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1 무속의 역사적 전개

05. 맺음말

한국 무속의 전개과정을 3단계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그것은 한국 무속사의 시대구분론에 기초한 것이다. 즉, 시대구분의 기준으로 정치적 기능·사회적 기능·개인적 기능을 제시했고, 어떤 기능들이 발휘되느냐를 가지고 시대구분을 시도했다. 그 결과 세 가지 기능이 모두 발휘되던 원시∼삼국시대를 고대로 묶었고, 사회적 기능을 상실하고 두 가지 기능만 발휘되던 통일신라∼조선 전기까지를 중세로 설정했고, 두 가지를 상실하고 개인적 기능만 남은 조선 후기 이후를 근세로 설정했다.

그렇지만 아직 해결되어야 할 문제들이 남아있다. 첫째, 예외적 현상의 처리 문제이다. 위와 같은 시대구분론에 대해 삼국시대 이후에는 무속의 정치적 기능이 완전히 없어졌는가? 또 조선 후기부터 무속은 사회적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는가? 등의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더 구체적으로는 통일신라 이후에는 무격이 국가의례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는가? 조선 후기 이후에는 무격의 사회에 대한 기능이 사라졌는가라는 물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그러지 않은 경우들이 확인된다. 조선시대 국가 차원의 기우제 에 무격이 동원되며, 이때는 무격을 괴롭히는 폭무(曝巫)를 통해서가 아니라 무격의 종교적 능력의 발휘가 요구된다.97)

시대구분론은 많은 사실들을 끌어 모아 역사의 체계적 이해를 도모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외가 너무 많다면, 체계적 역사 이해는 실패한 것이며, 시대구분론은 타당성을 잃게 된다. 그런데 역사 현상은 다양하기 때문에 모든 사실을 다 만족시킬 수 있는 설명이나 이론의 정립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시대구분론에서 중요시하는 것은 커다란 흐름이며, 주류이다. 약간의 예외적 사실은 그대로 둘 수밖에 없다. 조선시대의 국가적 무격 기우만 하더라도 기우제의 주류가 아니다. 또 기우제는 정기적인 의례가 아닌 다급한 상황에서 행해지는 것인 만큼, 온갖 방법을 동원하는 것은 유교에서도 인정한다. 『시경』(대아 운한)의 ‘미신불거(靡神不擧)’, 즉 위급한 상황에서는 섬기지 못할 신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만을 가지고 조선시대에는 무격이 정치적 기능을 발휘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시대구분론은 모든 사실을 만족시키는 설명 체계가 아니라 큰 흐름을 파악하기 위한 작업 가설이다.

둘째, 16세기부터 지금까지를 하나의 시대로 묶을 수 있느냐는 문제이다. 조선 후기의 무속을 보면, 새로운 움직임이나 방향 모색이 있었다. 무격을 중심으로 새로운 이상세계를 건설하자는 운동도 있었다. 숙종 연간에 한 무격이 생불(生佛)을 자처하면서 새로운 이상세계의 건설을 추진한 것이 그러한 사례에 속한다. 이러한 것들은 무속이 한국 문화에서 ‘시민권’을 주장하는 움직임이라 할 수 있다. 또 어떤 의미에서는 무속의 정치적·사회적 기능을 회복시켜보자는 운동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그 자체로는 실패로 끝났으며, 미완에 그쳤다. 따라서 16세기∼현대를 하나의 시대로 묶어도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는 과거 조선시대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모든 것이 빨리 변하고 있다. 무속도 다소 완급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예외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6세기부터 지금까지를 하나의 시대로 설정한다면, 무리가 따를 수 있다. 따라서 한국 무속사에서 현대의 기점을 어디로 설정할 것이며, 그 시대적 특성을 어떻게 부여할 것인지는 앞으로 남은 과제가 아닐 수 없다.

[필자] 서영대
97)최종성, 『조선조 무속 國行儀禮 연구』, 일지사, 2002, pp.235∼242.
창닫기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