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Ⅰ
우리 나라의 선사시대는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가 그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수십만년 전에 시작해서 약 3천년 전에 끝나는 시기이기도 하다. 지난 ’70∼’80년대 초 국사편찬위원회에서≪한국사≫(1 고대:한국의 선사문화, 1973년)와≪한국사론≫(13:韓國의 考古學, 1983년)을 발행한 이후 현재까지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에 관한 연구가 축적되어 이번에 다시 이 시대의 연구성과를 정리하여 내놓게 된 것은 매우 뜻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렇게 연구업적이 늘어남에도 불구하고 이미 지적된 문제점들이 제대로 정리되지 못하고 그 대부분을 다시 우리 학계에서 되풀이하여 논하고 있는데, 이는 한 학문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험하고 긴 길을 가야만 하는가를 잘 나타내준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 순으로 현재의 연구성과와 문제점들, 즉 이들 연구와 관련된 학술용어의 문제, 각 집필자에 따른 시대구분 문제를 비롯하여, 자연환경, 화석인골, 유적·유물과 선사인들의 생활, 그리고 주변문화와의 관계 등을 개괄하고, 이에 따른 문제점을 거론해서 가능한 한 빨리 여러 학설들이 정리·정착되어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에 대한 연구가 발전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Ⅱ
다른 학문뿐만 아니라 구석기시대를 연구하는데 있어서도 합리적이고 적합한 학술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가장 기초적이고 중요한 문제의 하나이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구석기시대 연구 내용을 보면 우선 여러 학자들이 사용한 각 분야별 학술용어가 거의 학자마다 달리 표현하고 있어 독자들이 혼란을 피할 수 없게 하고 있다. 특히 제4기 지질학, 화석인골, 구석기유물, 생활 등과 관련된 용어에서 한글·한자·구미어 등을 이용한 異名同義語가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어 서로 다른 뜻인 것으로 혼동하기 쉽다.
간단하게 분야별로 예를 들면 Pleistocene(홍적세, 플라이스토세, 갱신세), Clay(염토, 점토, 클레이), Silt(뻘, 실트), Homo erectus(호모 에렉투스, 직립원인, 곧선사람), Homo sapiens sapiens(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현생인류, 슬기슬기 사람), Flake(격지, 박편, 剝片), Chopper(쵸퍼, 외날찍개, 일면찍개, 찍개), End-scraper(밀개, 끝긁개), Handax(握斧, 주먹도끼, 양면핵석기), 주거지(住居址, 막집터, 집자리) 등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용어들이 하나로 통일되어 쓰이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개설서 성격의 글에서는 우선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문장 처음에 나타나는 학술용어에 대해서는 괄호 속에 다른 것과 병기해 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외국의 경우, 통일된 학술용어가 나타나기까지는 거의 1세기의 긴 기간이 걸린 예도 있듯이 최종적으로 가장 합리적이고 상징적이며 적절한 용어가 선택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의 구석기시대는 현재 전기·중기·후기 구석기시대로 나뉘어 연구되고 있으며 구석기학자 거의 전부가 이러한 시기구분에 동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우리 나라 구석기시대 시기구분의 기본틀은 서구의 제4기 편년체계와 구석기시대의 시기구분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특히 석기의 형태학을 근거로 먼저 구석기시대의 시기를 구분하고 지질학적 층위를 포함하여 동반된 동·식물화석의 상대연대는 물론, 검출된 절대연대가 있을 경우 이를 참고로 구석기 편년에 활용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구석기유적에서는 동·식물화석이나 검출된 절대연대가 많지 않아 석기의 상대편년을 중심으로 구석기시대를 구분하고 있는 것이 현재의 실정이다. 따라서 석기형태에 의한 구석기유적의 편년과 시기구분은 제4기의 지질층서와 동·식물화석, 절대연대 등으로 계속 보완, 수정되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우리 나라의 전기 구석기시대는 중기 홍적세 초기부터 후기 홍적세 초기 즉 마지막 간빙기 후반까지 해당하는 시기(약 70만년 전부터 약 10만년 전)이며, 중기 구석기시대는 후기 홍적세 초기부터 중기(약 10만년 전부터 약 4만년 전)까지이고, 후기 구석기시대는 후기 홍적세 중기부터 후기(약 4만년 전부터 약 1만년 전)까지로 구분하고 있다.
