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고대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1. 고구려의 기원
        • 2.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1) 성립
            • (1) 나집단의 성장
            • (2) 나부체제의 성립
          • 2) 발전
            • (1) 국가체제의 정비
            • (2) 영역의 확대
      • Ⅱ. 고구려의 변천
        • 1. 체제정비
          • 1) 체제정비의 배경
          • 2) 소수림왕대의 체제정비
            • (1) 불교의 도입과 태학의 설립
            • (2) 율령반포의 의의
          • 3) 4세기말 이후의 체제정비
        • 2. 영토확장
          • 1) 요동 방면
          • 2) 백제 방면
          • 3) 신라 방면
          • 4) 낙랑·대방군 고지
          • 5) 기타 지역
        • 3. 5∼6세기의 대외관계
          • 1) 중국의 남북조와의 관계
          • 2) 백제·신라와의 관계
        • 4. 후기의 정세변동
          • 1) 한강유역의 상실
          • 2) 왕권의 쇠퇴와 귀족연립정권의 성립
      • Ⅲ. 수·당과의 전쟁
        • 1. 수와의 전쟁
          • 1) 수와의 관계
          • 2) 고구려의 요서 공격
          • 3) 수의 침입과 고구려의 살수대첩
        • 2. 당과의 전쟁
          • 1) 당과의 관계
          • 2) 초기 전쟁(645)
          • 3) 중기 전쟁(647∼665)
          • 4) 말기 전쟁(666∼668)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1. 중앙통치조직
          • 1) 관등과 관직
            • (1) 초기 관등제와 관직
            • (2) 4∼7세기 관등제와 관직
          • 2) 합좌제도
            • (1) 제가회의
            • (2) 귀족회의
        • 2. 지방·군사제도
          • 1) 지방제도
            • (1) 초기의 지방통치제
            • (2) 「성·곡―촌」제의 성립
            • (3) 성단위 지방통치제
          • 2) 군사제도
            • (1) 군사조직의 변화
            • (2) 군사훈련과 병종
          • 3) 성곽시설
        • 3. 경제구조
          • 1) 토지제도
          • 2) 조세제도
            • (1) 조(租)와 조(調)
            • (2) 부역
          • 3) 산업
            • (1) 농업
            • (2) 수공업
            • (3) 상업
            • (4) 목축업
        • 4. 사회구조
          • 1) 신분제
            • (1) 귀족
            • (2) 중·하급 지배층
            • (3) 호민
            • (4) 평민
            • (5) 노비
          • 2) 법률과 풍속
            • (1) 법률
            • (2) 풍속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개요

 고구려를 세운 족속에 대해 중국 문헌에서는 이를 맥족이라 하였다. ‘貊’은 先秦文獻의 여러 군데에 등장한다. 그래서 맥족의 기원을 북중국방면에서 찾고, 그 맥족이 동으로 이동하여 와서 고구려를 세웠다는 견해가 일찍부터 제기되었다. 그러나 선진문헌에 자주 등장하는 맥족은 고대 황하유역의 주민들이 그 북방의 족속들을 지칭하던 일종의 汎稱으로서, 특정한 족속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북중국방면의 족속의 이동에서 고구려의 기원을 추구하는 것은 별다른 근거를 지녔다고 보기 어렵다. 고구려를 세운 이들의 기원에 대한 탐구는 일단 현재로서는 압록강유역의 적석총의 기원을 살펴보는 것이 가장 유효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압록강 중류 유역 일대에는 초기 형태의 소박한 무기단 적석총에서부터 장군총과 같은 장대한 규모와 정제된 형식을 지닌 계단식 적석총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변화과정을 나타내는 여러 양식의 적석총이 존재하고 있다. 근래 이 적석총의 기원을 요서지역의 牛河梁유적 등에서 찾아, 紅山文化를 이룩한 족속의 일부가 동으로 이동하여 압록강유역에 정착하여 고구려를 세우게 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제기되기도 하였다. 고구려 적석총의 기원을 요서지역의 홍산문화에서 찾기에는 양자 간의 시간적 간격이 워낙 커서 수긍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오히려 고구려 적석총의 기원과 연관을 지녔을 개연성이 큰 것은 요동지역의 적석총이다. 특히 寬甸縣·鳳城縣 등지에서 발견되는 적석총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桓仁·集安지역의 그것과 연결되어 있고 청동기유물의 양식 면에서도 공통되는 면을 지녀 주목된다. 한편 토기에서도 압록강유역의 그것과 요동지역의 미송리형 토기나 길림지역의 서단산문화의 토기가 양식상 통하는 면을 보여 주목되는 바이다. 이런 면들은 고구려의 기원 및 고조선·부여와의 관계 등에 대한 고찰에서 간과할 수 없는 요소라 하겠다.

