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Ⅳ. 예술2. 건축2) 도성의 건설(2) 태조의 도성건설

나. 정도전의 도성건설 참여

 정도전은 조선왕조 건국에 크게 기여하였다. 태조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은 그는 지식이 풍부한 이론가이기도 하였지만, 도성건설의 계획을 수립하고 공역을 뒷바침하는 실무적인 인물이기도 하였다. 궁궐을 비롯하여 坊里의 이름까지 연유를 설명하면서 지어 바쳤다.NaN) 그리고 도성의 형용이 일단락되자 그는 신도시 찬양의 시를 지어 바치며 감격하였다.

 태조 때의 한양 도성건설은 정도전의 행적을 통하여 살펴볼 수 있다. 지리설에 따라 논의가 분분할 때 태조는 陰陽刪定都監을 열고, 관계 지식인과 書雲觀 관원들이 모여 지리도참에 관한 여러 책들을 연구하여 이론을 단일화하도록 하였다. 이 때 정도전이 중심인물이 되어 작업하였다.NaN) 정도전은 하륜의 무악명당설을 물리치고 여론을 일으켜 자초의 동의를 얻어내고 태조의 결심을 굳히게 하였다. 해박한 지식을 가진 그는 음양설에 구애되었다기 보다는 유학자답게 설득력있는 견해로 중의를 압도하였다.

 수도가 한양으로 결정되자 태조는 곧 新都宮闕造成都監을 열고 判事들을 임명하였으며NaN) 도시계획에 權仲和와 정도전을 참여시켰다.NaN) 그리고 공역이 시작될 단계에 이르자 정도전에게 黃天后土之神에게 제사지내게 하였다. 종묘와 궁궐 開基시에도 제사를 지냈으나, 이 때에는 중추원부사 崔遠과 중추원사 權近을 제주로 파견하였다. 태조 4년(1395) 정월에는 사직단을, 7월에 궐 서쪽에 長生殿을 지었다. 9월에 종묘와 궁궐이 완성되자, 정도전은 신궐 침실 사면의 벽에 써붙일 ‘可法可戒’의 문구를 경사에서 가려 뽑아 嘉言으로 간추려 바쳤다.NaN)

 태조 4년 윤9월에는 도성조축도감을 열고 판사, 부판사, 使와 副使, 판관과 녹사들을 임명하고 정도전에게 명하여 도성 쌓을 자리를 정하게 하였다.NaN) 백악산·인왕산·목멱산과 낙산의 능선을 따라 59,500척의 길이를 쌓았다. 실제의 시공에서는 600척씩을 1區로 삼고 전체를 97구로 나누어 시공하게 하였다. 59,500척의 城基長을 600척씩 97구로 나누면 1,300자 가량이 남는다. 이는 인왕산 꼭대기 자연암석지역의 성벽을 쌓지 않은 구역에 해당한다. 97구를 천자문의 순으로 명명하고 1字區를 다시 100자씩 여섯 등분해서 동원된 부역인원의 비례에 따라 나누어 맡아 시공하게 하는 계획을 세웠다. 계획안이 제출되자 태조는 친히 나아가 성 쌓을 자리를 살피고 곧 개기한다는 사실을 백악산과 오방신에게 알리는 고사를 지내게 하였다.NaN)

 태조 5년에 동북면, 강원도, 경상도, 전라도와 서북면에서 동원된 民丁 118,070명이 공역에 착수하였다.NaN) 600자 구간마다 표시를 위하여 성벽돌에 ‘崑字六百尺’, ‘餘字六百尺’을 새겼다. 태조 5년(1396) 정월 9일부터 2월 28일까지 작업하여 석성과 토성으로 쌓았다.NaN) 이 도성 쌓기를 1차공사라고 하는데 부실하거나 미진한 부분의 보완을 위하여 2차공사가 그 해 8월 6일부터 9월 24일까지 49일간 시행되었다. 경상·전라·강원도에서 79,400명이 차출되어NaN) 무너진 부분을 다시 쌓고 성문마다 陸築을 하고 虹蜺門 여는 작업도 시행하였다.NaN)

 태조 6년 정월에 황해도에서 민정을 동원하여 성벽을 보수하고 동대문에 옹성을 쌓았으며 8월에는 경기도 사람들을 불러다 성벽의 무너진 부분을 수축하였다. 이로써 도성축조는 일단락되었으나 남대문은 그 이듬해 2월에 가서야 준성되었다.NaN)

 정도전은 새로 이룩된 궁궐을 景福宮, 법전을 근정전으로 하는 등 여러 전각의 이름을 지어 바쳤고 도성 4대문과 4소문의 이름, 방리의 명칭까지도 지어 아뢰었다. 또 그는 성벽을 쌓고 있던 기간 중에 경복궁의 미비한 부분을 보완하는 감역을 맡아 태조 6년 4월에는 궁실을 짓는 일을 대략 마무리하였다. 그 후 정도전은 有備庫 신축공사를 맡아 스스로 감독하였다.NaN) 이어서 문묘, 관아, 종루 등도 완성하였다.

[필자]
NaN) 고종 때에 景福宮을 重建하면서 宮과 殿名을 재검토하였다. 개정을 전제로 하였던 것이나 더 좋은 이름을 찾지 못했다. 오히려 좋은 이름을 지은 정도전에게 감사하면서 그의 산소에 제관을 파견해 제사지내게 하였다. 새삼스럽게 감복하였던 것이다.
NaN)≪太祖實錄≫ 권 6, 태조 3년 7월 기유.
NaN)≪太祖實錄≫ 권 6, 태조 3년 9월 무술.
NaN)≪太祖實錄≫ 권 6, 태조 3년 9월 병오.
NaN)≪太祖實錄≫ 권 8, 태조 4년 9월 계축.
NaN)≪太祖實錄≫ 권 8, 태조 4년 윤9월 갑술.
NaN)≪太祖實錄≫ 권 9, 태조 5년 정월 무진.
NaN)≪太祖實錄≫에는 총인원수만 기록되어 있고 각 도에서 몇 명씩 동원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동북면은 백악산 동쪽부터 숙청문까지, 강원도는 숙청문에서 동소문, 경상도는 동소문에서 남대문, 전라도는 남대문에서 서대문, 서북면은 서대문에서 백악산 서쪽까지의 근방을 축성하였다.
NaN)≪太祖實錄≫ 권 69, 태조 5년 2월 병진.
NaN)≪太祖實錄≫ 권 10, 태조 5년 8월 신묘.
NaN)≪太祖實錄≫ 권 10, 태조 5년 9월 기묘.
NaN)≪太祖實錄≫ 권 13, 태조 7년 2월 을유.
NaN)≪太祖實錄≫ 권 12, 태조 6년 10월 갑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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