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3 정신세계의 통합공간 불교건축04. 법화사상과 가람제도

이불병좌와 두 개의 탑

신라는 삼국통일 후 9주 5소경을 설치하고 고도의 중앙집권체계를 확립해 갔다. 왕의 이름을 불교식으로 지을 정도로 왕실은 불교발전에 가장 큰 기여를 했던 최대 후원자였다. 무열왕(재위 654∼661)부터 혜공왕(재위 765∼780) 때까지의 신라 중대는 성골 왕통이 끝나고 무열왕계 왕통이 이어지던 전제왕권시대였다. 그 기간의 대규모 호국 사찰들은 모두 강력한 전제왕권의 주도하에 건립되었다.

그러나 8세기 말부터 국가기강이 해이해지면서 중앙귀족들 간의 권력투쟁이 치열해졌다. 왕권이 약화됨에 따라 중앙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됨으로써 지방에서는 군사력과 경제력을 갖추고 새로운 이념으로 무장한 유력 집단들이 속속 등장했다. 그 무렵 불교계를 주도하던 승려들도 대부분 왕족이나 귀족 출신이었다. 혜량과 자장 등은 국통이나 국사로 임명되어 불교계를 총괄했을 뿐 아니라 국정에도 깊이 관여했다. 이러한 고승들은 자신의 영험과 이적을 연기로 삼아 많은 사찰들을 지었다.

왕족이나 귀족들도 후원자에 머물지 않고 자신의 복을 비는 원당사찰을 짓는 경우가 많았다. 김유신은 재매부인이 죽자 청연에 장사지내고 그 어귀에 송화방이란 암자를 지었으며, 그 뒤에도 취선사를 지어 자신의 원당사찰로 삼았다. 681년 신문왕이 지은 감은사도 선왕 문무왕의 명복을 빌기 위한 원당사찰이었고, 성덕왕이 태종왕을 위해서 지은 봉덕사나 김대성이 지은 불국사도 같은 성격이었다. 국가에서도 원당전이란 관할 관청을 두어서 따로 관리했을 정도로 왕실과 귀족들의 원당사찰 경영이 성행했다. 왕권 중심의 중앙집권체제가 이완되는 것과 함께 다양한 개인 사찰들이 건립되기 시작했다.

<경주 사천왕사지 발굴 모습>   
평지2탑식으로 밀교의 문두루도량이 자주 열렸다. 근래 발굴에서 귀부 2구가 발견되어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 무렵 가장 크게 환영받은 불교사상은 법화경을 근거로 한 법화사상이었다. 법화경에서 진리는 단지 하나지만 중생들의 자질이 각기 다르므로 3가지로 설할 뿐 결국은 하나의 수레(一佛乘)에 실려진다고 했다. 3가지가 결국에는 하나로 귀결된다는 이러한 ‘회삼귀일(會三歸一)’ 사상은 불국토인 신라로 삼국이 통합되어야 한다는 당위성과 필연성의 근거가 되었다. 삼국통일을 주도했던 지배세력들 뿐 아니라 새로 등장한 귀족세력들도 법화사상을 정치이념으로 삼아서 각기 자신들의 기반을 다져 나갔다. 이른 바 이불병좌(二佛幷坐)의 사상이었다.

이불병좌란 법화경의 견보탑품에 나오는 내용에서 비롯된다. 석가불이 법화경을 설할 때 땅 밑에서 커다란 다보탑이 솟아올라 그 안에 앉아 있던 다보불이 나타나서는 석가불의 설법이 추호도 진리에 어긋남이 없음을 증명하고 찬양하면서 자기 자리의 반을 비켜서 나란히 앉게 했다는 내용이다. 이것은 7세기 이후의 불화나 불감, 마애석불 등에서 표현되며, 가람에서는 두 개의 탑을 배치하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이 그 대표적이며, 앞서 건립된 사천왕사지나 감은사지에서도 두 개의 탑이 만들어졌다. 다만, 두 사찰에서는 각기 같은 형상의 목탑과 석탑이 세워진 것이 불국사와 다르지만, 감은사지 두 탑의 사리장엄을 통해서 이불병좌사상에 근거했음을 확인한 최근 연구도 있다.

<사천왕사 배치도>   
<중국 남조 양대의 이불병좌 설법상>   

이불병좌사상이 평지 2탑식으로 구현된 점에서 엘리아데의 학설이 주목된다. 그에 의하면 시대가 하강할수록 종교 건축의 히에로파니는 반복과 세습을 통해서 구조화되는 동시에 단일의 히에로파니에서 복수의 히에로파니로 분화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본래적으로 갖던 탑의 신성은 유지되지만, 평지 1탑식 가람에서 1탑에 집중되던 신성이 평지 2탑식 가람에서는 2탑으로 분화된다는 식이다. 그래서 불교학계 일각에서는 종전까지 왕권으로 치환된 1탑에 추가해서 귀족세력으로 치환된 또 다른 1탑이 나란히 서는 현상을 8세기의 권력구도의 변화 때문으로 보기도 한다. 왕권과의 권력분점 의지를 키워 가던 신진세력에게 이불병좌사상은 자신들의 입장을 합리화하는 데 적합했고, 이것이 평지 2탑식 가람제도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어떻든 권력구도의 변화에서 가람제도를 파악한 흥미로운 주장임에 틀림이 없다.

[필자] 서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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