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3 정신세계의 통합공간 불교건축01. 정신세계의 혁명

왕실의 호국사찰 경영

불교가 국가운영원리로 자리 잡게 되자 삼국의 왕실과 귀족세력은 앞 다투듯 사찰들을 짓기 시작했다. 고구려는 372년(소수림왕 2) 진왕 부견이 순도를 보내서 불교를 전해 온 3년 뒤부터 국내성에 이불란사와 초문사를 지었으며, 392년(광개토왕 2)에는 평양에 9개 사찰을 지었다. 이후 497년(문자왕 6)에도 평양에 금강사를 짓고 영류왕과 보장왕 때에도 여러 사찰들을 지었다고 『삼국유사』에 전해진다.

<평양 청암리사지>   
중앙의 8각형 탑지를 중심으로 북, 동, 서쪽 등 3개의 금당지가 있다.

고구려 사찰들의 정확한 위치는 확실하지 않지만 대부분은 궁궐 근처였을 것이다. 그 중에서 확인 가능한 것은 청암리사지·정릉사지·원오리사지·상오리사지이다. 특히, 1938년에 발굴된 청암리사지는 497년 문자왕이 세운 금강사로 추정된다. 청암리사지는 일곽 중앙에 8각형 건물지가 있고, 그 북쪽과 동쪽, 서쪽에 하나씩 3개의 건물지가 둘러싸는 형상이다. 그래서 중앙의 8각형 건물지는 불탑, 북·동·서쪽의 세 건물지는 각기 중금당·동금당·서금당으로, 그리고 남쪽 건물지는 중문으로 추정된다. 일곽 가운데의 탑을 중심으로 3개의 금당이 둘러 싼 형상이어서 이를 ‘3금당 1탑식’ 배치형식으로 일컫기도 한다.

<평양 정릉사지>   
중앙의 8각탑지를 중심으로 동, 서, 북쪽에 금당이 있다. 뒤편으로 동명왕의 정릉이 보인다.[문화재청]

정릉사지는 청암리사지와 같은 배치형식으로 1974년에 발굴 조사되었다. 일곽의 동서 길이가 223m에 달하는 광대한 규모이다. 그 안에 회랑으로 둘러쳐진 5개의 구역이 형성되었는데, 중심 구역은 청암리사지에서와 같이 중앙의 8각형 불탑지 둘레로 북쪽에 큰 금당지와 동, 서쪽에 작은 금당지가 하나씩 있는 3금당 1탑식 배치형식이다. 정릉사지 뒷편에는 고구려 시조왕인 동명왕의 정릉이 위치한다. 그래서 장수왕이 정릉을 평양으로 옮겨오면서 세운 능침사찰로 추정하고 있다. 국가를 진호하고 왕실의 복을 빌며, 무덤을 수호하는 원당사찰의 건립 관행이 일찍부터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3금당 1탑식 배치는 백제의 군수리사지나 일본의 아스카지(飛鳥寺)의 터에서도 발견된다. 『일본서기』에는 588년 백제왕이 보낸 공장들이 아스카지를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평지 1탑식이라는 건축형식이 성립된 후 주변으로 퍼져나간 것이다.

백제에 불교가 전파된 것은 384년(침류왕 1) 호승 마라난타에 의해서였다.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신앙의 도입에 반대가 없었던지 이듬해부터 한산에 사찰을 짓기 시작했다. 공주와 부여로 천도한 뒤로도 도성 내에 많은 사찰들을 지었다. 541년(성왕 19)에는 양나라에서 공장과 화사를 초청하여 여러 사찰들을 장엄하게 지었다고 한다. 특히, 무왕(재위 600∼641년)은 부여 백마강 변에 왕흥사를 짓고 자주 배를 타고 가서 법회를 열었을 뿐 아니라 주변국들로부터 국가를 진호할 요량으로 호국사찰로서 익산에 미륵사를 건립했다. 워낙 큰 규모에다 장려하게 건립한 탓에 국력이 소진되어 국가패망을 재촉했다는 설도 있다.

<익산 미륵사지>   
品자형의 3원식 가람으로서 건물자와 함께 서탑과 근래에 이를 모방해서 새로 만든 동탑이 보인다.

백제의 사찰로서 오늘까지 존속하는 것은 없다. 다만, 익산 미륵사지와 부여의 정림사지, 2008년 발굴 조사된 왕흥사지, 금공리 금 강사지, 그리고 공주 대통사지와 서혈사지 등이 남아 있다. 이 밖에도 이름을 알 수 없는 부여 군수리사지 등이 있다. 백제의 가람제도는 고구려의 가람제도에서 발전된 평지 1탑식 배치형식이다. 남북 방향의 자오선을 따라 중문 → 1탑 → 금당 → 강당이 일렬로 서고, 중문 좌우에서 시작된 회랑이 강당 좌우까지 연결되어 좌우대칭의 장방형 일곽을 형성한다. 이러한 배치형식은 일제강점기에 처음 평지 1탑식으로 명명된 이래 지금까지 통용되고 있다.

