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양분설
조선 초기의 사회신분 편제에 대해 양분설에서는 사회신분 구성이 법제적으로 양인과 천인만으로 인정되는 사회계층 구조 위에서 조선 초기의 국가운영이 수행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양분설은 조선사회 신분층이 양반·중인·평민·천민으로 구성되었다는 4분설의 내용과 서로 충돌·모순되는 것은 아니다.043)
良賤論으로 표현되는 양분설이 학계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이다. 해방 후 국사연구가 심화되면서 사회신분사 연구 또한 전문화·개별화되어 갔고, 그러한 연구의 축적 위에서 조선 초기 사회의 양반신분층 이해에 대한 이의가 제기되었다. 종전의 4분설에 이의를 제기하고 조선 초기 사회의 신분이 양천으로 구성되었다는 가설이 제시된 것이다.044)
양천론은 “15세기 조선사회의 신분구성은 양인과 천인(노비)으로 구분해야 한다”는 가설에서 출발하여 조선왕조의 성립이 사회계층의 양극적인 대 립을 지양하여 중간층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 새로운 사회질서를 성 립시키는 것이라는 의미를 부여하였다.045) 그리고 실증을 통해 “조선 전기의 양인, 그 중에서도 농업을 생업으로 가진 일반양인은 學生을 배출하고, 학생 을 통해서 관료를 배출하고, 군역을 통해서 국방과 치안을 담당하는 기본적 인 모집단이요 과도적 집단이었다”046)라는 주장이 나왔다. 이어 16세기 이후부터는 양인 자체 안에 勳戚과 士林이 성장하면서 이들이 배타적이고 권위적인 양반을 형성하면서 士族과 中人, 그리고 常族의 분화가 서서히 진행되어 갔다고 하였다.
이 양천론은 4분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에 의해 강한 반론에 부딪쳤다.047) 그것은 종래의 통념적인 조선사회 신분구성 내용과 엄청난 시각차가 있었기 때문이다. 즉 조선 초기의 특권 신분층으로서 양반의 실체를 인정하여 양반 이 사회경제적 면에서 특권적 예우를 요구했으며, 문화생활을 유지해 중세 봉건시기의 지배신분의 틀을 공유하였다고 하는 연구가048) 학계에서 통설화 되었던 것이었다.
즉, 庶孼差待의 문제에 관한 연구에서 언급하는 서얼의 존재는 양반층의 존재를 전제로 하고 있었다.049) 이후 기왕의 통설을 전제로 하여 양반의 존재 를 증명한 연구업적이 나왔다.050)
그리고 조선사회가 양반사회였고, 모든 법제는 양반의 이익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운영되었다는 적극적인 주장이 제기되었다. 즉 “조선시대 양반층은 고려시대부터 형성되기 시작하여 조선 초기에 이르러 상급 지배신분층의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고, 따라서 이들은 조선사회에 있어서 여러 가지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051)라고 하여 양반과 양인·평민은 동일 집단적 요소가 있을 수 없다고 지적한 것이다.
또 양반은 아니지만 조선 초기에는 사족이라는 상류권 계층이 있었다는 견해도 제기되었다.052)
위의 연구는 모두 양반신분의 실체를 인정하고자 하는 학문적 인식에서 출발하고 있었다. 그러나 양천론은 조선 초기 사회신분의 사례연구를 통해 고려 이래의 전통적 사회신분층이 여말 선초의 시대적 변화에 따라 당시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사대부계층에 의하여 양천의 신분층으로 정리되고 있음이 논증되었다.053)
즉 공민왕대에 과거제가 크게 부흥하고 퇴직군인에 대해 군역 부과가 시도되어 사대부사회로의 방향 선회가 시작되었으나 대내외적 모순으로 말미암아 그 전환이 순탄하게 이루어질 수 없었는데 위화도회군으로 신진사대부가 권력을 잡게 되면서부터 본격적인 사대부사회가 출범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후 개혁의 강도와 방법을 둘러싸고 강·온 양파의 분열이 나타나고 혁명의 논리를 내세워 조선왕조를 개창하고 정권을 장악한 위정자들이 그 정당성을 화보하기 위해서 여말의 전제개혁에 이어 강력한 중앙집권체제의 구축에 진력하는 한편 신분제를 사대부사회에 적합한 체제로 개편하는 작업을 추진하였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비노비자의 등질화라는 고려 후기 이래의 사회적 추세를 바탕으로 능력주의 원칙에 입각한 보다 개방적인 신분체제가 마련된 것이다. 비노비자는 일률적으로 良人으로 간주될 수 있었으며, 良賤未辨者의 從良, 從父爲良法의 실시와 같은 과감한 양인 확대정책이 실시되기도 하였다. 신역체계의 재편성을 통해 세습적 賤役者가 대폭 감축되었으며, 관아에서 천역을 부담하던 일부 여자들의 입역도 면제되었다. 천역은 남계로만 세전될 뿐 여계로는 미치지 않게 되었다. 양인 일반에 대한 보편적인 신역 부과의 체제도 마련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에 따라 노비만을 천인으로 간주하는 양천 이분법적 신분체계가 확고히 정착되었으며, 양인의 신분적 제일성이 재래되었다”054)고 하였다.
