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순조대의 세도정치
(1) 정순왕후 수렴청정기(순조 즉위년∼3년)
순조 초년의 정치는 정치에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外戚이 있었다는 점에서는 세도정치기의 다른 시기와 마찬가지였지만, 국정 운영 방식은 순조대 중반 이후의 정치와 성격이 매우 달랐다. 金祖淳 이후의 외척이 先王으로부터 국왕 보도를 위촉받은 사실을 바탕으로 권력을 장악한 것에 비해 순조 초년의 외척은 수렴청정하는 대왕대비의 권력을 바탕으로 힘을 가질 수 있었다. 따라서 순조 초년 貞純王后 수렴청정기 외척의 권력은 국왕권을 능가하고 그것을 억누르는 것이었다기보다는, 비록 대왕대비가 대신하였지만 국왕권과 결합되어 있었고 그것을 통하여 행사되었던 것이다.
정조 24년(1800) 6월 28일 정조가 갑자기 죽고 순조가 11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영조 계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이에 老論 내부의 時派와 僻派 사이의 대립이 전면에 부각되었다.372) 그것은 영조 말년 사도세자의 장인 豊山 洪氏 洪鳳漢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과 정순왕후의 동생 慶州 金氏 金龜柱를 중심으로 하는 세력 사이의 정치적 갈등에 연원을 둔 대립으로서, 영조의 사도세자 처분에 대한 입장 차이가 대립의 명분이었다. 또한 그들 노론세력은 정조의 蕩平策에 힘입어 상당한 진출을 이루었던 南人과 충돌하게 되었는데, 특히 정조대의 정국 구도에서 상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여 있었던 벽파세력이 남인에 대해서 강경한 입장을 취하였다.
백관을 거느린 대신들의 요청을 따르는 절차를 밟아 수렴청정하게 된 정순왕후는 정조 사망 다음날 유례없이 빨리 3정승을 沈煥之·李時秀·徐龍輔로 새로 임명하고 정국을 주도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정순왕후와 함께 정국을 주도한 사람들은 친정 인물들인 金觀柱·金日柱·金龍柱·金魯忠 그리고 영의정 심환지 등이었다. 대왕대비는 국상으로 일반 정무를 처리하지 않도록 되어 있는 公除 기간중인 7월에 이미 조정의 주요 신하들에게서 ‘어린 임금을 보호하고 선왕이 내세운 의리를 지키겠다’는 내용의 개인별 충성 서약을 받았으며, 12월에는 정조가 내세웠던 의리를 재해석하면서 정국운영의 기본방향을 공개적으로 설정하였다. 여기서는 영조의 사도세자 처분이 부득이했음을 강조하고 그 의리를 둘러싼 대립에는 중립의 여지도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천명하였다. 앞 시기 정조의 입장은 영조의 사도세자 처분을 합당한 것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으면서도 친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위와 같은 벽파세력의 논리는 정조의 주장을 진정으로 이어받는 것이라는 합리화에도 불구하고 영조의 처분을 정당화하는 데 치중함으로써 실질적으로 정조의 입장을 뒤집는 것이었다. 그것은 사도세자의 친아들인 정조 치하에서는 거론할 수 없었던 내용이라 하더라도 처지가 다른 순조로서는 적극적으로 나서서 의리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되기도 하였다. 한편으로는 정조가 죽기 직전인 정조 24년 5월의 하교(五晦筵敎)에서 그들 벽파세력의 정당성을 인정했다는 점이 강조되었다.
순조 즉위년(1800) 10월 정조 국장이 끝난 다음날, 사도세자 신원을 주장한 정조 16년의 嶺南萬人疏에 동조했다 하여 徐有麟 형제를 李安黙이 逆·邪로 몰아 탄핵함으로써 시파에 대한 벽파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벽파는 그들의 정국운영에 장애가 되는 시파 등의 노론계 인물들을 의리에 배치되고 사도세자 추숭을 주장하였다는 죄목으로 대거 정계에서 축출하였다. 실록의 기록을 종합하면 이 시기에 徐有隣·金履翼·金履載·金履喬·申耆·李濟萬·朴聖泰·徐有聞·李羲甲·鄭尙愚·金履度·李在學·沈象奎·金鍾健·李義用·沈魯崇·洪大協·朴夏源·洪志燮·金載翼·宋文輅·李羽晉·朴齊家 등이 유배되었으며, 沈樂洙·洪國榮·沈頤之·吳在文·金峙黙·鄭民始 등이 관작을 추탈당했고 李祖源·沈基泰에게 削去仕版이 행하여졌다.
