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1. 중앙통치조직

3) 화백회의

 위에서 보았던 것처럼 신라에서 행정관부와 관원조직이 제대로 갖추어지는 것은 진덕왕대였다. 그런데 행정조직이 미발달한 상황에서는 국가 경영의 기본적인 사항들이 회의체를 통하여 결정·집행되었다. 이 회의체는 행정관부가 설치되기 이전 그와 같은 기능과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행정관부가 설치되고 그 관원조직이 갖추어짐에 반비례하여 회의체가 가지는 역할이나 기능은 점차적으로 축소되어 갔다.

 회의체를 통한 결정과 집행에 대한 일단의 윤곽은 앞서 언급하였듯이<냉수리비>와<봉평비>에서 짐작된다. 이들 비문에 의하면 어떠한 사안이 발생하였을 때 회의체를 통하여 결정하고 실행하였는데, 관료들은 회의체에 참여하여 결정하는 층과 결정사항을 집행하는 실무자층으로 크게 나뉘어져 있었다.<냉수리비>에서는 七王等이 회의참여자였고 실무자들은 7인의 典事人이었다.<봉평비>에서는 14인의 所敎事층이 회의참여자였고 4인의 大人이 바로 실무자들이었다. 이처럼 크고 작은 일들이 회의체를 통해서 공동으로 결정되고 공동으로 집행되는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合坐制度는 고대사회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적인 것으로서 부여나 고구려에서는 諸加會議,NaN) 백제에서는 諸率會議라 불리는NaN) 회의체가 존재하였다. 신라의 귀족회의체는≪唐書≫新羅傳에 근거하여 흔히 화백회의라 불린다. 이에 따르면 어떤 사안에 대해서 한 사람이라도 반대하면 논의가 성사되지 못하는 만장일치제적인 방법이 채택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신라 화백회의의 기원은 원시공동체사회의 씨족회의나 부족회의까지 소급이 가능하다. 국가가 성립된 후에도 참가자의 범위나 논의내용 등은 달라졌겠지만 회의체는 여전히 유력한 논의구조로서 존속하였다. 신라에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시조인 赫居世居西干을 맞아들이는 모습이나NaN) 婆娑尼師今 23년(102) 音汁伐國과 悉直谷國 사이에 영토분쟁이 발생하였을 때 이를 해결하기 위해 왕을 비롯한 유력세력들이 모여서 논의하는 사례에서NaN) 그와 같은 회의체의 시원적인 편린이 찾아진다. 이후 沾解尼師今 3년(249)에 政廳인 南堂(혹은 都堂)이 설치되었다고 하는데NaN) 이곳에서 회의가 열렸을 것으로 상정하여 당시 존재한 회의체를 南堂會議라 부르기도 한다.NaN) 아마도 남당의 설치는 그 전까지 존재하여 왔던 어떤 회의체가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여하튼 회의체는 원시공동체사회 이래로 내용상의 변화를 거치면서도 계속하여 존속되어 온 것임은 확실하다.

 訥祗麻立干代에 행해진 회의에서 남당회의와 같은 회의체의 운영실태에 대한 약간의 구체적인 내용을 엿볼 수 있다. 눌지마립간은 즉위하자마자 實聖麻立干에 의해 고구려와 倭에 각각 볼모로 보낸 아우들인 卜好와 未斯欣을 귀국시키기 위한 목적을 띤 회의를 소집하였다. 이 회의에서의 결정에 따라 朴堤上이 선임되어 복호와 미사흔을 구출하였다는 이야기는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이에 근거하여 보면 일단 회의를 소집하고 주재한 자는 바로 국왕이었음이 확인된다. 그런데 회의에 참가한 대상은 群臣과 國中豪俠으로서NaN) 실제 중앙의 臣僚들뿐만 아니라 水酒村干·一利村干·利伊村干 등과 같이 참여한 유력한 재지세력들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보이므로NaN) 그 범위는 확실하게 알 수 있다.