 환인·집안 일대에 기원전 3세기 이후 철제 농기구가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철제 도끼는 벌목을 용이하게 하여 개간을 촉진하였고, 낫은 수확의 효율성을 높였다. 또한 이 무렵에는 중국 군현과의 교역이 진전되었다. 무기단 적석총에서 발견되는 명도전 등의 화폐는 그런 일면을 나타내 준다. 철제 농기구의 사용에 따른 농업생산력의 증대와 외부와의 교역은 압록강 중류지역 주민집단의 성장을 촉진시켰고, 그러한 가운데서 새로운 정치적인 움직임이 태동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미처 그런 움직임이 성숙하기 전에 한제국의 침공으로 이 지역에 현도군이 설치되었다.

 기원전 107년 설치된 현도군은 얼마 안가서 토착민의 저항으로 퇴축되어졌다. 기원전 75년 이후 소노집단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연맹체가 형성되었는데, 그 집권력은 강하지 못하였다. 이어 계루집단이 고구려연맹체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계루집단의 출자와 등장과정에 대하여,<광개토왕릉비>에서는 주몽이 북부여에서 이주하여 건국했다고 하였다. 그런데 오늘날 부여의 중심지가 있었던 길림시 일대에서 확인되는 무덤양식은 석관묘에서 토광묘로 이어지는 것으로서, 고구려의 적석총과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그리고 부여방면으로부터 이주한 일단의 집단에 의한 새로운 정치체의 형성을 뒷받침할 만한 큰 규모의 석관묘의 무덤떼가 압록강 중류 유역에서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면과 주몽설화의 기본 줄거리가 부여의 동명설화를 대폭 차용하였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주몽설화의 사실성을 부정하는 견해가 학계 일각에서 제기되어 왔다.

 사실 압록강 중류지역의 맥족의 묘제는 부여지역의 예족의 그것과 큰 차이를 보인다. 그런 면에서 두 지역의 주민이 分岐된 것이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였다는 추정은 일정한 설득력을 지닌다. 그런데 이와 같은 두 지역의 묘제의 상이성에도 불구하고,≪삼국지≫고구려전에서는 고구려가 부여의 한 갈래라는 전승이 있어 왔음을 전한다. 이는 곧 부여방면에서 이주한 집단이 고구려를 건국하였다는 주몽전승의 중심적인 요소가 3세기 이전부터 전해져 왔음을 의미하며, 주몽전승의 일정한 사실성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3세기 이전부터 있어 온 그런 전승을 4세기 후반 소수림왕대에 부여의 동명설화의 내용을 대폭 차용하여,<광개토왕릉비>에 전하는 형태의 주몽전승이 정립되었던 것이다. 다시 고구려 후기에 주몽이 북부여가 아니라 동부여에서 출자하였다는 서술이 덧붙여졌다. 압록강 중류지역에 석관묘나 토광묘가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예가 보이지 않는 것은 계루집단의 이주·정착과정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즉 급속한 정복과 건국이 아니라, 선주민과 연합하면서 서서히 두각을 나타냄에 따라, 묘제상에서도 급격한 문화적 단층을 나타내지 않았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한 면은 주몽설화 자체에도 반영되어 있다. 毛屯谷의 토착 수장들과 연합하고 그리고 주몽이 졸본의 召西奴와 결혼하였다는 것은 그러한 면을 나타낸다.

 계루집단이 압록강 중류지역의 ‘那’集團들을 통합하는 과정은 대내외적인 진통을 동반하였다. ‘나’집단 간의 상호 갈등과 대립, 한군현의 무력개입과 분열책동 등에 따라 1세기 중반 장기간에 걸친 혼란상태가 지속되었던 것 같다. 그것을 수습하고 계루부 왕실이 중심이 된 집권력을 확립하였던 것이 태조왕이었다. 태조왕대에 이르러 여러 ‘나’집단들은 다섯으로 통합되어졌다. 그 다섯 개의 집단은 계루부 왕실에 의해 외교·무역권 등 대외교섭권을 박탈당하였으나, 집단 내부의 일에 대해서는 자체의 관원을 두어 자치를 하였다. 이 다섯 집단이 곧 5部이다. 이들 고유명 부를 뒷시기의 수도의 행정구획단위인 방위명 부와 구분하여 ‘那部’라고 명명하기도 한다.