특히 많은 논란 속에 이루어진 조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며 정조의 이복동생인 恩彦君 示因, 홍봉한의 아들이며 정조 친어머니 惠慶宮의 동생인 洪樂任, 정조가 近臣으로 육성한 尹行恁의 처형이었다. 역모 혐의에 연루되어 죽은 礻贊의 형이고, 湛의 아버지이며 그 자신도 역모에 추대된 혐의로 정조대부터 줄곧 공격을 받아 온 은언군은 “흉한 무리를 모으고 천주교에 빠졌다”는 공격을 받아 순조 원년 5월 사사당하였다. 이 때 홍낙임도 그 배후 조정자로 지목되어 함께 사사당하였다.373) 윤행임은 정조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고 ‘선왕이 남긴 뜻’을 강조하면서 순조 초년에 세력을 행사하려 했는데, “조정 신하들을 통제하고 자기 무리를 모아 뒷날을 계획했으며 서얼 任時發·尹可基가 일으켰다는 흉서 사건의 배후”라는 죄목으로 사사하였다. 이 때 윤가기의 사돈인 朴齊家도 연루되어 유배당하였다.
이와 더불어 정조 연간 정국 구도의 중요한 기둥을 이루었던 남인들을 제거하였다. 1801년 노론계 벽파세력이 일으킨 천주교 탄압에 의해 李家煥·權哲身이 옥사하였고 李承薰·丁若鍾·洪樂敏이 처형당하였으며 丁若銓·丁若鏞·李基讓·李晳·李致薰 등이 유배당하였다. 또한 직접 천주교도로 몰리지는 않았으나, 앞 시기 남인의 기둥이었던 蔡濟恭도 ‘의리를 바꾸고 당을 모았다’는 죄목으로 탄핵받기 시작하여 천주교도의 근본이 된다는 이유로 관작이 추탈되었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 남인은 중앙 정계에서 재기할 수 없을 만큼 타격을 입었고, 그 밖에 그들과 연결될 가능성이 있는 인물들도 함께 제거되었다. 남인으로는 채제공의 아들 蔡弘遠과, 趙圭鎭·李仁行·李鎭宅 李儒修·金翰東·趙時俊 등이 채제공 또는 이가환의 무리라는 지목을 받아 유배당하고, 金熙采는 삭거사판되었다. 이 밖에도 李益運이 파직, 李錫夏는 유배, 趙德隣이 추탈되었다. 김상헌의 후손이며 당색으로는 노론이지만 독자적인 입장을 지키고 있던 金建淳, 소북의 후손인 姜彛天 등이 남인과 함께 제거된 대표적인 경우이다.374) 위와 같은 유배자들에 대해서는 순조 2년(1802)과 3년 벽파세력이 어느 정도의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을 때 몇 차례의 석방 조치가 내려지기도 하였으나 전체 정국의 구도를 변화시킬 정도는 아니었다.
정국을 장악하기 위한 벽파세력의 노력은 군사력 구조의 재편성과 짝하여 이루어졌다. 정조가 설정한 왕권 중심 군사력 구도의 핵심이며 김조순 계열이 장악하고 있던 壯勇營에 대하여, 즉위년의 國葬 경비와 이듬해의 호조 재정 및 內寺奴婢 혁파로 발생한 재정의 손실을 부담하도록 하여 세력을 약화하였으며 2년 정월에는 군영 자체를 혁파하였다.375)
한편으로는 선왕의 권위를 빌려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려 하였다. 벽파세력은 내시노비의 혁파를 단행하여 당시 사회문제의 하나를 풀었다. 여기에는 더 이상 거역할 수 없는 사회적 변화를 인정하고 팽배해진 기층민의 욕구를 어느 정도라도 해소하여 그들의 호감을 얻으려는 목적이 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정조의 정책을 계승한다는 점을 내외에 과시하여 선왕의 이념 위에서 자신들의 기반을 강화하고자 하는 의미가 더욱 컸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윤행임이 정조가 추진한 서얼소통을 주장하자 그것은 제대로 시행하지 않으면서 서둘러 내시노비를 해방한 사실도 그 점을 방증한다.
이러한 사례는 순조 즉위년 11월에 정조의 신위를 世室로 모시기로 결정하는 과정에서도 볼 수 있다. 이 때는 국장이 끝난 직후였고 더욱이 서유린 형제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어 경황이 없는 시기였음에도 벽파쪽에 선 산림 宋煥箕의 제안을 그대로 수용하였는데, 이처럼 선왕이 죽은 직후 바로 세실로 모신 것은 그 때까지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것 역시 정국을 주도하는 자신들의 정당성을 굳히기 위한 노력이었다.
반면에 수세에 몰린 인물들로서도 자신들의 입지를 유지하는 길은 선왕의 뜻을 강조하면서 그들의 입장을 정당화할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순조 즉위 직후 윤행임은 정조가 직접 엮고 스스로 서문까지 붙여 간행하게 했다는 홍봉한의≪奏藁≫를 간행하자고 하여 대비의 승인을 받았다. 경황이 없는 상황 속에서 간행 사업이 추진되었으며, 또한 삼정승의 반대를 받아 즉시 취소된 것은 이 일이 지니는 정치적 성격을 잘 보여준다.