구석기시대 사람들의 생활과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자연환경을 연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무엇보다도 구석기시대의 기후변화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제4기 지질시대의 빙하 주변현상인 강안단구와 해안단구의 형성, 바위은거지의 형성과 동굴의 퇴적층, 해수면의 변화, 황토의 퇴적, 어름쐐기(Ice wedge)와 사태(Solifluction)현상, 유적의 퇴적층 형성 등은 물론 동물화석과 식물화석인 꽃가루 등의 연구를 통하여 고기후와 구석기시대의 자연환경을 복원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연구들이 제4기학 연구에 포함되는 분야로 우리 나라에서도 제4기학회가 10여년 전에 발족하여 활동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이 분야의 연구성과는 개척단계에 있기 때문에 분야별로 보다 많은 전문가의 참여와 진전된 연구성과가 요망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 나라의 제4기는 홍적세와 충적세로 나뉘며 다시 홍적세는 전기·중기·후기로 3분된다. 우리 나라 홍적세의 시작은 국제기준에 따라 약 180만년 전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 중부 동해안의 해안단구에서 검출된 고지자기 자료의 경우는 중국의 것과 비슷한 약 240만년 전으로 보는 주장도 있으나, 아직 자료의 증가를 더 기다려 보아야 할 것이다. 중기 홍적세의 시작은 약 70만년 전으로 보는 견해가 많고 홍적세가 끝나고 충적세가 시작되는 시기를 대부분의 학자들은 약 1만년 전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우리 나라 제4기의 편년은 기존의 틀 속에서 우리 나라의 편년자료를 증가시켜 한반도 자체의 편년을 정립하는 문제가 중요한 과제이다.
구석기시대의 동물화석자료는 주로 석회암동굴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북한의 검은모루, 용곡 1호, 청청암, 해상, 만달리동굴과 남한의 제주도 빌레못, 점말, 두루봉, 금굴 등에서 동물화석이 출토된 바 있다. 이러한 동물화석은 각각 중기·후기 홍적세에 해당하는 것으로 분류되었는데 이 중에는 사슴과, 소과, 말과, 돼지과, 고양이과, 곰과, 하이에나과, 개과, 코뿔소과, 코끼리과, 쥐과, 영장류 등이 포함되어 있고 물소, 원숭이, 큰쌍코뿔소 등 더운 기후와 맘모스, 털코뿔소, 동굴하이에나 같은 추운 기후에 살던 동물들도 발견되었다. 동물화석의 분석연구는 種의 분류와 결정이 가장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연구가 제대로 되어야 이들의 상대연대와 고기후 연구에 이바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재로서는 이러한 종의 결정이 다소 무리하게 진행된 경우도 보이고 있어 장차 극복해야 할 과제이다.
꽃가루분석이 이루어진 유적으로는 공주 석장리, 점말, 두루봉, 용곡 1호 동굴 등이 있으나 화분의 수가 적어 용곡 1호 동굴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들의 통계학적 분석 가치를 활용할 수 없는 실정이다. 용곡 1호 동굴의 화분분석도 TL연대, 동물화석의 분석과 함께 하층을 중기 홍적세 중기의 기후로 설명하고 있으나 화석인골과 함께 후기 홍적세의 기후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한국의 화분분석의 문제는 유적층에서 충분한 수의 화분이 검출되어 통계적으로 유효하게 처리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이어야 할 것이다. 현재로는 지리학 및 지형학 분야에서 구석기유적이 아닌 분지나 동해안의 늪지에서 행해진 화분분석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하겠다.