 태조왕대 이후 고구려의 정치정세는 각 부의 자치력과 중앙정부의 집권력 상호간의 관계에 의해 진전되어졌다. 그것은 한편으로 계루부 자체 내에서 왕과 여타 왕족 大加들간의 관계와 밀접한 연관을 지니는 것이었다. 왕권과 대가들의 권력, 중앙정부의 집권력과 각 부의 자치력은 상호 대립과 갈등을 일으키기도 하였고, 거기에다 중국 군현의 힘이 작용할 경우 때로는 집단적인 이탈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그런 가운데서 점차 왕권과 집권력이 강화되어가는 면을 나타내었다. 왕위는 초기에 형제계승의 면을 보이다가 山上王 이후 부자계승으로 정착되어졌다. 이는 왕권이 안정·강화되어졌음을 의미하며, 그에 비례하여 왕족 대가들의 권력이 상대적으로 약화되어졌다. 자치적이었던 각 부에 대해서도, 각 부의 관원의 명단을 왕에게 보고하게 하는 등 통제를 강화하여 갔다. 그러나 3세기초까지도 소노부가 독자적으로 농업신과 지역수호신 및 조상신에 제사지냈음에서 보듯, 각 부는 독자적인 운동력을 상당히 유지하고 있었다.

 한편 각 부내에도 하위의 작은 자치체들이 존재하여, 부를 구성하는 단위를 이루었다. 椽那部를 구성하였던 4개의 하위 단위들이 그런한 면을 보여준다.

 이렇듯 고구려 초기의 정치구조는 자치체들을 누층적으로 결집한 형태의 것이었다. 왕권으로 상징되는 집권력은 이들 각 자치체들을 결속하는 일차적인 힘이었다. 그러나 아직 왕권은 각 부의 자치력을 해체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지 못하였다. 그런 가운데서 각 자치체간의 갈등을 조절하고, 국가의 주요정책을 결정하는 데 있어 주요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이 귀족회의였다. 왕실의 대가들을 위시해 각 부의 수장들을 포함한 諸加會議가 그것이다. 이 회의체는 조정의 집권력을 보완하여 국가적 통합력을 높였으며, 일면으로는 왕권을 견제하였다.

 東盟祭 등의 祭儀 또한 국가적 통합력 유지에 주요한 기능을 하였다. 동맹제는 일종의 추수감사제였다. 10월에 개최된 동맹제에서 日神과 농업신인 隧神에게 제사하여, 한해의 풍성한 수확에 대한 감사를 드림과 함께 다음해의 풍년을 기원하였다. 이 제의에서 왕은 최고 사제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왕이 집전하여 수도에서 개최된 동맹제에 각 부의 귀족들이 참가함은 곧 왕실의 권위에 복종함을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행위였다. 제의 때에 각지에서 올라온 이들에 의한 다양한 놀이가 베풀어졌을 것이며, 문물의 교역과 교류 또한 많이 행해졌을 것이다. 이런 면들을 통해 5부인들간에 정서적인 융합과 사회적인 통합이 진전되었다.

 한편 태조왕대 이후 고구려는 대외적으로 팽창하여 동해안의 옥저와 동예의 여러 읍락들을 복속시켰다. 동북쪽으로 두만강유역에 진출을 도모하였고, 부여에 대해서도 공세적인 우위를 확보하였으며, 일부 말갈계 주민들을 복속시켰다. 서쪽으로는 요동군과 현도군 등의 한군현과 치열한 상쟁을 되풀이하였다. 고구려가 정복한 주민들에 대해서는, 읍락단위로 자치를 영위케 하고 그 수장을 통해 간접적으로 지배하며, 공납을 징수하였다.

