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Ⅰ
한국사의 전개과정에서 최초의 역사체로 등장하는 우리 민족의 명칭은 濊·貊·韓으로 대표되고 있으며, 이들이 정치적으로 성장하여 古朝鮮·夫餘·高句麗·東濊·沃沮 및 三韓 등이 되었다. 이들 국가는 우리 나라 역사의 序章을 장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民族史의 시발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한 이들은 후속하는 삼국시대의 고구려·百濟·新羅·加耶 및 주변 정치체들로 발전하여 민족사의 발전모태가 되었다. 따라서 이들 초기국가에 대한 연구는 우리 역사의 출발 무대와 범위를 규정하여 그 내용과 실체를 확인시켜 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하겠다. 특히 이들 초기국가는 우리 민족이 주변의 여러 민족과 구별되는 독자적 문화와 언어 및 민족의식을 공유하게 된 출발점이 되었다는 점에서 이들에 대한 검토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고조선·부여·동예·옥저 및 삼한 등 초기국가의 정치발전 수준과 성격에 대해서는 한국사에서의 國家 起源과 形成문제와 관련하여 많은 논의가 있었다. 특히 국가 성립 이전 단계 사회의 정치적 성격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어 部族國家論·城邑國家論이 제시되었고 인류학 이론에 바탕을 둔 君長社會(chiefdoms)論 등이 제기되어 국가 형성과정에 대한 다채로운 인식틀이 소개되었다. 국가(state)가 성립되기 직전의 계층사회·복합사회를 나타내는 chiefdoms이라는 용어는 君長社會·酋長社會·族長社會 등으로 번역되었는데≪三國志≫등의 사료에 나타나 있는 ‘君長’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군장사회’라고 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1970년대 이후 한국 고대사 분야에서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한 국가 기원 및 형성과 관련된 논의는 정치발전 단계론에 대한 서양 人類學界의 성과가 소개·수용되고, 종래 불신되었던≪三國史記≫초기 기록에 대한 신빙성이 새롭게 축적된 고고학적 성과에 의해 제고되면서 나타나게 되었다. 그 결과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성립된 국가를 고조선사회에서 구하게 되었다.
Ⅱ
우리 역사의 첫 출발을 논의할 때에 가장 먼저 지적되어야 할 부분은 民族形成에 관한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이에 관한 문제는 민족의 기원이나 移動과 관련하여 古朝鮮에 앞서 논의되어야 할 것이지만, 이 책에서는 우리 나라에서 고조선이 최초의 역사체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고조선과 이후의 초기국가만을 다루었다. 고조선은 형질적 민족 구성의 연원을 이루고 있고 또 우리 나라 역사의 서장을 열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특히 국가의 기원과 형성의 문제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 역사 무대의 범위가 비로소 정해지게 된다는 측면에서도 고조선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높다. 즉 한국사에서 최초의 국가로 파악되는 고조선은 우리 민족이 처음으로 국가라는 정치체를 형성하였을 뿐만 아니라 관련 집단의 주변 확산으로 후속 정치체의 모델과 중심축이 되었던 것이다.
고조선 관련 문제에서 주된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고조선의 기원과 연관되어 있는 建國神話이다. 檀君으로 상징되는 건국시조가 신화 차원의 존재인가 또는 역사적 존재인가 하는 문제는 고조선사회의 성격을 규정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같은 점에서 단군으로 상징되는 해당 사회의 성격은 현재 우리 민족 형성의 가장 원초적 모습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단군은 결코 신화적 존재가 아니라 역사적 실체를 단순화하고 신성화시킨 것으로서 일정한 역사적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최근 北韓學界는 기왕의 고조선 관련 입장을 번복하여 평양지역에 檀君陵이 존재하였음을 강조하고, 발굴을 통해 단군의 뼈와 관련 유물을 발견하여 단군의 실체를 확인하였다고 선전하고 있다. 이 문제는 보다 구체적인 자료의 확인이 요청되는 것으로서 어쨌든 단군의 의미를 새롭게 강조하였다는 점에서는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를 계기로 단군이 민족의 구심체로서 기능하였던 기왕의 역할이 다시 부각되기는 하였지만, 문제는 현실의 정치논리에 입각하여 단군을 이해하기보다는 단군이라는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여 역사적 의미와 위치를 考究하는 것이 선결되어야 할 것이다.