 볼모의 탈출이란 국가간의 외교적 군사적인 마찰을 야기시킬 수 있는 커다란 문제였던 만큼 그 회의의 참여 범위가 왕경의 유력자들에 한정되지 않고 재지세력에까지 확대된 것으로 보이지만 여하튼 이 시기까지는 재지세력에게도 사안에 따라 중앙에서 주최하는 회의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었다고 보아야 하겠다. 다만 이 회의에 참가할 수 있는 대상은 왕경인이거나 지방민이거나 간에 干이라 칭할 수 있는 유력세력에 한정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이 회의체를 諸干會議라고 불러도 무방하겠다.NaN) 왕호가 마립간이라 불리웠던 것도 바로 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말하자면 宗干 또는 頭干으로서의 마립간은 단지 왕경의 干층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지방의 간층들도 염두에 둔 왕호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회의체의 모습을 보다 구체적으로 확인해 볼 수 있는 것은 6세기의 금석문을 통해서이다.

 지증왕 4년(503)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는<냉수리비>에는 珍而麻村 출신의 節居利란 인물에 귀속된 財(物)에 대한 소유권분쟁이 발생하자 至都盧葛文王을 비롯한 ‘七王等이 共論하여’ 그를 결정하고 집행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共論」이란 단독으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 이들 7인이 함께 모여서 의논하여 결정하였음을 뜻하므로 어떤 회의체의 존재가 상정된다. 절거리의 재를 둘러싼 소유권 분쟁은 이번에 처음 일어났던 것이 아니라 비문의 첫머리에 보이듯이 이미 斳夫智王과 乃智王NaN)대에도 그와 똑같은 일이 있었다. 비문의 내용으로 보아 그 때에는 왕이 敎를 발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렇게 기재되었어도 국왕이 단독으로 그 사안을 결정하였을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아마 당시에도 역시 왕이 회의를 주재하고 그 곳에서 결정된 결과를 王의 교로서 내리는 형태를 취하였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겠다. 이번 문제에서 葛文王이 회의를 주재한 것은 당시의 특수한 사정에서 기인하는 것으로NaN) 일반적인 관행은 아니라 생각되며 원래는 왕이 회의주재자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여하튼<냉수리비>에서 어떤 사안이 회의체를 통해서 결정되고 집행되는 과정의 일단이 확인된다. 그런데 논의된 대상은 달랐지만 유사한 모습은<봉평비>에서도 보인다.

 <봉평비>는 오늘날 울진지역인 居伐牟羅 男彌只村에서 大軍을 동원하여야 할 어떤 중대한 사건이 발생한 뒤 이를 처리하여 관련책임자를 처벌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데 국왕인 寐錦王과 葛文王을 비롯하여 本彼部·岑喙部(牟梁部)의 干支 등 14인이 주어진 사안에 대한 敎를 내리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14인이 함께 교를 발한다는 것은, 곧 이들이 적어도 외형상 동등한 자격을 갖고 그 결정에 공동으로 참여하였음을 뜻한다. 이를 통해 바로 국왕을 주재자로 하는 회의체의 존재를 상정할 수 있겠다. 이와 같은 구조는 사안의 내용이나 참가자의 인원과 관등의 차이를 논외로 한다면<냉수리비>와 거의 유사하다. 그렇다면 이 점은 일단 회의체의 종류나 그 참여자격의 변화 문제와 관련하여 주목되어야 할 사실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회의체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실태는<진흥왕 순수비>에서 확인된다.

 진흥왕 22년(561)에 건립된<昌寧碑>를 비롯한<北漢山碑>·<黃草嶺碑>·<磨雲嶺碑>등 4기의<진흥왕 순수비>에는 각각 대등이란 직명을 가진 인물이 적게는 5, 6명에서 많게는 20여 명까지 보인다. 이들이 소지한 관등은 大一伐干(大角干)으로부터 11등인 나마까지이다. 550년 무렵의 것으로 추정되는<丹陽 新羅 赤城碑>에 伊史夫智 이하 5명이 소지한 직명으로 大衆等이 보이는데 이것을 바로 대등과 같은 것으로 보는 견해도NaN) 있다. 이 대등은 중앙관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면서도 특정한 임무를 분장하는 관부에는 소속되지 않았는데 이들이 바로 귀족회의인 화백회의의 구성원이라 한다.NaN) 때문에 이 시기 귀족회의를 大等會議라고 부르는 견해도NaN) 제기되어 있다.

