서 일본서풍이 크게 유행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30년대 중엽 이후부터 해방 전까지의 서단은 경색되어 특별한 움직임을 볼 수 없었으며, 다만 개인적인 작품 활동만을 영위했을 뿐이다.

[필자] 이승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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