우리 나라 전기 구석기시대에 속하는 화석인골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으나 중기 구석기시대에 해당하는 화석인골이 북한의 용곡 1호 동굴, 덕천 승리산동굴(덕천인), 역포 대현동동굴(역포인)에서 발견되었다. 후기 구석기시대의 화석인골은 덕천 승리산동굴(승리산인), 만달리동굴(만달인), 금천동굴에서 출토되었으며 남한에서는 상시바위은거지(상시인), 흥수굴(흥수아이) 등에서 발견되었다. 화석인골 가운데 용곡 1호 동굴과 만달리동굴, 흥수굴에서 나온 것은 아래턱뼈와 함께 완벽한 두개골이지만 다른 것들은 치아 또는 두개골편에 지나지 않는다. 화석인골들은 그 자체의 특징으로 편년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함께 출토된 유물, 절대연대 등을 참조하여 연대를 정해야 한다. 부족한 화석인골편만으로 무리하게 상대연대를 정하다가는 큰 오류를 범하기 쉽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의 구석기유적은 현재 한반도 전체에 널리 분포하여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구석기시대에 속하는 모든 유적은 지금까지 약 40여 곳이 발굴조사되었다. 전반적으로 큰 강가에서는 야외유적이, 석회암지대에서는 동굴유적이 발견되고 있으며 여기서 전기·중기·후기 구석기가 모두 나타나고 있다. 큰 강유역으로는 두만강유역(종성 동관진, 웅기 굴포리, 부포리유적), 대동강유역(상원 검은모루, 덕천 승리산, 역포 대현동, 평양 만달리, 승호 화천동, 상원 용곡동동굴), 한강유역(단양 수양개, 양구 상무룡리, 제천 창내, 양평 병산리, 제천 명오리유적, 점말동굴, 단양 금굴, 상시바위은거지), 한탄강유역(연천 전곡리, 연천 남계리유적), 임진강유역(파주 금파리, 파주 가월리·주월리, 고양 원당유적), 금강유역(공주 석장리, 청원 샘골유적, 청원 두루봉동굴), 섬진강유역(승주 곡천·금평·죽산, 화순 대전, 곡성 옥과유적), 보성강유역 및 제주도 빌레못동굴 등에 구석기유적이 분포하고 있다.
구석기유적을 분류할 때는 인류활동의 증거 즉 석기제작과 사용흔적이 있는 유적과 순수한 고생물유적을 구분하는 것이 혼동을 피하는 길이다. 구석기시대 유물은 인공유물인 석기가 중심이 된다. 전기 구석기시대 유적(검은모루, 전곡리, 금굴, 주월리·가월리)으로 구분되는 곳에서는 모두 공통적인 석기들이 발견되고 있으며 석기의 형태학적 분석으로 전기 구석기로 분류되고 있다. 이러한 석기들은 주먹도끼(양면핵석기), 뾰족찍개, 박편도끼(가로날도끼), 다각면원구, 쵸퍼(일면찍개), 쵸핑-툴(양면찍개), 돌핵긁개, 박편석기(긁개, 등손잡이칼 등)류와 함께 출토되는 것이 특징이다. 중기 구석기유적(굴포리, 석장리, 빌레못동굴, 용곡 1호 동굴, 명오리, 수양개, 상무룡리, 남계리, 병산리)에서는 주로 박편석기인 긁개, 첨기(찌르개), 칼, 끝긁개(밀개), 송곳(뚜르개), 조각칼(새기개), 톱니날, 홈날, 대형석기인 주먹도끼, 박편도끼, 쵸퍼, 쵸핑-툴 등과 르발르와돌핵이 분류되고 있다. 후기 구석기유적(굴포리, 부포리, 석장리, 만달리동굴, 창내, 수양개, 상무룡리, 곡천, 금평, 죽산, 대전, 옥과)에서는 박편과 돌날로 만든 소형석기가 섞여서 나오는데 이들의 비율은 유적에 따라 다르다. 그러나 긁개, 칼, 첨기 이외에 전형적인 끝긁개, 조각칼, 송곳, 세석인과 세석인석핵, 유경첨기 등이 보이며 대형석기(주먹도끼, 찍개 등)도 함께 발견된다. 