 한편 7세기 중엽의 진덕왕대에도 閼川公·林宗公·述宗公·虎(武)林公·廉長公·庾信公 등 6인의 大臣들이 참여한 회의체의 존재가 확인된다. 이들은 南山의 亏知巖을 비롯하여 靑松山·皮田·金剛山 등 이른바 4靈地에서 국가의 大事를 논의하였다고 한다.NaN) 이 회의의 참여자는 대신들만으로 한정되어 있으므로 귀족회의로서의 화백회의가 특권화된 것으로 인식되기도 하나NaN) 여하튼 귀족회의의 한 실태를 보여 주는 것은 틀림없다.

 이상에서 언급하였듯이 5세기에서 7세기에 걸쳐≪삼국사기≫·≪삼국유사≫등의 문헌뿐만 아니라 금석문상에서도 귀족회의체의 존재가 확인된다. 이후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도 귀족회의가 존재하였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귀족회의는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라 참여자의 범위나 구조, 그 기능 등에서 상당한 변화를 겪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행정조직이 갖추어져 가면서 어떤 사안의 결정이나 집행은 각 행정부서 단위로 행해졌을 것이며 따라서 회의체의 위상은 달라지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참여 범위도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변화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앞서 회의체에 대해서 제시한 몇 가지 사례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회의참여자의 범위나 규모가 일정하지 않았던 점은 주목된다. 가령 눌지왕대의 사례처럼 회의 참여자가 군신과 국중호협 등으로 그 폭이 지극히 넓었던 경우도 있는 반면,<냉수리비>나<봉평비>에서처럼 갈문왕 이하 7인 또는 매금왕 이하 14인에 불과한 경우도 있었고 심지어 진덕왕대에는 6인의 대신만으로 한정된 사례도 있었다. 이처럼 회의체의 규모가 달랐던 것은 사안에 따라 참여자의 구성을 달리하는 다수의 회의체가 동시에 존재하였음을 뜻한다.

 일반적으로 화백회의라 불리는 단일한 귀족회의를 상정하여 두고 그 곳에서는 국가의 중대사가 논의·결정된 것으로 이해하여 왔다. 국가의 중대사란 대외적인 전쟁을 위한 선전포고나 불교수용, 정당한 왕위계승권자가 없을 경우 국왕추대나 혹은 폐위 등을 일컫는다. 예컨대 법흥왕대에 불교수용 문제가 논란되었을 때 국왕이 ‘群臣을 불러 물었다’고NaN) 한 것은 광범위한 신료들이 참여하는 귀족회의의 존재를NaN) 보여 준다는 것이다. 眞智王이 재위 4년 만에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國人 등이 그를 폐위시켰다는 것도NaN) 바로 그와 같은 귀족회의를 통해서였을 것임은 충분히 납득이 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이해에는 지나치게 막연한 측면이 엿보인다. 왜냐하면<냉수리비>에 보이는 절거리의 財에 대한 소유권 문제는 국가의 중대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회의를 통하여 과거의 판례에 따른 典據를 바탕으로 하여 소유권의 향방이 결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안에 대해서까지 참여자의 폭이 넓은 귀족회의체를 통하여 결정되었을 리가 없다. 그러므로 단일한 귀족회의의 존재를 설정하여 그 곳에서 모든 국가 중대사가 결정되었다고 하여서는 곤란하다. 참여자의 범위를 달리하는 다양한 규모의 귀족회의체가 존재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를테면 대내외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는 국중대사를 논의하기 위해 신료들이 참여하는 대규모의 회의체도 있었고, 그와는 달리 보다 구체적이고 특정한 일들을 처리하기 위한 소규모의 회의체도 넓은 의미의 귀족회의 속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대등으로 구성된 화백회의 속에는 다시 다양한 소회의체가 존재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참여자의 인원이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도 그 때문이라 생각된다. 이 소수가 참여하는 귀족회의체는 관부가 성립되기 이전의 정치 운영실태를 반영한다고 생각된다. 화백회의뿐만 아니라 이 다양한 소회의체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된 직명이 바로 대등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마도 시기가 거슬러 올라갈수록 회의체는 단순하여 크게 세분화되지 않았을 것이지만 신라국가의 발전과정에서 행정적으로 처리해야 할 일들이 점차 많아지고 또 다양해지면서 보다 소규모의 구체적인 일들을 다루는 소회의체의 출현은 불가피하였을 것이다.<냉수리비>에서 7인이 참여한「共論」은 바로 폭넓게 참여하는 귀족회의와는 별도의 소회의체가 존재하였음을 여실히 보여 준다. 그러나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적인 지배체제의 강화과정 속에서 그와 같은 소회의체조차도 그 기능은 한계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고 이로 말미암아 그것은 점차 행정기구로 대체되어 갔을 것이다.