<미륵사 가람 추정도>   
<미륵사지 가람배치도>   

미륵사는 신라 진평왕의 딸로 미모가 빼어난 선화공주를 아내로 맞아들인 백제 서동왕자가 나중에 왕(제30대 무왕)이 된 뒤에 이 왕비를 위해 용화산 아래 지었다고 전해져 왔다. 그러나 최근 서탑 해체 때 발굴된 금제사리봉안기에 의하면 백제 최고관직인 좌평의 딸이자 백제 무왕의 아내가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석탑 조성의 발원자인 왕후가 좌평 사택 적덕의 따님이라고 기록했기 때문인데, 그 내용을 둘러싸고 학자 간 의견이 아직까지 분분하다. 어떻든 『삼국유사』 백제 무왕조에는 산을 무너뜨려서 못을 메우고 그 위에 미륵삼존불상을 모실 불전과 탑, 회랑을 3곳에 세웠다고 했다. 1974년부터 시작된 발굴조사로 전체 가람은 중탑원·동탑 원·서탑원 등 세 탑원이 병렬해서 品자형을 이루며, 일곽 전면에 갈대가 우거진 습지가 남아 있는 것이 확인되었는데, 『삼국유사』의 기록과 일치한다.

세 탑원은 각기 1탑과 1금당씩을 갖췄는데, 그 중에서 중탑원에만 북회랑지가 있고 그 후방으로 강당지가 일직선으로 위치하고, 그 좌우와 배후에 대규모 승방지가 있는 1탑식 가람이다. 이후 16∼17세기에 폐사되어 농경지로 변하고 그나마 웅대한 모습을 유지하던 서탑도 절반 이상이 무너지게 되었다.

신라에 불교가 전파된 것은 눌지왕(재위 417∼458) 때로 아도(묵호자)가 고구려를 거쳐 처음 전해 왔다고 한다. 불교 도입에 대한 반대가 심했던 탓에 100여 년이 지난 시점인 527년(법흥왕 14)에 이차돈의 순교 덕택에 비로소 공인될 수 있었다. 그러나 공인 이후로는 불교신봉에 가장 열성적이었다.

<황룡사지>   
넓은 대지에 9층 목탑지를 중심으로 중금당과 동, 서금당, 경루, 종류, 회랑지 등이 보인다.[경주시청]

신라는 불교를 국가 운영원리로 채택함으로써 강력한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를 구축하였고 이에 따라 왕권 세력은 많은 사찰을 건립했다. 534년(법흥왕 21)에 착공된 흥륜사를 시작으로 영흥사·황 룡사·기원사·실제사·분황사·영묘사 등이 도성 안팎에 들어섰다. 신라 사찰들은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서 200여 년이나 늦었던 만큼 이미 확립되어 있던 평지 1탑식 배치를 따랐다. 『삼국유사』에는 선덕왕 때 백제에서 아비지라는 공장(工匠)을 청해서 황룡사 9층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그런 사정을 보여준다.

황룡사지는 불교가 신라에서 얼마나 융성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1238년(고종 25) 몽골 침입 때 불타 없어진 후 폐허로 있던 것을 1930년대 일본인 관학자 후지시마 가이지로오(藤島亥治郞)에 의해서 중문 → 목탑 → 금당 → 강당 순으로 남북 중심축에 일렬로 서는 평지1탑식으로 밝혀졌다. 그러다가 1976년부터 1983년 사이의 발굴조사에 의해서 553년(진흥왕 14)에 창건된 후 584년과 645년의 두 차례 중건으로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즉, 창건가람은 후지시마의 주장처럼 1탑식이었다가 이후 1차 중건 때 금당이 더 커졌다. 3차 중건 때는 금당 좌우에 동금당과 서금당이 새로 들어서고 9층 목탑이 새로 지어졌으며, 전면 좌우에 각기 경루와 종루가 추가되었다. 황룡사의 최종 중건가람은 고구려의 3금당 1탑식 배치형식으로 완성된 셈이다.

<황룡사 최종 가람배치도>   

황룡사 9층탑은 사방 7칸에 상륜부까지의 높이가 225척에 달했던 한국 최대의 목탑으로 위용을 자랑했지만, 지금은 초석만 남아 있다. 『삼국유사』에 실린 이 탑의 조탑연기(造塔緣起)는 당시 신라 지배층의 불교에 대한 인식을 잘 보여준다. 즉, 자장법사가 중국 오대산에 있을 때 나타난 문수보살이 “너희 국왕은 바로 천축 찰리종의 왕으로서 이미 불기를 받았기 때문에 동이공공의 종족과는 다르다.”하여 신라가 원래부터 부처의 땅임을 시사했다. 또한, 자장법사가 대화지를 지날 때 나타난 신인이 “황룡사의 호법왕은 나의 큰 아들이오. 범왕의 명령으로 그 절에 와서 보호하고 있으니 본국에 돌아가거든 절 안에 9층탑을 세우시오. 그러면 이웃 나라들은 항복할 것이며, 구한이 와서 조공하여 왕업이 길이 편안할 것이오.”라 했다. 신라가 원래부터 부처의 땅이라고 인식하는 불국토사상과 함께 허약해진 땅의 기운을 살린다는 비보사상이 일찍부터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신라의 황룡사와 백제의 미륵사에 세워졌던 목탑이나 석탑들은 모두 높이 200여 척을 넘는 거대한 규모였다. 왕경 어디에서나 그 찬란한 위용을 볼 수 있도록 장려하게 탑을 짓는 일은 자연환경의 극복을 위한 원시적 구축 행위와는 그 차원이 달랐다. 그것은 그 때 사람들에게는 전례없는 하나의 혁명이었다. 그것은 정치한 고안과 사려 깊은 계획 위에 고도의 공학적 기술력과 건축술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그 탑들은 그렇게 세워져서 이 땅이 부처의 세계가 되었음을 표상했다. 그것은 우리 건축사에서 최초의 혁명이자 위대한 도약이었다.

<황룡사 가람 복원 모형>   
[필자] 서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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