고조선과 관련하여 가장 많은 논란과 쟁점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중심지 문제였다. 이는 고조선의 중심지가 한반도 특히 平壤이었다는 平壤中心說과 遼東지역의 遼河 또는 大凌河였다는 遼東中心說로 나뉘어 논쟁이 지속되어 왔다. 고조선의 중심지 문제는 이미 중국의 北魏 때부터 논란이 되기 시작하여 우리 나라에서는 고려시대와 조선 초까지 각각의 입장이 유지되었고, 조선 중·후기에는 實學者들 사이에서도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져 많은 견해가 제시되었다. 이같은 전통 역사학자들의 논의를 바탕으로 일제의 식민통치하에서도 日本學者들과 民族主義 史學者로 나뉘어져 평양설과 요동설이 대립되어 왔다. 해방후 한국에서는 평양설이 주류를 형성하였고 북한학계에서는 상당한 논란 끝에 요동설이 1960년 초반 이후 정설로 채택되어 1990년대까지 유지되었다. 이같은 상황이 1980년대 중반에 이르러 한국학계에서 요동중심설에 관한 견해가 소개·부연되면서 고조선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논쟁을 불러 일으켜 평양설과 요동설 및 이동설이 다시 검토되었다. 한편 북한학계에서는 1993년 평양지역에서 이른바 단군릉의 발견과 이의 발굴을 계기로 하여 기왕의 요동설과 완전히 배치되는 평양중심설이 다시금 주장되고 있다. 어쨌든 고조선의 중심지 문제는 보다 심도있는 고고학적 자료의 검토와 문헌 자료에 대한 정확한 해석을 통해 재검토될 소지가 많으며, 앞으로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부분의 하나이다.
한편 고조선의 고고학적 기반 문화에 대해서는 종래 언급되었던 바와 같이 靑銅器文化의 내용과 성격을 중심으로 논의되고 있다. 특히 그 표지유물로서 琵琶形銅劍文化에 관한 논의가 중심을 이루고 있는데, 비파형동검은 지역적으로 遼東, 遼西, 吉林·長春, 韓半島圈으로 나누어 파악되고 있다. 문제는 비파형동검의 기원지를 어디에 두는냐 하는 것인데 이에 대하여 중국학계에서는 요서로 보아 중국의 영향을 염두에 둔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비해서, 남북한학계에서는 요동지역으로 파악하여 고조선의 독자적 문화와 이 문화의 중국지역으로의 확산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비파형동검문화가 발전한 형태인 細形銅劍文化가 한반도지역을 중심으로 일부 중국 동북지역에서도 나타나고 있어 이에 대한 해석문제도 논란이 되고 있다.
이와 함께 고조선의 기반 문화를 반영하는 중요한 고고학적 자료로서 支石墓文化가 지적될 수 있다. 기왕의 연구에서 단편적인 언급이 있었으나 한반도와 요동반도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에 중국 내륙과는 구별되는 지석묘가 분포하고 있다는 사실은 고조선문화가 토대를 두고 있는 고고학적 기반을 암시해주는 것이다. 이 문화가 발전하여 형성된 石棺墓·石槨墓·積石塚 등에서 비파형동검이 집중적으로 반출되고 있다는 점에서 지석묘는 비파형동검문화를 배태시킨 모체이며 이 지석묘문화가 바로 고조선을 출현케 한 기반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Ⅲ
고조선의 명칭은≪管子≫등의 先秦시기 문헌에 이미 기원전 7세기경부터 언급되고 있으며, 戰國時代인 기원전 4세기경 燕나라와의 갈등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당시에 국가적 수준의 정치체로서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고조선은 기원전 3세기경에는 연나라 장수 秦開에 의해 서방 2천여 리의 땅을 빼앗기기는 하였으나 의연히 국가의 체제를 유지하여 이후 秦·漢과도 계속 교류하였다.