문제는 전기·중기·후기 구석기에서 대형석기들이 큰 차이 없이 분류되고 있고 그 밖에 다른 석기의 분류에서도 오류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구석기를 제대로 분류할 수 있는 능력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 나라의 구석기시대에서 생활과 관련된 유물과 유적으로는 석기, 동물화석, 예술품, 주거지 등이 발견된다. 석기는 사냥(주먹도끼 등), 도살(칼, 박편도끼 등), 가공 및 예술품제작(긁개, 송곳, 조각칼 등)용으로 사용될 수 있고, 유적에서 발견되는 동물화석들은 당시 사냥감이었던 것을 보여준다. 예술품이 석장리유적, 점말, 두루봉, 용곡 1호 동굴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나 용곡 1호 동굴의 뼈로 된 얼굴예술품 이외의 것은 학계에서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주거지는 석장리, 굴포리, 제천 창내, 화순 대전유적에서 발견되었는데 땅에 기둥을 박고 주위를 가죽이나 나뭇가지, 풀 등으로 덮고 그 속에서 생활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확실한 주거지의 발견과 복원이 요망된다.
한반도와 가까운 중국, 시베리아, 일본의 구석기를 우리 나라의 구석기와 비교연구하면 우리 나라의 구석기를 연구하는데 여러 가지로 기여하는 바가 큰데, 이들의 구석기는 모두 전기·중기·후기 구석기로 구분되어 있으나 연대의 차이가 많이 나타나고 있다. 중국의 구석기유적은 전기부터 후기까지 300여 곳이나 되고 편년도 약 100만년 전부터 약 1만년 전까지 다양하다. 시베리아의 구석기유적도 전기부터 후기까지 수백 곳에 달하고 전기의 상한도 홍적세 중기에 해당하며 후기 구석기는 약 1만년 전에 끝나고 있다. 일본의 경우는 구석기유적이 현재 1천여 곳에 달하고 최근에는 약 50만년 전에 해당하는 전기의 주먹도끼유적이 발견되었다고 하며 후기는 약 1만년 전에 끝난다. 앞으로는 중국의 화북과 동북지역, 시베리아의 연해주, 아무르강, 바이칼호, 앙가라강, 알타이지역 및 일본의 구주지역 등의 구석기문화와 더욱 밀접한 관계를 갖고 비교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
Ⅲ
신석기시대의 학술용어 사용문제는 구석기시대의 경우보다는 덜한 편이지만 학자마다 異名同義語를 빈번히 되풀이해서 사용하는 예가 자연환경(홍적세=갱신세, 후빙기=현세=完新世=沖積世=post-glacial=holocene, 활엽수=넓은잎나무, 개암=구실잣밤, 패총=조개더미, 짐승=동물), 인골(인골=사람뼈), 유적·유물연구(주거지=집터, 즐문토기=빗살문토기=빗살무늬토기, 간석기=마제석기, 골기=뼈연모) 등의 분야에서 적지 않게 나타난다. 특히 유물분야에서 이러한 예가 많이 보이며 전반적으로 기존의 용어를 한글로 풀어 쓰는 경향이 있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더 이해하기 힘드므로 용어 사용에 신중을 기하고 궁극적으로는 신석기학자들이 점진적인 용어 통일에 힘을 모아야겠다.
신석기시대의 시기구분과 편년은 대략 고기(조기)(B.C.10,000∼B.C.6,000), 전기(B.C.6,000∼B.C.3,500), 중기(B.C.3,500∼B.C.2,000), 후기(B.C.2,000∼B.C.1,000)로 나뉘는데 학계에서 이를 공용하고 있다. 다만 고기는 최근 제주도 고산리유적의 조사를 계기로 한층 더 관심을 갖게 되었으나 자료의 증가를 필요로 하고 있는 실정이다. 북한의 시기구분과 편년은 남한의 것과 차이가 나며 주로 유물의 상대연대에 의해 결정된 것이지만 남한의 경우에는 유물의 상대연대와 함께 방사성탄소연대를 참조하였다는 것이 장점이다.
