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후기 고조선과 청동기
≪史記≫등의 여러 중국 고대문헌에 기원전 4세기 말∼3세기 초 연이 조선의 서방을 쳐서 2천여 리의 땅을 빼앗고, 滿番汗으로 국경을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보아 연의 공격으로 고조선의 영역은 축소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그 축소된 영역이 어디이며, 그 중심지의 변동도 과연 있었는가에 대해서 해석이 분분하다.
고조선과 관련되는 지리적 범위에서 연의 침입이 있었던 기원전 300년경 이후의 유적유물군으로 주목되는 것은 明刀錢 관계 철기유물군과 세형동검관계 청동유물군이다. 전자는 요동지방으로부터 청천강 이북, 후자는 그 이남 지역에 분포하고 있어, 서로 지역적인 분포권을 달리 하고 있다. 전자에 대해서는 북한 학자들은 그 대표적인 유적의 이름을 따서 ‘蓮花堡-細竹里 類型’이라고 부르고, 이를 고조선 중심지에 속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0101)
분명한 사실은 연화보유형의 유적유물군에서는 전기 고조선의 청동기문화 전통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중심지에서 문화변화의 속도와 그 규모가 주변지역보다 빠르고 큰 경우가 일반적이지만, 전 단계의 전통이 그렇게 철저하게 단절된다는 것은 납득하기가 어렵다. 대동강유역에 기원전 1세기경 漢나라 철기문화가 본격적이고도 대규모로 유입되었을 당시에도, 전통적인 청동기문화가 단절됨이 없이 지속되었다는 사실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압록강 이남 청천강 이북에서 발견된 연화보유형의 유적은 그 대부분이 명도전과 같은 화폐유물이 다량 출토하는 退藏遺蹟 혹은 생활주거지 유적이다. 화폐유물은 권위나 의례를 상징하기보다는 교역의 수단이라는 경제적인 의미가 강한 것으로, 이 지역이 직접 연나라의 군사적·정치적 지배를 받았다기보다 우선 연나라와의 경제적 교역지대라고 보는 수준에서 해석해야 될 것이다.다만 이를 남긴 장본인들이 구체적으로 연의 침공 직후의 유이민인지, 秦漢교체기에 위만이 이끌었던 燕·濟·趙 유이민인지, 아니면 위만조선의 등장 이후의 관계 세력인지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하다.0102) 그러나 화폐를 대량으로 퇴장한 유적의 명도전 화폐가 기원전 3세기대 것이라면,0103) 연의 영향하의 주민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이들 집단이 위만의 망명집단 혹은 위만조선 관계 세력이라고 하면 구태여 그렇게 많은 화폐를 청천강 이북을 경계로 퇴장한 까닭이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위만세력은 이 지역에서 축출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지역을 본거지로 삼아 세력을 확장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연의 멸망과 함께 그 영향 아래 놓여 있던 주민이 후퇴하면서 갑자기 퇴장한 것이라는 해석이 보다 자연스럽다.
명도전 관계유적을 이렇게 해석하더라도, 이의 분포를 통하여 기원전 4세기 말 3세기 초 연과 고조선의 군사적인 경계인 만번한의 위치를 쉽게 결정하기는 어려움이 있다. 그 분포 영역과 군사활동의 영역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보다 구체적인 논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일정세력의 교역권과 군사적 활동범위가 반드시 틀린 것이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교역권과 군사활동범위의 경계가 일치한다는 것은 증명된 전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만번한 경계 설정의 시기인 기원전 3세기 초라는 시점과 명도전 퇴장이 이루어진 시점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설명이 있어야 한다.
연화보유형과는 대조적으로 청천강 이남의 세형동검관계 유물군 자체가 전기 고조선의 비파형동검문화를 계승한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사실은 전기 고조선의 중심적인 청동기문화가 요동지방에 위치하다가, 그 문화를 계승한 후기 고조선의 청동기문화(세형동검문화)가 청천강 이남으로 이동한 것으로 해석하는 근거를 마련한다. 상대적으로 고조선의 중심지가 요동지방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지속되었다고 보아, 전 단계의 고조선문화의 전통과 단절된 명도전 관계유적을 고조선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욱 어렵게 된다.
