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본 청동기문화의 성격
우리 나라 청동기가 일본에 전파된 시기를 일본에서는 야요이시대라고 한다. 그런데 이 야요이시대는 지역에 따라서 약간씩 차이는 있지만 그 발생지인 규슈(九州)지방의 경우는 대략 기원전 350년경에 시작하여 기원후 250년경에 끝났다고 하고 있으며 이를 200년씩 구분하여 전·중·후기로 나누기도 한다.
일본 최고의 청동기는 후쿠오카현(福岡縣) 이마카와(今川)遺蹟 출토의 銅鏃이다.0532) 이 동촉은 有莖式인데 재가공된 흔적이 있으며 板付Ⅰ式 토기와 함께 출토되었으므로 야요이시대 前期前半에 편년된다. 당시 청동끌도 함께 채집되었는데 이 끌은 古朝鮮式銅劍0533)의 莖部를 재가공한 듯하며 시기적으로는 이마카와 출토 동촉과 거의 같다고 추정된다. 그러나 야요이시대 초기 청동기는 그 출토 예가 적어서 보편적인 것이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본격적으로 우리 나라 청동기가 일본에 전파된 시기는 전기 말부터이며 甕棺 형식으로는 金海式단계이다. 이 때 청동기는 한국식동검·동모·동과, 그리고 다뉴세문경이 세트로 이루고 있다.
지금까지의 일본 최고의 동검은 사가현(佐賀縣) 우기쿤덴(宇木汲田) 18호 甕棺墓에서 출토된 것이다.0534) 이 옹관묘는 김해식으로, 鎬線이 抉入部 하단까지 있고 결입부 하단에서 關部까지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있다. 또 후쿠오카현 요시타게타가기(吉武高木) 3호 목관묘에서는 한국식동검·동모·동과·다뉴세문경이 출토되었다.0535) 동검은 전술한 우기쿤덴 18호 옹관묘 출토의 것과 동일한 형식이며 동모·동과도 세형이다. 이 청동기와 함께 죠노코시(城ノ越)式으로 추정되는 토기가 출토되어 시기적으로 중기초두에 해당됨을 알 수 있다. 한편 같은 중기초두에 해당하는 2·4호 목관묘에서도 한국식동검이 출토되었으나 이것은 호선이 관부까지 이어졌는데 이와 같은 세형동검들은 모두 우리 나라에서 전파되었다는 설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최근 키타규슈(北九州) 지역을 중심으로 동검 용범이 후쿠오카현 시카노시미(志賀島) 가쯔바(勝馬)유적0536)·오타니(大谷)유적,0537) 사가현 소우자(惣座)유적0538)에서 출토되었고, 동모 용범이 사가현 소우자 및0539)와 요시노가리(吉野ケ里)유적0540)에서 출토되었다. 사가현 나베시마 모토무라미나미(鍋島本村南)유적0541)에서는 동과 용범이 출토되어 우리 나라에서 청동기를 받아들인 뒤 얼마 안되어 곧 일본에서 倣製가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세형의 靑銅利器는 그 뒤 중세형의 靑銅祭器로 변화하는데 사가현 아네(姉)유적,0542) 효고현(兵庫縣) 타노우(田能)유적0543)에서 동검 용범이 출토되고 있어서 중기 중반경에 제작되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중세형 청동제기가 부장된 예에서 그 존속 기간을 추정한다면 먼저 중세형동검은 후쿠오카현 수구오카모토(須玖岡本) D지점과0544) 미네(峰)유적0545) 옹관묘에서 출토되고 있어서 중기후반까지 존재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중세형 동모는 후쿠오카현 타테이와(立岩) 10호 옹관묘에 부장되어 있으므로0546) 중기후반까지 존재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중기후반이 되면 새로이 中國鏡이 부장되기 시작한다. 후쿠오카현 타테이와 10호 옹관묘에서는 重圈文淸白鏡 등 前漢 후기의 異體字銘帶鏡 6점, 중세형동모 1점, 철검 1점 등이 부장되어 있었고 옹관 형식은 타테이와식이며 중기후반으로 편년되는 기준 자료이다. 그 밖에도 이 시기의 중요한 유적으로서 후쿠오카현 미쿠모(三雲) 미나미쇼지(南小路)유적과0547) 수구오카모토유적을 들 수 있다. 미나미쇼지 1호 옹관묘는 옹관 형식은 알 수 없지만 여기에서 重圈彩畵鏡·四乳雷文鏡·連弧文淸白鏡 등의 이체자명대경 30면 이상, 세형동모 1점, 유병식세형동검 1점, 중세형동모 1점, 중세형동과 1점, 유리벽 8면 이상, 금동제사엽좌금구 8점 이상 등 대량의 부장품이 출토되었다. 그 가운데 중권채화경은 河南省 信陽縣 長臺關楚墓 출토품과0548) 유사하므로 戰國鏡이라고 추정되며 사유뢰문경은 地文을 가지고 있어 前漢 전기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머지 이체자명대경은 전한 후기 것이므로 전자는 약 200년 가량 전세된 것이라는 점과 이 옹관이 전기한 타테이와 10호 옹관묘와 같은 형식에 속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같은 예는 수구오카모토 D지점 옹관묘에서도 볼 수 있다. 이 옹관묘도 형식은 알 수 없으나 草葉紋鏡·星雲紋鏡·이체자명대경 등 30면 이상의 동경, 多桶式銅劍 1점, 중세형동검 1점, 세형동모 4점, 중세형동모 2점, 중세형동과 1점, 유리벽 등 많은 부장품이 출토되었다. 