신석기시대의 자연환경연구는 자연히 제4기 후빙기(충적세-약 1만년 전부터 현재까지)의 기후와 당시 동·식물을 대상으로 하게 되는데 현재 우리 나라의 후빙기 기후변화의 틀은 서구의 것(Preboreal, Boreal, Atlantic, Subboreal, Subatlantic, Present)을 참고로 하지만 현지에서 주로 화분, 방사성탄소연대, 해수면의 변화 등을 중심으로 고기후를 복원하고 있다. 우리 나라는 지역에 따라 굴곡의 차이가 있지만 전반적으로 약 1만년 전부터 서서히 따뜻해지다 약 6,000년 전쯤에 상당히 따뜻해지고 그 이후로는 기온이 조금씩 내려가다 4,000년 전쯤에는 쌀쌀하고 습해지며 약 2,400년 전에는 한랭했던 것으로 보인다.
식물상과 동물상은 지금의 현생종과 큰 차이가 없으며 활엽수(참나무 등)와 침엽수(소나무 등)계통은 각각 기후가 온난하거나 한랭했던 것을 시사한다. 동물로는 우제목(사슴, 노루, 누렁이 등), 멧돼지, 산양, 물소, 사향노루, 식육목동물(살쾡이, 곰, 늑대, 호랑이 등), 족제비과(수달 등), 쥐과동물 등 20여 종, 물개, 바다사자, 고래 등 바다동물, 꿩, 오리 등 조류, 참돔, 대구, 상어, 다랑어 등 어류, 굴, 바지락, 홍합, 전복 등 패류 40여 종 등 다양하게 발견된다. 그러나 동·식물관계의 전문가가 드물어 종의 분류에 문제가 될 수 있어 전문가의 양성이 시급하다.
신석기시대의 인골연구는 함북 회령과 웅기, 황해도 해주출토의 두개골을 골측정학적 방법으로 계측조사한 지수를 중국, 시베리아, 일본 등의 신석기 두개골의 것과 비교연구한 것이 있다. 그런데 한국의 것은 북방시베리아 계통의 두개골보다는 북중국의 것과 더 가까운 지수를 보인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에 연대도, 욕지도, 상노대도 등에서 나온 자료들이 누락되어 있어 장차 보완조사가 반드시 필요하다.
신석기시대의 유적은 주로 유물포함층과 패총 등으로 형성되어 있고 거기서 주거지와 무덤 등이 발견된다. 현재까지 발견된 유적은 400여 곳에 이르는데 주로 큰 강(두만강, 압록강, 대동강, 한강, 낙동강 등)유역과 해안(동, 서, 남해안)지역 및 도서(서해, 남해도서), 내륙(중부, 남부지방) 등지에 분포하고 있어 신석기인들의 생활무대를 알 수 있다. 중요한 유적이 있는 지역으로는 평북·자강도(미송리, 신암리, 세죽리 등 7곳), 평남·평양·황해도(궁산리, 청호리, 금탄리, 용곡 2동굴, 지탑리 등 12곳), 함경도·양강도(원수대, 농포동, 송평동, 서포항 등 8곳), 서울·경기도(암사동, 미사리, 시도, 신촌 등 8곳), 강원도(오산리, 교동, 내평리 등 4곳), 충청도(둔산동, 상시, 도담리, 휴암리 등 7곳), 전라도·제주도(대흑산도, 소흑산도패총, 고산리, 북촌 등 7곳), 경상도(동삼동, 수가리, 상노대도, 영선동, 연대도, 봉계리, 송죽리 등 17곳) 등이 있다. 장차는 내륙지방에서의 유적조사가 더욱 요망된다.