 대외적인 팽창에 따라 막대한 물자가 유입되어 들어왔다. 이는 사회분화를 진전시켰다. 그리고 후한대의 철제 보습이 집안지역에서 발견되는 것을 보아, 3세기경에는 犂耕이 일부 지역에서 도입되었던 것 같고, 그러한 농경 기술상의 진전은 생산력의 증대를 가져와, 사회분화를 촉진하였다. 2세기 후반 또는 3세기 전반에 고구려에는 坐食者가 만여 명이 되었다. 이들은 지배계급으로서 戰士團을 구성하였다. 이런 사회분화의 진전은 친족집단 구성원간의 공동체적 관계를 약화·축소시켰다. 왕위의 부자계승이 확립되고, 娶嫂婚이 점차 소멸되어 가는 추세를 보이는 것도 이와 연관된 현상이었다. 部와 部內部 등의 자치력의 토대 또한 크게 약화되어 갔다.

 4세기에 접어들면서 晉이 붕괴되고 유목민들의 이동과 정복활동이 활발해짐에 따라 동아시아 전체가 격동하였다. 그런 국제적인 혼란기를 맞아 고구려는 급속히 대외적으로 팽창을 해나갔다. 미천왕 14년(313)에 낙랑군과 대방군을 병탄하고, 이어 요동평야의 지배권을 놓고 慕容燕과 각축을 벌여 나갔다. 북으로는 부여를 압박하여 길림 일대를 장악하였다. 이런 대외적인 팽창은 4세기 후반 서쪽에서는 모용연의, 남에서는 백제의 강력한 반격을 받아 오히려 국가적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이런 위기를 극복하고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를 구축하기 위하여, 소수림왕대에 일련의 개혁을 도모하였다. 율령을 반포하고 태학을 세우며 불교를 공인하였다. 그리고 고구려국가와 왕실의 존엄성과 정통성을 기리는 건국설화를 정립하였다. 주몽설화는 그러한 건국설화의 일부분이었다. 아울러 이 때에 태조왕을 사실상의 시조로 하던 기존의 왕계에다, 그 이전에 존재하였던 鄒牟王계를 접속시켜, 추모왕을 시조로 하는 왕계를 정립하였다. 그것이<광개토왕릉비>에 보이는 왕계이며,≪삼국사기≫에 전하는 고구려왕계이다. 건국설화와 왕계의 정립과 함께, 소수림왕대에 역사서가 편찬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중앙집권적 국가체제의 구축은 제도적인 측면에서는 관등제의 확립과 지방제도의 정비에서 그 일면을 살필 수 있다. 3세기까지의 部體制 아래에서 중앙의 왕실 뿐아니라, 각 부의 대가들도 자신의 관원을 두었다. 이제 부의 자치력이 소멸되고 각 부의 수장들은 제거되거나 중앙귀족으로 전신하였다. 그에 따라 이들을 편제하는 일원적인 관등제가 만들어졌다. 그것은 兄類와 使者類의 관등을 기본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미 3세기말에는 형류의 관등이 나타나는데, 그것이 4세기대를 거치면서 분화되어 나갔다. 그 완성형태가 14등 관등제이다. 관등제에서는 5등계인 皂衣頭大兄과 6등계인 대사자 사이에 층이 지는데, 이는 출신 신분에 따라 승진에 일정한 한계가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진다.