그 중에서 초엽문경은 전한 전기, 성운문경은 전한 중기에 해당하고 중권문청백경 등의 이체자명대경은 전한 후기에 해당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옹관묘의 시기도 立岩期, 즉 중기후반에 해당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이 중국경의 출현기인 중기후반의 특징으로서는 ① 전한 후기경이 부장되는 점, ② 전한 후기경과 함께 전국∼전한 중기의 고식경도 포함되어 있는 점, ③ 대량의 동경이나 청동기를 부장한 옹관묘가 있는 점, ④ 철기를 부장한 분묘가 출현하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야요이문화 후기전반이 되면 옹관묘에 方格規矩鏡이 부장된다. 후쿠오카현 이하라야리미조(井原鎚溝) 옹관묘0549)에서는 20면 이상의 방격규구경이 출토되었는데 그 중에서 18면이 복원 가능하였다. 이 방격규구경은 ‘漢有善銅’이나 ‘新有善銅’의 명문이 있는 전한 전기·新代의 동경이며 後漢代의 방격규구경은 포함되지 않는다. 또 사가현 사쿠라노바바(櫻馬場) 옹관묘0550)에서는 후기초두의 옹관에 방격규구경 2면과 철도·銅釧·把形銅器 등이 부장되어 있었다. 이 방격규구경 역시 후한대보다 약간 이른 신대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시기가 되면 분묘에 청동무기형 제기를 부장하는 예는 대부분 없어지고 생토 속에 매납하는 예가 늘어난다. 이들 청동제기의 연대결정은 용범이나 토기와의 동반 예에서 추정이 가능하다. 즉 중광형동모에 대해서는 사가현 야수나가타(安永田)유적0551)의 용범이 중기 말에서 후기초두로 편년되는 토기와 동반 출토되었으며, 對馬ハロウ A지점에서는 후기중엽의 5호 석관묘0552)에서 중광형동모가 출토되고 있어서 중기 말에서 후기중반에 해당할 가능성이 높다. 또 이 시기에는 한경을 모방한 방제경이 출현한다. 사가현 후타쯔카산(二塚山) 46호 옹관묘0553)에서는 철모와 함께 重圈文日光鏡系 방제경Ⅰb식이 출토되었다. 이것은 영천 어은동 출토거울0554)과 같아서 우리 나라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야요이 후기중반이 되면 한경을 부장한 분묘는 감소한다. 후기중반의 나가사키현(長崎縣) 카라카미(唐神)유적0555)에서 방격규구경이 출토되었으나 깨어서 구멍을 뚫은 破鏡이었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후기전반에서는 전한 말∼후한 전기의 방격규구경·細線式獸帶鏡 등이 부장되고 있으므로 후기중반에서는 후한중기의 四葉座內行花文鏡의 출토가 예상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엽좌내행화문경을 부장하는 분묘는 후기중반에는 거의 보이지 않고 후기후반에서 종말기 단계에 나타나므로 후기중반부터 전래되기 시작한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후한 세력의 쇠퇴와 관련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한경의 감소에 따라 키타큐슈에서도 방제경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방제경은 후쿠오카현 이이우지바바(飯氏馬場) 석관묘0556) 출토경과 같은 내행화문일광경계 및 중권문일광경계 방제경 Ⅱa식이다.
청동 제기는 이 시기 중광형에서 광형으로 변화한다. 나가사키현 쓰시마 토우노쿠비(對馬塔ノ首) 3호 석관묘0557)에서 후기중반에서 후반의 토기와 함께, 쓰시마키사카(對馬木板) 5호 석관묘0558)에서는 후기후반에서 종말의 토기와 광형동모가 동반 출토되었다.
야요이 후기후반에서 종말기가 되면 한경의 파경을 분묘에 부장하는 예가 많아진다. 종말기의 후쿠오카현 노카타나카바루(野方中原) 1호 석관묘0559)에서는 후한 후반의 半肉彫獸帶鏡이 출토되었다.
그러나 후쿠오카현 미쿠모테라구찌(三雲寺口) 2호 석관묘0560)에서 蝙蝠座內行花文鏡, 바바산(馬場山) 41a호 토광묘0561)에서는 雙頭龍文鏡 등 후한 중기의 거울이 출토되고 있으므로 약 100년간에 걸쳐 전래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종말기의 양상을 잘 나타내는 예로서 후쿠오카현 히라바루(平原) 분묘를 들 수 있다.0562) 여기서는 박제방격규구사신경이나 방제내행화문경 등 모두 39면의 동경이 출토되었다. 즉 기원후 1세기 중반경의 것이므로 일괄 유입된 뒤 약 200년 가까이 전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야요이 후기중반부터 보이는 동경의 전래는 종말기에는 거의 끝나고 곧 三角緣神獸鏡이라는 새로운 동경이 출현하여 전방후원분에 부장되기 시작한다. 그 배경에는 큰 사회 변동이 예상되며 이 시기 일본은 야요이시대가 끝나고 古墳時代를 맞이하게 된다. 특히 삼각연신수경에 ‘景初三年’(기원후 239년), ‘正始元年’(기원후 240년)이라는 기년명이 있어 야요이시대가 기원후 3세기 중반경에는 끝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기나이(畿內)지방에서는 중기 이후 특수한 청동제 銅鐸文化가 유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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