그리고 신분제 개편 작업이 조선 초기 집권층에 의한 위로부터의 일방적 시혜가 아니라 평민층이 자신의 권리를 자각하여 권리를 당당히 주장한 데서 비롯되었으나 평민층에게는 보다 광범한 의무 부담이라는 무거운 대가가 따랐고, 법제적인 권리의 보장 즉 형식적 평등의 보장이 그대로 실질적 평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治者로 부상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고 해도 사회여건상 대다수의 평민들에게는 현관직을 차지하기가 사실상 용이하지 않았고 사대부 계층이 관직-특히 문반의 華·要·淸職-을 실질적으로 독점하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조선 초기의 양천신분제는 사대부계층의 이해와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어서 그 이전의 어떤 지배층보다 물리적 강제력·혈통·부력 등 제측면에서 기반이 미약하였던 사대부계층이 혈통보다는 개인적 성취를, 부보다는 지식을, 물리적 강제력보다는 도덕적 우위를 내세움으로써 지배의 정당성을 주장하였고, 공권력에 의탁하여 자신의 세력을 부지할 수 있었다고 하였다. 결국 사대부계층이 지닌 혁신성과 개방성이 양인의 신분적 제일성의 구현으로 나타났고, 그들의 보수성과 폐쇄성이 신분제의 유지로 나타났는데 그러한 양면성은 사대부계층 자체의 유동성과 고정성을 반영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양천 이분법적 체제와 양인의 신분적 제일성을 구조적 특징으로 하는 양천신분제는 16세기 이후 적지 않은 변모를 겪어 법제적 기본틀은 유지하였지만 양반·중인·평민·천민으로 분화되었다고 보았다.055)
이상과 같은 양천론은 조선 초기 사회가 갖는 역사성에서 사회신분층에 대한 보편적이고 이론적 개념을 추출한 것으로서 조선사회 성립에 대한 역사 연구에 있어서 신선한 접근방법이자 역사학계의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그런데 신라·고려 사회가 강인하게 유지하고 있었던 지배층에서 혈연적 관행으로 보여주었던 지배신분층의 존재 형태를 추적해야 하는 과제가 앞으로의 연구대상으로 남는다. 즉 역사발전 과정에서 지배신분층의 범주가 확대되어 가는 것을 추적한다는 시각과 함께 최고 지배신분층의 실체의 변화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선 후기 신분제에 대해서는 양천론에서 지적하였던 천인신분층의 소멸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056) 그것은 조선 후기의 사회가 초기와는 시대상의 성격이 달라지고 현재사회로 접근한다는 역사상과 연계되는 것이다. 노비신분제의 소멸은 조선 후기 한국 중세사의 단계가 끝나고 근대사에 근접하는 사회현상의 하나로 설명된 것이다.
<李範稷>
043) | 李成茂, 앞의 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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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4) | 韓永愚, <麗末鮮初 閑良과 그 地位>(≪韓國史硏究≫4, 1969:≪朝鮮前期社會思想硏究≫, 知識産業社, 1983). ―――, <朝鮮初期의 上級胥吏 成衆官-成衆官의 錄事로의 一元化 過程->(≪東亞文化≫10, 1971;위의 책). ―――, <柳壽垣의 身分改革思想>(≪韓國史硏究≫8, 1972 ;위의 책). ―――,≪鄭道傳思想硏究≫(서울대 출판부, 1973). |
045) | 韓永愚, <朝鮮前期의 社會階層과 社會移動에 관한 試論>(≪東洋學≫8, 檀國大, 1978), 24쪽. |
046) | 韓永愚, 위의 글, 21쪽. |
047) | 宋俊浩, <朝鮮兩班考>(≪韓國史學≫4,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3 ;≪朝鮮社會史硏究≫, 一潮閣, 1987). |
048) | 金錫亨, 앞의 책. ―――,≪朝鮮封建時代 農民의 階級構咸≫(1957). ―――, <李朝初期國役編成의 基底>(≪震檀學報≫14, 1941). |
049) | 李相佰, <庶孼禁錮始末>(≪東方學志≫1, 延世大, 1954). ―――, <庶孼差待의 淵源에 대한 一問題>(≪震檀學報≫1, 1934). |
050) | 李泰鎭, <庶孼差待考-鮮初 妾子 限品敍用制의 成立過程을 中心으로->(≪歷史學報≫27, 1965). ―――, <15世紀 後半期의 鉅族과 名族意識>(≪韓國史論≫ 3, 서울大, 1976). |
051) | 李成茂, 앞의 책, 366쪽. |
052) | 宋俊浩, 앞의 글. |
053) | 劉承源,≪朝鮮初期身分制硏究≫(乙酉文化社, 1987), 172∼173쪽. |
054) | 劉承源, 위의 책, 172쪽. |
055) | 劉承源, 위의 책. 173쪽. |
056) | 全炯澤,≪朝鮮後期奴婢身分硏究≫(一潮閣, 1989). 平木實,≪朝鮮後期奴婢制硏究≫(知識産業社, 198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