 소회의체가 가진 기능은 행정기구가 설치되면서 이곳으로 이관되고 이제는 국가의 특정한 중대사만을 다루는 본래적인 의미의 귀족회의만 남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귀족회의라고 할 때 광범위하게 참여하는 대규모 귀족회의체만을 연상하여 왔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6세기 후반의 실태를 전하는 것으로 보이는≪隋書≫新羅傳에 “大事가 있으면 群官을 모아 詳議하여 결정한다”고 한 것은 바로 그를 말한다.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기 위해서 열린 群官會議가 소수의 참여자로 구성되었을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런데 앞서 소개한 7세기 중반의 진덕왕대에 보이는 소위 대신회의는 소수만이 참여하고 있어 주목해 볼 만하다.

 이 회의체는 대사를 논의하여 결정하는 데 참여자 수가 6인에 지나지 않았고 그것도 大臣에 한정되어 있었다. 대신의 구체적인 자격은 알 수 없으나 귀족회의의 성원을 지칭하는 대등이 곧 臣과 같은 의미인 것으로NaN) 미루어 짐작하면 대신은 대등이면서도 그들과는 구별되는 존재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들 대신만이 참여하는 대신회의는 귀족회의 내부의 소회의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소회의체에서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였다는 것은 기왕의 이해와 맞지 않는다. 그런 까닭으로 이 대신회의는 귀족회의의 구성원이 대등에서 대신으로 바뀐 것으로 보고 회의의 성격도 특권화한 것으로 보기도 하였다.NaN)

 그러나 이 이후에도 대등이 계속 존재한 것으로NaN) 미루어 보면 귀족회의의 구성원이 대등에서 대신으로 바뀐 것이 아니라 대신회의가 귀족회의와는 별도로 존재하였다고 해야 한다. 그렇다면≪수서≫에서는 국가의 중대사가 군관들이 참여한 회의에서 결정되었다고 하였는데, 왜 진덕왕대에는 대신회의가 그러한 기능을 담당하게 되었는가는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앞서 언급하였던 것처럼 선덕왕대에 전혀 정치제도적인 개혁이 행해진 바가 없었다는 것과 관련지어 보면 선덕왕이 여자로서 즉위하게 되는 정치적 사정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진평왕 사후 신라사 최초로 여왕의 즉위문제를 둘러싸고 지지파와 반대파 사이에 논란이 있었으며 그 결과 이들 두 세력간에 이루어진 타협의 산물이 바로 대신 중심의 회의체 출현이었다.NaN) 말하자면 서로 갈등하는 양대세력의 견제와 균형 위에서 대신회의가 국가의 중대한 일들을 결정하였던 것이다. 선덕왕대에만 유독 행정관부의 설치와 같은 개편이 없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대신회의 중심의 체제는 진덕여왕 원년(647)에 발발한 비담의 난으로 무너졌다. 이 대신회의가 진덕왕대에도 여전히 존재는 하고 있었으나 유명무실해졌던 것이다. 그것은 閼川이 상대등으로서 대신회의의 주재자였지만 대신들은 오히려 당시 실력자였던 김유신에게 복종하였던 데에서 알 수가 있다.NaN) 요컨대 귀족회의는 존재하였으나 선덕왕대에는 여왕의 즉위라는 특수한 사정으로 그 속에서 소수의 대신만이 참여하여 중대사를 결정하는 대신회의가 두어졌다. 그러나 이것도 진덕왕의 즉위 후 김춘추·김유신 일파가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면서 형식만이 남았을 따름이었다. 다수의 대등이 참여하는 귀족회의는 계속하여 존속하였지만 정치적 사정에 따라서 그 기능이 한결같지는 않았다.

