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평야
김해·나주·김제·만경·논산·예당·평택·김포·평양·재령·안주·박천·용천 등의 넓은 평야는 서해나 남해로 유입하는 큰 하천을 끼고 그 하류에 발달되어 있다. 이들 평야에서 중요한 부분은 주민들이 ‘들’이라고 부르는 지형, 즉 하천의 토사가 쌓여 이루어졌고 거의 논으로만 이용되는 沖積地 또는 氾濫原이다. 평야의 충적지는 모두 구릉지나 산지로 둘러싸였다. 구릉지도 고도가 낮고 지면의 경사가 완만하면 평야의 일부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지형은 기반암의 풍화토로 덮여 있고, 논·밭·과수원·목장·임야 등 토지이용이 다양하여 논만 분포하는 충적지, 즉 들과는 경관이 사뭇 다르다. 구릉지의 논은 대개 ‘고래실’에 계단식으로 조성되어 있다.
하천 하류의 충적지는 약 4,000년 전에 後氷期의 해면이 현재의 높이로 상승함에 따라 最後氷期의 침식곡에 하천의 토사가 쌓임으로써 형성된 지형이다. 이러한 충적지는 현재의 해면을 기준으로 형성되어 해발고도가 10m 내외로 아주 낮은 것이 특색이다. 동진강 하류의 김제평야나 만경강 하류의 만경평야와 같이 바다에 면한 평야는 일제강점기 이후 갯벌의 간척에 의해 넓혀져 왔다. 방조제가 바다쪽 경계를 이루고 있는 이러한 평야는 해발고도가 5m 내외에 불과하다.
20세기 초까지도 벼농사에 비교적 적합했던 곳은 작은 하천의 연변이나 구릉지의 고래실이었다. 오늘날 곡창으로 중요한 여러 평야는 수해와 가뭄이 극심하여 생산성이 아주 낮았다. 평야의 개발은 일제의 産米增殖計劃(1920∼1933)과 더불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일제는 이때 수많은 水利組合을 설립하는 동시에 대규모의 저수지를 곳곳에 축조했다. 주변에 저수지를 축조할 만한 골짜기가 없는 평야에서는 강물을 퍼올리는 揚水場을 설치하여 저수지를 대신하도록 했다. 홍수방지를 위한 근대적 제방의 축조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河川改修事業도 이때 병행되었다. 군산·김제·보성 등지에서는 대규모의 간척사업이 또한 추진되었다. 일제강점기의 수리조합 중에서 평남·연백·동진·전북과 같이 몽리면적이 2만 정보를 넘거나 이에 가까울 정도로 넓은 것들은 생산성이 아주 낮았던 주요 평야의 충적지를 대상으로 설립된 수리조합이었다.
평야의 개발은 1970년대 이후 大單位 農業開發計劃에 의해 또 한차례 대대적으로 추진되어 왔다. 영산강하구둑·아산방조제·삽교방조제·대호방조제 등은 간척사업이 병행되기도 했으나 농업용수의 확보를 위해 건설한 수리시설이다. 오늘날 하천 하류의 넓은 평야는 가뭄을 거의 겪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집중호우로 인한 수해에는 속수무책이다. 수해를 막기 위해서는 침수된 논의 빗물을 짧은 시간 안에 퍼내야 하는데, 넓은 평야에 그러한 용량의 배수시설을 설치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