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5 왕권의 상징, 궁궐 건축04. 조선 왕조의 궁궐

창덕궁(昌德宮)

경복궁을 보조할 이궁으로 세워진 창덕궁의 창건 공사는 한양으로 환도할 것을 결정한 직후인 1404년(태종 5) 10월 6일에 향교동 응봉 자락 아래로 터를 정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궁조성도감(離宮造成都監)이 조직되고 도감의 우두머리인 제조(提調) 이직(李稷)의 설계와 감독, 수많은 장인·군인·승려·백성 등의 부역(賦役) 노동에 힘입어 착공된 지 1년만인 1405년 10월에 낙성되었다.

태종은 낙성되기 10여 일 전에 서둘러 개경으로부터 환도하여 영의정부사 조준(趙浚, 1346∼1405)의 집에 마물다가 10월 20일에 입궁하여 성대한 낙성 연회를 베풀었다. 이때 낙성된 건물은 왕 부부의 침전 일곽과 정전·편전 등 외전 일곽이었다. 신궁에서 펼쳐질 새로운 정치를 보좌할 관청들은 경복궁 앞에 지어져 있던 건물들을 수리하여 그대로 사용하기로 하였다. 1405년 8월에 관청 건물과 관원들의 주택을 수리하는 일에는 강원도와 충청도의 백성들이 동원되었다.

<창덕궁 인정전>   
<창덕궁 주합루>   
창덕궁 후원에 있는 왕실 도서를 보관하는 규장각 2층 열람실 건물이다.

외전(外殿) 74칸, 내전(內殿) 118칸 규모로 지어졌는데 정침청·동서 침전·수라간·사옹방·탕자세수간 등 내전을 비롯하여 편전·보평청·정전·승정원청 등이 있었다. 이후에 광연루·진선문·금천교·돈화문·집현전·장서각 등이 증설되었다. 성종 초에는 정희왕후가 창덕궁 안에 내불당(內佛堂)을 짓기도 하였다. 성종 6년(1475) 8월에는 궁문(宮門) 29개소에 서거정을 시켜 이름을 짓고 현판을 걸었는데, 이는 세조 8년(1462)에 궁역을 확장하면서 새로 쌓은 궁성에 낸 새 문에 이름을 부여한 것이다.

조선 전기에는 여러 임금이 창덕궁으로 옮겨 거처하면서 정치를 행하기도 하였다. 조선 전기 187년 간 이궁 역할을 다하였던 창덕궁은 경복궁·창경궁 등과 더불어 임진왜란 초기에 방화로 소실되었다. 전란이 끝난 뒤 국가 재건에 착수한 조정은 종묘와 궁궐을 빠른 시일 안에 복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선조 38년(1605)에 시작된 복구공사는 경복궁 중건을 목표로 진행되었으나, 선조 39년에 이국필(李國弼)이 경복궁은 불길하니 창덕궁을 중수해야 한다고 건의한 것을 계기로 선조 40년 2월에 경복궁의 길흉화복을 적은 역대의 문서를 검토한 다음, 공사는 창덕궁 중건으로 바뀌었다. 규모가 큰 경복궁을 재건하기에는 재원과 인력이 모두 부족한 전란 직후의 형편을 고려한 결정이었다.

선조 41년(1608) 정월 전후에 시작된 창덕궁 중건 공사는 두 차례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광해군이 즉위한 해(1608) 10월에 완료된 1차 공사에서는 중요 전각이 대체로 조성되었다. 다음에 선조의 위패를 종묘에 올려 모신 직후인 1610년 봄에 재개된 2차 중건 공사에서는 앞서 마무리하지 못했던 여러 관청과 창고 등을 짓거나 담장을 쌓고 전돌을 포장하는 일을 1610년 9월에 이르러 마쳤다.

반정(反正)의 소용돌이 속에서 왕위에 오른 인조는 창덕궁이나 창경궁의 계속된 화재로 재위 10여 년 동안 경운궁이나 경덕궁에 거처하였다. 창덕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여 재위 10년에는 일시적으로 창덕궁에 거처하기도 하였으나 말년인 재위 25년에 이르러서야 창덕궁의 중건을 완료할 수 있었다. 인조는 후원 경영에 몰두하여 재위 14년(1636)부터 25년(1647)에 걸쳐 끊임없이 정자를 짓고 원림을 조성하였다. 즉, 1636년(인조 14)에 탄서정(歎逝亭, 逍遙亭으로 개명), 운영정(雲影亭, 太極亭으로 개명), 청의정과 옥류천(玉流川), 1640년에 취규정(聚奎亭), 1642년에 취미정(翠微亭, 현종 5년 개수하고 觀德亭으로 고침), 1643년에 죽정(竹亭, 深秋亭으로 개명), 1644년에 육면정(六面亭, 尊德亭으로 이름 지음), 벽하정(碧荷亭, 숙종 때 淸讌閣으로 고침), 1645년에 취향정(醉香亭, 숙종 16년에 喜雨亭으로 개칭), 1646년에 팔각정, 1647년에 취승정(聚勝亭, 樂民亭으로 개명), 관풍각(觀豊閣) 등을 차례로 조성하였다.

<옥류천>   
창덕궁 후원에 있는 곳으로 근처에 소요정 등 정자가 있다.
<소요정>   
창덕궁 후원에 있는 정자이다.

인조가 창덕궁 후원 경영에 몰두한 것은 병자호란으로 입은 치욕과 복잡한 심사를 달래기 위해서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후대의 왕들도 인조가 경영한 원림에 와서 만기(萬機)를 다스리는 여가에 샘물과 흐르는 물을 보고 마음을 함양하면서 인조의 원림(園林) 조성에 감사하는 마음을 표시하기도 하였다.