더욱이 연화보유형과 세형동검관계 유물군유형의 분포지역이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두 유물군을 더욱더 동일구성체의 종내집단의 것이라고 하는 것과 어울리지 않는다. 청천강을 사이에 두고 인접해서 한쪽에는 戰國系 철기, 다른 한쪽에는 세형동검관계 청동기 분포권으로 나뉜다고 볼 때, 이를 동질적인 정치체 집단의 것으로 보는 것은 아무래도 부자연스럽다. 또한 토기 등의 다른 유물군에서도 양 지역의 유사성이 보이지 않는 것이 더욱 동질적인 집단으로 보기를 어렵게 한다.
청천강 이남의 세형동검 시기의 유물군 중에서 일단 후기 고조선을 찾아야 한다면, 그 중 어느 것이 후기 고조선의 중심지에 속하는 유물군인가가 다음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기원전 3세기대에 한반도에서 확인되는 세형동검 관계 유물군은 대체로 대동강과 금강유역에 집중되어 있다. 우선 대동강유역에서 이 시기에 속하는 것으로, 정봉리유형의 유물군과 成川과 孟山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는 동경을 들 수가 있다. 금강유역에는 괴정동·연화리·남성리·동서리 등의 유적에서 확인된 남성리유형의 유물군이 있다. 남성리유형에서는 요동지방의 정가와자유형에 보이는 나팔형동기·방패형동기·원형동기 등이 공반된다.
기원전에 남한지방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정치적 공동체는 韓 혹은 辰國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인정하며, 한편으로 풍부한 청동유물 갖춤새로서 남한에서 가장 오래된 유형인 남성리유형의 유물군이 금강유역에 집중되었다면, 금강유역을 한 혹은 진국의 중심지로 보는 것은 당연하다. 금강유역이 이러한 정치체와 관련되었다면, 대동강유역의 3세기대 유물은 다른 정치체인 고조선의 유물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해주는 것은 기원전 2세기는 물론 기원전 1세기 이후에도, 이 대동강유역에 정치적 중심지라고 볼 수 있는 유적유물군이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기원전 1세기경에는 새로운 漢式 유물이 다량 공반되는데, 다음에도 보겠지만 이러한 고고학적 상황은 이 시기에 고조선이 멸망하고, 漢郡縣이 설치된 역사적 사실이 이 지역에서 이루어졌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다만 3세기경 후기 고조선시기에 연과 각축을 벌일 수 있는 수준의 물질적 토대로서는 대동강유역의 정봉리유형 정도의 유물군으로는 아무래도 빈약한 감이 있다. 정봉리유형 말고는 3세기경의 세형동검문화가 대동강지역에 그렇게 많이 확인되지 않는 것은 철기문화의 발전 때문일 수도 있다. 또한 이 지역에 누대로 세형동검 후기문화, 한의 문화가 중첩되면서 전단계의 유적유물군의 교란이 심했기 때문일 것이라고도 설명할 수 있다.
<李淸圭>
0101) |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고조선문제연구론문집≫(1976), 25∼32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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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2) | 崔夢龍은 이들 명도전관계 유적을 위만조선의 교역활동의 증거로 파악한다(崔夢龍,<古代國家成長과 貿易-衛滿朝鮮의 例->,≪韓國古代의 國家와 社會≫, 歷史學會 編, 一潮閣, 1985, 57∼76쪽). 徐榮洙는 이를 위만세력이 준의 조선 당시 변방에 있었을 당시의 교역활동의 증거물로 이해하고 있다(徐榮洙,<古朝鮮의 위치와 강역>,≪韓國史市民講座≫2, 一潮閣, 1988, 19∼50쪽). 尹武炳은 이들 명도전 퇴장유적이 기원전 3세기대이므로 燕나라 秦開의 東進 직후 중국으로부터 이주한 유이민들이 남긴 유적으로 보고 있다(尹武炳,<明刀錢의 問題>,≪韓國史大系(1)≫, 三珍社, 1984, 326∼330쪽). |
0103) | 尹武炳, 위의 글. 關野 雄,<刀錢考>(≪東洋文化硏究所紀要≫35, 東京大 東洋文化硏究所, 1965), 29∼45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