윤행임이 庶孼疏通을 주장한 것 역시 같은 성격을 지닌다. 순조 원년 정월, 홍낙임을 비롯한 시파에 대해 공격과 처벌이 한창 행하여지고 대왕대비의 천주교 탄압 명령이 내려지는 바로 그날 윤행임은 영조와 정조가 추진했던 정책을 길게 논하면서 서얼소통을 주장하였다. 이것 역시 자신이 정조의 정책을 계속해서 추진하는 주체임을 내외에 과시하여 그 정치적 입지를 굳히려는 노력이었다고 판단된다.
반대파를 누르며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한 벽파세력은 특히 김조순을 견제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정조는 생전에 김조순의 딸을 세자빈으로 선택하여 재간택까지 끝낸 바 있다. 그러나 김조순은 정조의 정책을 충실히 따른 시파의 인물로서, 그에게 국왕 장인으로서의 지위를 보장하는 것은 벽파에게 큰 위험이 될 수밖에 없었다. 순조 원년(1801) 6월, 은언군과 홍낙임을 사사한 직후 대사헌 권유는 상소하여 ‘대대로 내려온 큰 가문’(世族巨閥) 중에 역적 은언군과 관계된 자가 있음을 지적하고 훗날의 화를 막기 위해 그에 대한 조처를 취하자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김조순이 의리를 지키지 않았다고 하면서 그 가문과의 국혼을 막으려 했던 것이라고 한다. 당시 시파 인물에 대한 공격의 선봉에 섰던 이안묵을 비롯하여 沈魯賢·鄭在民 등이 이 상소에 관계되었다. 또한 비록 순조에 의해서 부정되기는 하였으나 김구주의 아들인 金魯忠도 김조순 딸과의 국혼을 막으려고 하였다고 하며, 심환지도 그 집안과 삼간택을 할 수 없다(三揀不爲之說)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 해 10월에는 鄭日煥이 경연에서 ‘한 戚臣이 과다한 관작을 받았음’을 비판하고 그로 인해 빚어지는 폐단을 경계하였는데, 이것 역시 김조순, 또는 순조 친모 綏嬪 朴氏의 아버지인 朴準源을 무력화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벽파의 이러한 기도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벽파세력 특히 대왕대비의 입장에서 볼 때, 선왕의 결정을 정면으로 뒤집는 것은 그들이 힘을 발휘하는 기반인 왕실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이어서 큰 위험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집권 관인들로서도 그들의 정치적 행위를 정당화하는 데에 형식적으로나마 선왕 정조의 권위가 필수적이었으므로 그가 남긴 결정을 쉽사리 부정할 수 없었다. 한편 현실적으로 당시 김조순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은 金尙憲의 후손으로서 대대로 누려 온 명망은 물론 상당한 군사적 기반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하여 벽파세력은 장용영을 혁파하는 등 그들에 대한 견제를 가하기도 했지만 결정적으로 그 세력을 누를 수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왕대비도 정조 서거 직후에 김조순이 척신 박준원과 같은 지위에 있음을 인정하면서 장영대장과 병조판서 등을 제수하는 등 그에게 베풀었던 특별한 대우를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김조순 역시 어려운 상황에서 자신을 지키는 방법은 은인자중하면서 자기에 대한 정조의 대우를 강조함으로써 정적들도 부정할 수 없는 선왕의 권위를 충분히 이용하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김조순은 장용영·총융청 등의 군문대장, 병조·예조·형조·이조의 판서, 비변사제조, 대제학 등을 역임하면서 위치를 유지한 끝에, 순조 2년 10월 자기 딸이 왕비로 책봉됨으로써 정조의 결정대로 國舅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순조 즉위 후 3년까지의 이 시기는 수렴청정하는 정순왕후와, 그의 권위를 기반으로 정권을 장악한 경주 김씨 김관주 등을 중심으로 한 벽파세력이 정조 연간의 열세에서 벗어나 같은 노론 내의 시파세력과 경쟁을 벌이던 시기이다. 이 때 정치 권력을 강화하거나 과시하고자 하는 여러 세력의 노력은 주로 선왕 정조의 이념과 정책을 이어받았음을 강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372) | 시파와 벽파의 대립에 대해서는 朴光用,<정조년간 時僻 당쟁론에 대한 재검토>(≪韓國文化≫ 11, 서울大, 1990)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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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3) | 李泰鎭·洪淳敏,<『日省錄』 刀削의 실상과 경위>(≪韓國文化≫10, 서울大, 1989), 74∼76쪽. |
374) | 순조 초년의 천주교 탄압과 남인·서얼 축출에 대한 최근의 논고는 다음이 참조된다. 鄭奭鍾,<丁若鏞(1762∼1836)과 正祖·純祖年間의 政局>(≪歷史와 人間의 對應≫, 한울, 1984 ;≪조선후기의 정치와 사상≫, 한길사, 1994). ―――,<순조 연간의 정국변화와 다산 解配 운동>(≪國史館論叢≫47, 國史編纂委員會, 1993;위의 책, 1994). |
375) | 李泰鎭,≪朝鮮後期의 政治와 軍營制變遷≫(韓國硏究院, 1985), 302∼306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