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5 한글 서예의 변천04. 언문 후기: 1700년∼1800년대언문 후기의 필사체

1. 언문 후기 필사체의 서지적 특징

1700년∼1800년대의 필사체 자료로는 각종 필사본, 언간류, 기타 자료들이 많이 있다.

1700년대 어필(御筆) 한글서간(書簡) 자료로는 1759년(영조 35) 정조가 외숙모에게 보낸 34.7×56.7㎝ 크기의 편지, 1793년(정조 17) 홍 참판에게 보낸 41×56.7㎝ 크기의 편지 등이 있고, 경순왕후(장조비, 1735∼1815)가 화순옹주에게 보낸 35×30㎝ 크기의 편지가 있다. 일반인 여성 편지로는 1705년(숙종 31) 안동김씨가 시아주버니에게 보낸 32.6×35.7㎝ 크기의 편지, 1791년 유씨 부인이 남편 김노경에게 쓴 편지 등이 있다.

1700년에 쓴 궁체 중 연대가 확실하게 밝혀진 것으로는 1727년(영조 3) 영조의 아들 진종의 세자빈 책봉을 적은 『뎡미가례시일긔(丁未嘉禮時日記)』가 있다.

1800년대 궁중 필사자료로는 궁중의 많은 상궁들에 의하여 소설 베끼기, 편지 대필하기 등 궁체쓰기가 융성하였다. 그 결과의 궁체류의 소설본이나 편지글들이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이러한 궁체 전적은 대체로 4×6배판 크기 정도의 책으로, 종이는 닥나무 원료의 저지(楮紙)이고, 종이를 반으로 접어서 바깥면에 세로로 글자를 일정한 행으로 배자하여 정연하게 썼다.

한쪽 면을 반엽(半葉)이라고 하는데, 1개 반엽에 계선을 그리지 않고 10∼11행 정도의 줄을 정하고, 1행 당 20∼25자 정도의 글자를 띄어서 정자 또는 반흘림체로 배자하여 썼다. 책의 제본은 오른쪽을 5침하여 꾸몄는데 간행일자나 간행자, 필사자를 표기하지 않 았다.

이렇듯 궁중에서 제본 소장된 궁체 전적은 처음 창경궁 소재 장서각에 200여 종 2,400여 책이 있었으나,79) 현재는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 이관된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 궁체 소장본 중에 서체가 뛰어난 필사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궁체 정자체 원전으로는 <남계연담(南溪演談)>(3-3권), <역대기년(歷代紀年)>(1-1권), <보은기우록(報恩奇遇錄)>(18∼10권), <산성일기(山城日記)>(1-1권), <손천사영이록(靈異錄)>(3∼3권), 흘림체 원전으로는 <공문도통(孔門道統)>(1∼1권), <낙성비룡(洛成飛龍)>(2∼2권), <유씨삼대록(劉氏三代錄)>(22∼4권), <옥누연가(玉樓宴歌)>(1-1권), <옥원중회연(玉鴛重會緣)>(21∼18권) 등이 있다.

< <뎡미가례시일긔>>   
< <옥원중회연>>   

이 시기의 서간체로는 왕, 왕비, 대군, 선비, 일반인 등 다양한 계층의 편지 글씨들이 남아 있다. 그 중 1882년(고종 19) 대원군이 청나라에 납치되어 갔다가 본국의 부인에게 쓴 22.7×12.5㎝ 크기 의 편지, 명성황후가 민병승에게 보낸 22.0×25.0㎝ 크기의 편지, 고종 시기 상궁 서희순이 정경부인에게 쓴 21.8×43.5㎝ 크기의 편지, 1828년(순조 28)에 추사가 부인에게 쓴 편지 등이 있다. 또한, 1828년 추사의 아버지인 김노경이 며느리에게 쓴 편지도 있다.

[필자] 박병천
79) 박병천, 『한글궁체연구』, 일지사, 1983,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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