 귀족회의의 주재자는 원래 국왕이었지만 법흥왕 18년(531)에는 상대등을 새로이 설치하여 哲夫를 임명함으로써 그를 대신하게 하였던 듯하다.NaN) 그러나 철부의 사망 후 후임자가 계속적으로 임명되지 않았던 것으로 미루어 보면 아직 중고기에는 상대등이 귀족회의의 상설적인 주재자로 정착되지 못하였던 것이 아닐까 싶다. 상대등은 오히려 국왕을 보좌하여 행정을 총관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던 듯하다. 상대등이 대등회의의 주재자로 정착하는 것은 정작 중고기 말엽에 와서의 일이다. 따라서 회의체를 통하여 중대한 일이 결정되던 시기에 실질적인 주재자는 국왕이었고 그를 대행하는 역할을 상대등이 담당하였다고 생각된다. 아마도 중고기의 상대등은 중대 이후의 시중과 마찬가지로 행정적인 임무도 총관하는 기능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화백회의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은 어떠하였을까. 5세기까지는 눌지마립간대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재지세력 가운데 극히 한정된 유력자층들도 중대한 일들을 결정하는 회의에 참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6세기 이후 관등제와 골품제의 성립 등을 통하여 중앙집권적인 지배체제가 마련되어 가면서 재지세력들이 참여한 흔적이 전혀 없는 것으로 미루어 보면 그들은 일단 배제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6세기 초에 귀족회의에는 왕경인이라 하더라도 회의 참여자는 관등상으로 볼 때 干群을 칭하는 세력들에 한정되었던 듯하다. 그것은<냉수리비>에서 알 수 있듯이 회의 참여자층은 간군으로 실무자들이 나마를 칭하는 것과 뚜렷하게 구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봉평비>나 이후의<창녕비>등에 의하면 회의 참여자층인 대등이 소지한 관등은 나마까지로 되어 있다. 이는 법흥왕 7년(520) 율령이 반포되고 골품제와 관등제가 법제화되면서 그에 따라 나타난 변화가 아닐까 싶다. 그런데 나마는 골품제상으로 보면 대체적으로 5두품에까지 개방된 관등으로 이해하고 있으므로 관등만 한정할 때 그들에게도 귀족회의 참여자격이 개방된 듯하나 이들은 간군 경위를 소지할 수 없었으므로 諸干會議의 전통을 계승한 귀족회의에의 참여가 배제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관등상으로는 나마에까지 귀족회의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었지만 일단 6두품 이상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기왕에 귀족회의 참여자격을 신분제상으로 진골에만 한정되었다고 보는 견해와NaN) 6두품까지로 보는 견해로NaN) 나뉘어져 있다. 원래 6두품과 진골은 모두가 대소의 차이는 있지만 族長 출신으로서 그 기반이 같았다는 점, 그 까닭으로 모두가 간군 관등을 소지하였다는 점, 중고기를 통하여 이들은 모두 동등하게 신분을 상징하는 牙笏을 소지할 수 있었다는 점 등에서 양자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는 없었다. 따라서 귀족회의 참여자격은 골품제 성립 후 6두품에까지 부여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리라 생각된다.NaN) 다만 진골에게는 관등이 낮아도 참여자격이 부여된 반면 6두품에게는 진골에 비해 높은 관등을 요구하였던 점에서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귀족회의는 넓은 의미의 회의체와 좁은 의미의 회의체가 존재하였는데 좁은 의미의 회의체는 점차 행정관부가 설치되면서 그 속으로 흡수되어 갔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귀족회의라고 하면 다수의 대등들이 참여하는 넓은 의미의 회의체만을 지칭하게 되었다. 이 귀족회의체의 구성원인 대등은 관등상으로는 나마 이상, 신분상으로는 진골과 6두품에 한정되었다. 이 귀족회의체는 신라 말까지 변함없이 존속하면서 국가의 중대사를 다루었지만 그 기능은 한결같지가 않았다. 국왕 중심의 체제가 미약한 경우는 상당한 기능을 행사하였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유명무실하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필자]