 지방행정단위가 설치되어지던 초기에는, 대체로 보아 原高句麗인 5부지역에서는 5부의 자치력이 소멸되어진 이후 5부를 구성한 하위단위였던 谷과 같은 상대적으로 작은 곳에 지방관이 파견되었던 것 같다. 반면 새로운 정복지역에는 교통로를 따라 주요한 곳에 성을 쌓고 보다 광역을 통괄하는 지방관이 파견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아무튼 4세기말 5세기초에는 새로이 병합한 변경지역에는 ‘守事’가 파견되어졌다. 광개토왕대에 북부여에 파견된 令北夫餘守事 牟頭婁는 그 구체적인 예이다. 한강유역의 古牟婁城守事도 그러하다. 수사가 파견된 지역의 행정단위 명칭은 통상적으로는 성이라 하였는데, 아마도 어느 시기에는 ‘郡’이라고도 하였던 것 같다. 무관직에 ‘郡頭’가 있음은 그런 면을 말해준다. 고구려는 5세기 후반 한강유역 전체를 차지한 후, 이 지역에 군에 상응하는 16개의 성을 두었다. 郡級의 城 아래에는 縣級의 소성이 있고 그 아래에 촌이 있었다. 군현이라는 명칭 자체를 사용하였는지는 단정하기 어렵지만, 지방지배의 형태와 성격이란 측면에서 볼 때, 군현제의 시행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군현제의 시행은 곧 해당지역의 인민과 토지를 중앙정부가 직접 장악하는 것을 뜻한다. 이는 고구려 초기에 피복속민들을 읍락별로 예속시켜 공납을 징수하던 간접지배 방식과 뚜렷한 차이를 나타낸다. 5세기 이후 고구려의 지방제도의 운영과 민에 대한 구체적 지배양태를 전하는 기록이 거의 없어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그런데<단양적성비>에 보이는 ‘佃舍法’·‘小女’·‘赤城烟’ 등은 고구려의 율령에 의거한 조처였던 것을 신라가 이 지역을 점령한 직후 습용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비록 전사법 등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이를 통해 지방관을 통한 지역지배가 기본적으로 율령에 의해 규정되어지는 면을 지녔으리라는 점은 추측할 수 있다. 5∼6세기에 고구려 영토내의 여러 지역간에는 발전의 불균등성이 상당히 있었고, 주민집단간의 상이성도 상당하였을 것이므로, 어느 정도 널리 지방관에 의한 율령적 지배가 행해졌을 것인지는 추단하기 어렵다. 다만 농경이 발달한 선진적 지역에서는 지방관에 의한 지배가 관철되었을 것이며, 그러한 방향으로 지방지배가 진전되어 가는 추세였음은 인정할 수 있겠다.

 대외적으로 5세기초 이후의 고구려는 그전 시기나 6세기 후반 이후와는 달리 중국 및 몽고고원의 국가들과 백년 이상의 긴 기간에 걸쳐 직접적인 무력충돌 없이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것이 가능하였던 것은 이 시기 고구려의 강한 국력이라는 주체적 조건과 아울러 당시 동아시아의 국제정세가 다원적 세력균형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객관적 여건이 함께 작용하였기 때문이었다. 장기간에 걸친 대외적 평화와 안정은 대내적으로 그 영역내에 포괄하고 있던 다양한 문화를 지닌 여러 계통의 족속들을 융합하여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는 데에 매우 긍정적인 작용을 하였다.

 고구려의 대내외적 정세는 6세기 중반 이후 큰 변화를 맞게 되었다. 安原王 15년(545) 말, 양원왕의 즉위를 둘러싼 귀족들간의 무력충돌은 그 뒤에도 상당기간 그 여파가 지속되었다. 이런 고구려의 내분을 틈타 양원왕 7년(551) 백제와 신라의 연합군이 한강유역을 공략하였다. 이어 북제와 돌궐의 외교·군사적 압력이 밀려들었다. 내우외환의 위기 속에서 고구려귀족들은 그들간의 내분을 타협을 통해 수습하였다. 실권자의 직인 大對盧를 귀족들이 선임하는 귀족연립정권체제가 그것이다. 이 체제의 기본적인 틀은 고구려 말기까지 지속되었다. 주요 국정은 1등계인 대대로에서 5등계인 조의두대형에 이르는 다섯 관등을 지닌 고위귀족들의 합좌회의에서 처결하였다.

 귀족연립정권하에서도 중앙집권체제는 유지되었다. 고구려 말기에 수도는 5부로 구획되어 있었고, 지방은 176개의 성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 중 62개 성이 큰 성으로서 도독과 자사에 각각 비유되는 褥薩과 處閭近支가 그 성주였고, 현령에 비유되는 婁肖에 의해 통치되는 나머지 작은 성들이 그에 예속되어 있었다. 병열적 존재인 욕살과 처려근지는 군정과 민정을 아울러 관장하였고, 주요 지방관의 치소인 성은 군사적 거점이기도 하여, 행정조직이 군사조직적 성격을 함께 지녔다. 지방관은 관내의 민에 대한 인두세의 부과 외에도 빈부의 차등에 따라 3등으로 나눈 戶租를 부과하여 조세제가 좀더 진전된 모습을 보였다.

 소수 귀족들에 의한 이러한 과두체제는, 대대로의 선임이 여의치 않을 때는 무력상쟁을 통해 결정하였음에서 보듯, 경우에 따라서는 그들간의 갈등이 대규모 유혈정변으로 진전될 수 있는 소지를 늘 내포하고 있었다. 연개소문의 정변은 그러한 대표적인 예이다.