기원전 198년 衛滿은 고조선의 準王을 축출하고 보다 강력한 국가인 衛滿朝鮮으로 성장하여 한에 대하여 外臣이라는 방식으로 조공체계에 편입되었으며 한편으로는 주변세력을 복속시켜 나갔다. 위만조선은 변방 정치집단들의 한나라와의 교역을 중계하여 中繼貿易의 이익을 독점하였으며, 또한 匈奴와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여 한에 대한 위협세력으로 급성장하였다. 이같은 상황은 한의 위만조선 침공이라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결국 위만조선은 2년여에 걸친 전투 끝에 내부의 갈등에 의해 붕괴되고 말았다.
그러나 참전한 한의 장군 4명 가운데 3명이 참형을 당하고 1명만이 살아남아 庶人으로 신분이 강등되었다는 사실은 漢 武帝의 위만조선 정벌이 결코 승리한 전투가 아님을 반영해주는 것이다. 또한 한나라는 위만조선지역에 있던 기존의 토착적 정치세력 집단의 판도를 활용하여 4郡을 설치하였고, 나아가 한의 4군에서 주화파세력들이 侯로 임명되어 정치적 대우를 받았음을 감안할 때 이같은 사실은 더욱 명료해진다. 또한 漢四郡은 사료상으로 약 26년 정도 존재하였을 뿐이고 대부분이 곧 폐지되거나 중국내륙으로 이동하였으며, 단지 樂浪郡만이 존속되어 중국과의 연결 창구와 중국문화 유입의 통로 구실을 하였다. 그러므로 한사군은 위만조선 내부의 지배세력 재편과 연결되어 나타난 친중국계 정권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위만조선지역에 설치된 한의 郡縣은 고조선 및 주변세력에 대한 통제와 한의 직접적 지배를 위한 것이었으나, 이같은 의도는 토착사회의 반발과 공격에 의해 좌절되었다. 그리고 한4군의 성격도 중국계 유이민의 자치세력 또는 중계무역의 중심지 같은 존재였다고 할 수 있으며, 그것도 後漢대에는 고구려의 압박으로 더 이상 기능을 수행할 수 없는 상태로 전락되어 결국 소멸되었다. 따라서 낙랑군 등의 존재는 한의 직접적 지배라는 정치적 의미보다는 文化中繼地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옳으리라 생각된다.
Ⅳ
고조선과 함께 우리 역사의 중심축을 이루었던 존재 가운데 하나가 夫餘이다. 부여를 형성한 고고학적 문화는 白金寶·漢書·西團山文化 등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들 문화는 松嫩平原과 吉林지역을 중심으로 土壙木槨墓를 사용하여 철기 등을 반출하고 있다. 부여의 先住세력으로 믿어지는 槀離國은 기원전 4∼3세기부터 사료에 나타나고 있어 부여의 역사가 매우 깊었을 뿐만 아니라 일찍부터 중국과 교류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고조선이 중국과의 대립으로 일찍 소멸된 것에 비하여 부여는 비교적 오랜 기간 유지되어 후속하는 여러 정치체의 하나의 연원이 되었다. 즉 고구려와 백제는 부여의 別種으로 기록될 정도이며 실질적으로 고구려와 백제의 왕실이 모두 부여계통임을 천명하고 있다. 또한 東明으로 대표되는 부여의 건국신화는 고구려와 백제가 모두 이를 공유하고 있다. 그리고 부여는 주변의 東沃沮와 挹婁 등을 臣屬시켜 동북지역 역사전개의 중요한 축으로서 기능하였다. 부여는 급성장한 고구려 등 주변 정치세력의 영향으로 비록 중앙집권적 국가로 성장하지는 못하였지만 우리 역사에 등장하는 여러 초기국가의 성립과 성장에 큰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부여는 선비족 모용씨의 침공으로 4세기 중·후반에 심각한 타격을 받은 뒤 결국 5세기 말에는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한편 부여가 멸망한 후 그 후예들이 舊北夫餘의 고지에서 豆莫婁國을 세웠는데 두막루국은 8세기경까지 존속하였다고 한다.