신석기시대의 유물로는 토기, 석기, 골각기, 예술품 등이 발견되며 특히 토기는 편년과 문화성격을 밝히는데 중요하다. 고기 신석기시대에는 고산리에서 납작밑섬유질토기, 융기문토기, 가압된 석제 화살촉, 첨기, 세형돌날, 세형돌날석핵, 토제 동물머리 등이 나왔다. 전기 신석기시대의 토기는 지역에 따라 특성이 있지만 납작밑토기, 융기문토기, 민무늬토기, 빗살무늬토기(AⅠ, BⅠ), 찍은무늬토기 등이 있고 석기는 찍개, 밀개, 긁개, 첨기, 화살촉, 결합낚시, 작살, 그물추, 찔개살, 돌톱, 도끼, 돌칼, 그물추, 숫돌, 추모양석기, 괭이(서포항), 보습, 낫, 창, 갈돌, 갈판 등이다. 골각기는 첨기, 송곳, 찔개살, 작살, 낚싯바늘, 삿바늘, 창끝, 예새, 홀리개, 괭이, 낫 등이 있다. 그런데 한편 절대연대의 검증이 없는 춘천 교동의 유물이 오산리 이른 시기의 유물과 유사하다고 하여 오산리와 같은 시기로 분류 편년하는 것은 매우 신중을 요하는 일이다. 중기 신석기시대의 토기는 주로 태선문토기, 빗살무늬토기(AⅡ, BⅡ), 타래무늬토기, 융기문토기, 빗살무늬토기(사격선무늬, 삿자리무늬) 등이며 석기는 타제석부와 자귀, 타제석촉, 마제석부, 마제석촉, 끌, 대팻날, 갈판, 갈돌, 공이, 숫돌, 자귀, 마치, 칼, 긁개, 그물추, 괭이, 삽 등이 있다. 골각기는 창끝, 화살촉, 작살, 찔개살, 홀리개, 송곳, 바늘, 예새 등이 보인다. 후기 신석기시대의 토기는 빗살무늬토기(AⅢ, BⅢ), 이중구연토기, 민무늬토기, 뇌문토기, 융기문토기(금탄리, 남경, 궁산리) 등이며, 여기서 융기문토기는 북한의 편년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석기는 숫돌, 갈돌, 갈판, 공이, 도끼, 끌, 대팻날, 괭이, 화살촉, 그물추, 칼, 자귀, 마치, 유견석부(곰배괭이) 등이 있다. 골각기는 창끝, 화살촉, 작살, 홀리개, 찔개살, 송곳, 예새, 칼, 낚시, 바늘, 숟가락, 櫓, 바늘통, 괭이, 첨기, 시문구 등이 발견되었다.
신석기시대의 예술품으로는 동물의 치아 또는 뼈로된 장신구(수식), 개머리(토제), 뱀, 망아지 조각품, 멧돼지(토제), 새(납석제), 사람얼굴(패각제, 토제), 돌 또는 패각제 팔찌, 여성상(토제), 자안패모양(토제) 등이 있어 토테미즘, 애니미즘, 샤머니즘과 관련된 의례, 주술, 신앙생활을 추정할 수 있다. 신석기인의 의생활은 바늘, 麻絲, 바늘통, 방추차 등의 유물로 미루어 옷감 등을 짜서 사용하였고, 식생활은 동·식물자료로 보아 수렵, 어로, 채취, 농경을 통해 식량을 확보하였으며, 주생활은 여러 유적에서 발견된 주거지(동굴, 바위은거지, 움집 등)를 이용하였다. 그리고 움집(원형, 말각방형, 장방형 등) 4, 5기에 20명 정도가 혈연 및 씨족공동체를 형성하여 상부상조하는 사회생활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장차 한국의 신석기시대를 보다 깊이있게 연구하기 위해서는 중국의 동북지방, 내몽골, 바이칼호, 연해주, 아무르강유역을 비롯하여 일본의 규슈·혼슈지방 등의 신석기문화와 지속적으로 비교연구해야 될 것이다.
<鄭 永 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