 6세기 중반의 대외적 위기는, 신라와 밀약을 맺어 한강유역과 동해안을 포기하는 대신 남부국경선에 안정을 얻고, 주력을 서북쪽으로 돌려 돌궐의 침공을 저지하여 극복해 나갔다. 그러나 6세기 종반 수나라가 중국대륙을 통일하고 몽고고원을 석권하는 등 동아시아 국제정세에 근본적인 변화가 있게 되자, 고구려의 안위는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수는 동북아시아지역에서의 고구려의 패권을 인정치 않았고, 중국 중심의 일원적 세계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팽창책을 추구하였다. 수의 영향력 증대에 따라 고구려 휘하의 일부 거란족과 말갈족이 수나라로 이탈해 갔고, 나아가 수는 고구려의 완전복속을 요구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고구려는 전쟁의 길을 택하였다. 이후 통일중국 제국과 고구려 사이에 각기의 명운을 건 장기간의 전쟁이 벌어졌다. 한편 신라와의 상쟁도 치열해졌다.

 고구려와 수·당간의 전쟁의 파고와 한반도내에서의 신라와의 상쟁의 물결이 처음에는 각각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두 물결이 7세기 중반 하나로 연결되면서 종국을 향한 급속한 상황 전개가 있게 되었다. 즉 보장왕 4년(645) 당은 고구려에 대한 대규모 침공을 감행하였다가 패배하였다. 이후 당은 단기적인 원정으로서는 고구려를 멸망시키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장기 소모전으로 전환하여 소규모 부대로 고구려의 변경을 치고 빠지는 전략을 구사하여 고구려를 피폐케 하였다. 그리고 고구려 남부의 국경선에 제2전선을 구축하고자 하였다. 한편 이 시기 신라는 백제의 공세로 영역을 크게 상실하자, 고구려와 和約을 맺어 난국을 타개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평양성에서 있었던 김춘추와 연개소문의 담판이 실패하자, 김춘추는 당으로 건너갔다. 마침내 신라와 당은 강력한 군사동맹을 맺었고, 그 결과는 먼저 백제의 멸망으로 가시화되었다. 이제 고구려는 남부와 서부에서 강력한 적을 맞게 되었으니, 백제의 멸망으로 행동이 자유로워진 신라군의 지원을 받아 당군은 겨울철 작전까지도 감행하게 되었다. 수·당군이 지녔던 최대의 약점인 긴 보급선의 문제는 크게 보완되어졌다. 반면 고구려의 전략적 위치는 치명적으로 약화되었다. 오랜 전란으로 피폐해진 상태에서 연개소문 사후 그의 아들들이 벌인 내분은 고구려의 종말을 재촉하였다.

 보장왕 27년(668) 평양성이 함락되고 고구려 영역은 일단 당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한반도에 침입한 중국의 왕조가 이 땅에 그 통치기구를 설치한 것은 이것이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기원전 108년 한제국이 1년여의 공방전 끝에 위만조선의 왕검성을 공략하고 평양지역에 낙랑군을 설치하였던 것이 그것이다. 낙랑군은 그 뒤 400여 년 동안 그 명맥을 유지하였다. 이번에는 당제국이 평양성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수와 당 두 왕조가 고구려의 평양성을 함락시키는 데에는 70여 년이 소요되었고, 그나마 신라의 도움을 받아 비로소 가능하였다. 하지만 안동도호부는 불과 8년 만에 신라에 의해 쫓겨나게 되었다. 이런 현상은 우연한 것이 아니다. 삼국시기를 거치면서 고대 한국사회가 모든 방면에서 성장한 결과인 것이다. 그런 성장을 선도하여 나갔던 것이 고구려였다.

 기원전 108년과 기원후 676년 사이, 즉 위만조선의 멸망 이후부터 신라의 한반도 통일까지의 기간은 고구려의 존립기간과 거의 일치한다. 이 시기에 고구려가 이룩한 제도와 문물은 백제와 신라의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고구려의 멸망 이후 통일기 신라와 발해에 계승되었다. 한편으로 고구려의 지배 아래 있었던 말갈족의 여러 집단에게도 큰 영향을 끼쳐 그들을 성장시키는 밑거름이 되었다. 이런 면에서 고구려사는 고대 동북아지역의 족속과 문화의 여러 흐름이 합류하여 들어왔다가 다시 이에서 흘러나갔던 거대한 호수와 같은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

<盧泰敦>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