東濊는 한반도 동북지역의 무문토기문화를 기반으로 하여 동해안지역의 濊族이 성장하여 세운 국가이다. 이 지역에서는 孔列土器가 반출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공열토기문화는 기원전 3세기 이후에 細形銅劍文化와 활발한 접촉을 하였다. 즉 동해안 북부지역에서 출토된 청동유물은 대동강유역의 청동기문화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청동기문화를 토대로 하여 독립된 정치형태로 발전한 것이 바로 동예이다. 동예는 漢郡縣과도 빈번하게 접촉하였으며 특히 고구려와 언어·법속이 같았다고 한 것으로 보아 고구려와도 긴밀한 관계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동예는 虎神을 숭배하였다고 했는데 이는 단군신화의 곰숭배와 대비되는 것으로서 동예에 독특한 문화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沃沮는 東沃沮로도 불렸는데 남과 북으로 중심권이 나뉘어져 있어서 대개 남·북옥저로 이해되고 있다. 이들의 지리적 위치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들이 개진되었는데 대개 동해안의 북쪽에서 興凱湖지역까지 걸쳐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옥저의 명칭은 玄菟郡이 옥저성에 설치되었다는 기록에서 처음 볼 수 있는데, 이는 요동에서 동해안으로 연결되는 교통로상에 옥저가 자리잡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지역은 고고학적 유물의 면에서는 동예와 같이 공열토기로 대표되는 동북지역 무문토기문화의 분포지역이다. 또한 이 지역에서 출토되는 고고학적 유물은 중국계 철기문화와 연결되는 것이라고 한다. 특히 평양 정백동에서 출토된 ‘夫租薉君’ 등의 인장은 옥저가 한군현에 의해 통제되었던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한편 옥저는 이후 고구려에 臣屬되어 정치적 성장을 이루지 못한 채 각종 생산물을 수취당하는 집단예속민으로 전락되고 말았다.
Ⅴ
三韓사회는 청동기문화 단계 이래 한반도 중남부지역에 성립되어 있던 토착사회가 성장 발전한 것이다. 삼한사회는 이에 앞서 있었던 辰國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데 진국은 세형동검문화에 기반을 둔 사회였으며 삼한사회는 이를 계승·발전한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진국은 위만조선과 같은 시기에 존재한 것으로 보아 늦어도 기원전 2세기 이전에 출현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진국은 韓으로 통칭되기도 하였는데 점차 馬韓·辰韓·弁韓으로 대표되는 정치집단을 구성하였다. 문헌 자료에 나타나 있는 ‘韓’은 우리 민족을 지칭하는 통칭 가운데 하나였는데 점차 시대를 내려오면서 지역 및 정치세력의 명칭으로 사용된 것으로 이해된다. 삼한의 명칭 및 형성과 관련하여 요동지역에 이미 존재하고 있던 北三韓이 남하·이동하여 南三韓이 되었다고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
삼한으로 통칭되는 78개 ‘國’의 성격에 대해서는 고대사회의 정치발전 단계론에 입각한 국가의 기원 및 형성과 관련하여 논의가 진행되어 왔다. 삼한 각 ‘국’의 통치체계는 臣智를 정점으로 하고 밑으로 邑借에 이르기까지 몇 단계로 서열화되어 있었는데, 이는 당시 삼한의 정치조직이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또한 삼한 각국의 통치계층들이 중국세력으로부터 그들의 위상에 대응하는 작호를 사여받았다는 것도 삼한사회의 정치발전 수준을 말해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삼한사회의 주된 생산경제는 농경으로서 삼한은 농업사회의 일반적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사료에 나타나는 삼한시대의 작물로는 五穀과 稻가 있으며 이밖에 누에와 뽕을 쳐서 縑布를 제작하였다. 또한 소와 말 그리고 돼지가 사육되었으며 이 밖에 닭 등의 가축도 사육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삼한사회의 생산활동이 매우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삼한의 종교문화는 기본적으로 샤머니즘적 속성을 보여주고 있다. 삼한에는 別邑인 蘇塗와 이를 주관한 것으로 믿어지는 天君이 따로 있었으며 파종이 끝난 5월과 추수기인 10월에 각각 祈豊祭와 秋收感謝祭를 지냈다고 한다. 이는 농경사회인 삼한사회의 종교양상이 天神으로 대표되는 농업신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金貞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