NaN)盧重國,<高句麗國相考> 上(≪韓國學報≫16, 1979), 20∼24쪽 참조.
NaN)盧重國,≪百濟政治史硏究≫(一潮閣, 1988), 103∼107쪽.
NaN)≪三國史記≫권 1, 新羅本紀 1, 시조 혁거세거서간
≪三國遺事≫권 1, 紀異 2, 신라시조 혁거세왕.
NaN)≪三國史記≫권 1, 新羅本紀 1, 파사니사금 23년.
NaN)≪三國史記≫권 2, 新羅本紀 2, 첨해니사금 3년조에는 이 해에 남당이 설치되고 5년(251)에는 처음으로 정사를 이곳에서 보았다고 한다. 이 연대는 물론 그대로 믿기는 어렵지만 대체적인 회의체의 존재는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3년에 설치하고 5년에 처음으로 정사를 보았다는 것으로 보면 회의 자체가 자주 열리지는 않았던 것 같다.
NaN)李丙燾, 앞의 책, 623∼636쪽.
李鍾旭,≪新羅國家形成史硏究≫(一潮閣, 1982), 212∼221쪽.
NaN)≪三國遺事≫권 1, 紀異 2, 奈勿王 金堤上.
NaN)≪三國史記≫권 45, 列傳 5, 朴堤上.
NaN)朱甫暾,<三國時代의 貴族과 身分制-新羅를 中心으로->(≪韓國社會發展史論≫, 一潮閣, 1992), 28쪽.
NaN)다른 견해들도 있지만 斳夫智王을 實聖王, 乃智王을 訥祗王에 비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NaN)鄭求福,<迎日冷水里新羅碑의 金石學的 考察>(≪韓國古代史硏究≫3, 1990), 42∼43쪽.
朱甫暾,<迎日冷水里新羅碑에 대한 基礎的 檢討>(≪新羅文化≫6, 1989), 71∼73쪽.
NaN)李基白,<丹陽赤城碑發見의 意義와 赤城碑 王敎事部分의 檢討>(≪史學志≫12, 1978), 26쪽.
NaN)李基白,<大等考>(≪歷史學報≫17·18, 1962; 앞의 책, 78쪽).
NaN)李鍾旭, 앞의 책, 219쪽.
NaN)≪三國遺事≫권 1, 紀異 2, 眞德王.
NaN)李基白, 앞의 책, 80∼82쪽 참조.
NaN)≪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법흥왕 15년.
NaN)李基白, 앞의 책, 79쪽.
NaN)≪三國遺事≫권 1, 紀異 2, 桃花女 鼻刑郞.
NaN)≪三國史記≫권 38, 志 7, 職官 上, 上大等 및 권 40, 志 9, 職官 下, 外官.
NaN)李基白, 앞의 책, 80∼82쪽.
NaN)≪三國史記≫권 33, 志 2, 色服.
NaN)이에 대한 자세한 검토는 朱甫暾,<毗曇의 亂과 善德王代의 政治運營>(≪李基白先生古稀紀念 韓國史學論叢≫, 一潮閣, 1994)에서 시도된 바 있다.
NaN)대신회의가 진행중일 때 호랑이가 회의장에 뛰어들었는데 諸公은 놀라서 일어났으나 상대등인 閼川은 태연히 談笑하면서 그 꼬리를 잡고 땅에 쳐서 죽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제공들은 김유신에게 복종하였다는 것이다. 이 설화는 알천이 형식적으로는 회의주재자였지만 실권은 김유신에게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으로서 대신회의가 그 자체 변질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이미 김춘추·김유신 일파가 실권을 장악한 진덕왕대의 대신회의가 형식적으로는 대사를 논의하지만 유명무실화 되었던 사실을 그대로 드러내 준다.
NaN)李基白,<上大等考>(≪歷史學報≫19, 1962; 앞의 책, 94쪽).
NaN)今西龍,<新羅骨品考>(≪新羅史硏究≫, 近澤書店, 1933), 223쪽.
李基白, 앞의 책, 85∼86쪽.
李基東,<新羅 奈勿王系의 血緣意識>(≪歷史學報≫53·54, 1972; 앞의 책, 84쪽).
이기동은 진골 가운데서도 奈勿王系 혈연집단으로 축소시켜 이해하였다.
NaN)李丙燾, 앞의 책, 636∼638쪽.
NaN)朱甫暾, 앞의 글(1992), 32∼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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