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Ⅳ. 예술

1. 음악

 태조 이성계(1335∼1408)가 왕위에 오름으로써 1392년에 시작된 조선왕조는 고려 후기부터 새로 등장한 신흥사대부에 의해 건국되었다. 조선왕조의 개국공신들은 모두 신흥사대부 출신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새 왕조의 건국과 함께 유교적 정치이념을 실천하려고 노력했고, 따라서 禮樂사상에 의한 아악부흥의 노력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므로 조선 초기 음악사의 시대적 특징은 아악부흥이라는 특징에 의해서 규정될 수 있고, 조선 초기를 아악부흥시대라고 부를 수 있다.

 건국 직후의 정치적 혼란이 안정되자, 새 문화창조의 움직임이 활발히 전개되었고, 따라서 음악문화의 꽃이 만발하게 되었으니, 그 때가 바로 세종대였다. 세종 이후 세조와 성종에 이르는 동안의 음악적 업적은 일단≪樂學軌範≫에 정리되었다. 조선 초기의 음악문화는 고려의 향악·당악·아악 등을 전승한 바탕 위에 새로운 음악문화를 창제함으로써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발전시킨 결과였다. 조선 초기에는 왕립음악기관의 정비, 새 율관제작과 악기제조, 아악부흥, 새 기보법 창안, 당악정재와 향악정재의 창제, 새 향악곡의 창제, 악보와 악서편찬 등이 이루어졌다.

 아악의 부흥은 새 왕조의 정치적 지배세력들이 유교적 정치이념을 구현하기 위해 예악사상에 의해 통치하려고 노력한 성과였다. 비록 아악부흥이 중국문헌을 바탕으로 이루어졌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조선초 유신들이 새롭게 복원시킨 재창조의 성과, 곧 외래음악문화를 자주적으로 수용한 결과였다. 이런 아악부흥의 과정에서 아악은 왕립음악기관의 左坊에 소속되었고, 고려 때 좌방에 소속되었던 당악은 右坊의 향악과 함께 통합되었다. 우리가 조선 초기를 아악부흥시대라고 불러야 하는 당위성을 바로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이렇듯 조선 초기에 이르러 아악의 위치가 높아짐에 따라 당악이 우방의 향악과 통합됨으로써, 당악의 향악화가 촉진되었다.

 정간보를 위시하여 오음악보와 합자보 등의 새 기보법 창안은 한국음악사의 발전과정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새 기보법들은 당시의 향악·당악·아악·고취악 등과 같은 음악의 실상을 후대에 남겨주는데 결정적으로 이바지했을 뿐만 아니라, 특히 정간보는 有量樂譜(memsural notation)의 일종이므로, 그 기보법의 창안은 동양음악사에서도 획기적인 사건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새 율관제작은 아악부흥과 향악의 창제 및 악기제작에 매우 중요한 구실을 담당했다. 또 새로 창제된 악곡 중에서 여민락·정대업·보태평이 현재 국립국악원에서 연주되고 있음을 상기할 때, 선초 향악의 창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현행 문묘제례악의 뿌리도 역시 세종대의 아악부흥 때 이루어진 결과에서 찾아져야 하므로, 아악부흥의 음악사적 의미도 더불어 중요시되어야 마땅하다. 향악정재와 당악정재의 창제는 선초 공연예술의 발전에 크게 공헌했고, 또한 그 반주음악인 향악과 당악의 전승에 결정적으로 이바지하였다. 그러므로 새로 창제된 정재의 음악사적 의미를 새롭게 조명해야 할 당위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고려의 가무백희는 조선시대의 민간연예인들에 의해서 전승됨으로써 민속연예의 발전에 바탕이 되었다.

 당악의 향악화는 고려시대에 찾아볼 수 없던 조선 초기의 새로운 경향이므로, 그 사실은 시대구분의 한 준거로 꼽힐 수 있다.≪악학궤범≫에서는 당악의 향악화라는 양식적 변천을 쉽게 찾아볼 수 있으니, 예컨대 당비파·월금·아쟁과 같은 당악기가 당악과 향악에 두루 연주된 사실이 바로 그러한 실례의 하나다. 요컨대 조선 초기의 음악문화는 조선 중기와 후기를 거쳐 현재까지 연주되는 전통음악의 뿌리 구실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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