숙종대에는 세자가 서연(書筵)을 받는 성정각(誠正閣)이 지어지고 왕 14년에 천문관측소인 제정각(齊政閣)이 새로 지어졌다. 후원에는 왕 18년에 영화당 일곽과 애련정 일곽이 조성되고, 왕 33년에는 애련정 북쪽에 척뇌당(滌惱堂)이 건립되어 현종대에 경영된 어수당 일곽의 원림이 완결되었다. 또 동왕 14년에는 청심정(淸心亭), 17년에는 능허정(凌虛亭)을 차례로 지었다. 숙종대의 원림 조성을 끝으로 창덕궁 후원은 주합루 구역을 제외하고는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 숙종 30년(1704)에는 궁성 서북쪽 밖에 있던 별영대(別隊營)의 창고를 헐고 임진왜란 때 대군을 파견하여 도와준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신종을 향사(享祀)하기 위하여 대보단(大報壇)을 건설하기도 하였다.

영조대에는 재위 30년(1754)의 선원전 수리와 46년의 경봉각 건립 말고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영조가 재위 기간 대부분을 경희궁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조대에는 즉위년에 후원 안 영화당 옆에 규장각과 서향각을 짓고, 재위 5년(1781)에는 규장각 학사들의 숙직처인 이문원을 도총부 자리에 설치하였다. 숙종대에 궁궐 밖 종부시에 있었던 규장각을 궁궐 안으로 끌어들여 우문정치(右文政治)를 표방하며 왕권강화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동왕 9년에는 이문원 근처에 서적 보관처인 동이루(東二樓)를 새로 지었다.

정조 6년(1782)에는 고대하던 장남(文孝世子)을 얻은 것을 계기로 동궁이 신하들로부터 하례를 받거나 그들을 접견하는 장소로 중희당(重熙堂)을 창건하였다. 이어 19년에는 선원전이나 대보단을 전배(展拜)할 때 왕이 머무르며 재계하던 어재실(御齋室)인 대유재(大酉齋)와 소유재(小酉齋)를 창건하였다.

1833년에 영춘헌을 짓기 위하여 헐린 천지장남궁(天地長男宮)은 세자의 거처로 중희당 바로 옆에 있었고, 이는 「동궐도(東闕圖)」에 표현되어 있다. 중희당 일대는 창덕궁과 창경궁의 경계 지역이면서 순조대에 효명세자가 거처하고 공부하던 곳으로서 대리청정(代理聽政)의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익종은 창덕궁 안에 관물헌(觀物軒)·대종헌(待鍾軒)·연경당(演慶堂)·의두합(倚斗閤) 일곽·전사(田舍) 등 많은 시설을 경영하였다. 특히, 후원의 의두합은 대리청정 시기에 독서처로 창건한 것이고, 연경당의 경우는 1828년에 진장각(珍藏閣) 옛터에 진연 장소로 사용하려고 특별히 창건한 건물이다. 당시 연경당의 모습은 「동궐도」와 『자경전진작정례의궤(慈經殿進爵整禮儀軌)』(1828)의 도설(圖說) 연경당도(演慶堂圖)에 잘 묘사되어 있는데, 주택 형식의 현존 연경당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1833년의 화재로 창덕궁의 내전 일곽 대부분이 불에 탔다. 『궁궐지』에서는 “모두 370여 칸이 중건되었으며 옛 유구를 토대로 하되 간가(間架)를 바꾸지 않고 그대로 복원하였다.”고 적고 있다. 이때 중건된 건물은 대조전·희정당·징광루·경훈각·옥화당·융경 헌·흥복헌·양심합·극수재·정묵당·내소주방·외소주방 등이었다. 소실 이후에 재건된 건물 대부분이 오늘날 남아있는 건물이다. 이 시기의 재건 공사에 대해서는 보고서에 해당하는 『창덕궁영건도감의궤(昌德宮營建都監儀軌)』가 전한다. 또 불타기 직전에 창덕궁 전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도록 그린 「동궐도」가 남아 있어서 당시 궁궐의 모습을 실감나게 전해 준다.

<창덕궁 대조전>   
내전을 겸한 침전이다.

1907년부터 1928년까지 조선 왕조의 마지막 임금인 순종황제가 거처하였지만, 순종 사후에 일제침략자들은 인정전 일곽과 1920년대에 재건한 대조전 일곽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건물을 헐어버렸다.

현재 창덕궁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은 광해군 때 재건된 돈화문이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돈화문(敦化門, 1607), 인정전(仁政殿, 1804), 인정문(仁政門, 1745), 선정전(宣政殿, 1647), 대조전(大造殿)·희정당(熙政堂)·함원전(含元殿)·경훈각(景薰閣, 이상은 1920년에 경복궁 내전을 옮겨와서 새로 지은 것), 가정당(嘉靖堂, 1920년에 덕수궁 가정당을 옮 김), 빈청(賓廳, 현 御車庫), 성정각(誠正閣, 정조 연간), 내의원(內醫院, 성정각 부속건물로 1920년 무렵부터 내의원으로 사용됨), 관물헌(觀物軒, 1820년대 후반), 구선원전(舊璿源殿, 1695), 낙선재(樂善齋, 1847), 취운정(翠雲亭, 1686), 한정당(閒靜堂, 1917년 이후), 상량정·만월문·승화루(承華樓)·삼삼와(三三窩)·칠분서(七分序, 모두 정조 연간), 신선원전(新璿源殿, 1921), 의로전(懿老殿, 1921년 덕수궁에서 옮김) 등이다.

<돈화문>   
[필자] 이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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