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고대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2. 백제의 성립과 발전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1. 백제의 기원
          • 1) 백제 초기사를 보는 시각
          • 2) 건국설화
          • 3) 건국집단의 기원과 주민구성
            • (1) 건국집단의 기원
            • (2) 주민구성
        • 2. 백제의 성립과 발전
          • 1) 백제국과 목지국
          • 2) 백제국 성장의 배경
          • 3) 백제국의 성장
          • 4) 정복전쟁과 마한통합
      • Ⅱ. 백제의 변천
        • 1. 한성시대 후기의 정치적 변화
          • 1) 한강유역의 상실
            • (1) 왕위계승 분쟁과 왕권의 쇠퇴
            • (2) 개로왕대의 왕권강화 시도와 파탄
          • 2) 백제와 신라의 동맹
        • 2. 웅진천도와 중흥
          • 1) 동성왕의 활동
            • (1) 웅진천도와 정정의 불안
            • (2) 웅진시대의 정치적 변화상
            • (3) 동성왕의 왕권강화책과 신진세력의 등장
          • 2) 무령왕의 활동
            • (1) 무령왕의 출자와 즉위과정
            • (2) 무령왕의 왕권안정을 위한 시책
        • 3. 사비천도와 지배체제의 재편
          • 1) 성왕의 사비천도
          • 2) 정치체제의 개편
            • (1) 5방제의 실시
            • (2) 22부사의 설치
        • 4. 지배세력의 분열과 왕권의 약화
          • 1) 집권체제의 모순
          • 2) 귀족세력의 분열
          • 3) 대외관계의 변화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1. 중국왕조와의 관계
          • 1) 대중관계의 시작
          • 2) 대중관계의 전개
            • (1) 한성시대
            • (2) 웅진시대
            • (3) 사비시대
            • (4) 멸망 이후
          • 3) 대중관계의 성격
        • 2. 백제의 요서영유(설)
          • 1) 요서영유설에 대한 여러 견해
          • 2) 요서영유 기사의 분석
          • 3) 남북조의 백제·고구려관
          • 4) 낙랑·대방의 요서이동과≪송서≫·≪남제서≫
            • (1) 낙랑군과 대방군
            • (2) 낙랑·대방의 요서이동과≪송서≫·≪남제서≫
        • 3. 왜와의 관계
          • 1) 대왜관계의 시작
          • 2) 대왜관계의 전개
          • 3) 대왜관계의 성격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1. 중앙통치조직
          • 1) 관등제
          • 2) 행정조직
          • 3) 왕도조직
          • 4) 귀족회의체
        • 2. 지방·군사제도
          • 1) 지방조직
            • (1) 담로제
            • (2) 방·군-성(현)제
            • (3) 촌락사회의 편제
          • 2) 군사제도
            • (1) 군사제도의 정비
            • (2) 군사권의 행사와 위임
            • (3) 군사조직과 병력의 충원
          • 3) 성곽시설
        • 3. 경제구조
          • 1) 토지제도
            • (1) 지배층의 토지지배 유형과 성격
            • (2) 농민의 토지소유
          • 2) 조세제도
            • (1) 세제의 내용
          • 3) 산업
            • (1) 농업생산력의 발전
            • (2) 수공업의 발달
        • 4. 사회 구조
          • 1) 신분제
            • (1) 왕족·왕비족
            • (2) 귀족·관료
            • (3) 민
            • (4) 노비
          • 2) 법률과 풍속
            • (1) 법률
            • (2) 풍속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4) 정복전쟁과 마한통합

 4세기 초 낙랑군과 대방군이 축출되는 것을 고비로 한반도의 정세는 급변하였다. 낙랑·대방의 옛땅을 둘러싼 고구려와 백제의 영토분쟁이 시작되었고 400년 이상을 한반도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동방세계를 조정하던 군현세력이 물러간 힘의 공백상태에서 고구려·백제·신라·가야제국·왜 사이에는 복잡한 교섭이 전개되었다.

 4세기 중반, 백제는 왕위를 둘러싼 갈등에 휩싸이게 되었다. 외세로 말미암아 책계·분서 두 왕이 갑작스럽게 피살된 이후, “구수왕의 둘째 아들로서 오랫동안 민간에 있었으나 개인적인 출중함에 의해 汾西王의 어린 맏아들(契)을 대신하여 臣民의 추대에 의해 즉위”하였다는117) 비류왕의 등장은 개루-고이-책계-분서로 이어지는 계통118)과 초고-구수-비류로 이어지는 계통119)의 알력을 반영하고 있다. 비류왕이 죽은 뒤에 개루-고이계의 계왕이 다시 왕위에 올랐으나 2년만에 사망하고 비류왕의 둘째 아들인 근초고왕이 즉위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당시의 왕위계승이 평화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음을 시사한다.120) 계왕은 초고계에 의해 살해되었거나 아니면 일시 근초고왕과 양립하다가 제거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근초고왕과 그의 아들 근구수왕의 이름에서「近」자는 혈통의식을 강조하기 위해서 붙여진 것이며121) 초고계가 왕권을 장악하였음을 안팎으로 천명하는 것이었다.

 왕위가 초고계로 고정된 근초고왕대에는 활발한 대외정복이 이루어졌다.122) 북으로는 대방의 옛땅을 두고 고구려와 항쟁을 벌이는 한편, 남으로는 마한 잔여세력에 대한 통합을 시도하였고, 동남쪽으로는 소백산맥을 넘어 가야지역에까지 영향력을 뻗치게 되었다.

 ≪일본서기≫신공황후 섭정 49년(369)123)조에는 백제·신라·가야·왜가 관련된 중대한 사건이 서술되어 있다. 그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신공황후가 파견한 倭兵이 卓淳에 모두 모여 신라를 격파하니 이로 인해 比自㶱(昌寧)·南加羅(金海)·㖨國(昌寧 靈山?)124)·安羅(咸安)·多羅(陜川)·卓淳(昌原?)125)·加羅(高靈) 등의 7국을 평정하게 되었다. 거듭 군대를 옮겨 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古奚津(강진)에 이르고 南蠻 忱彌多禮를 정벌하여 백제에게 주었다. 이에 肖古(근초고왕)와 왕자인 貴須(근구수)가 군대를 이끌고 합류하니 比利·辟中·布彌支·半古 四邑126)이 스스로 항복하였다. 이리하여 백제왕 부자와 荒田別·木羅斤資 등은 意流村에서 회합한 후 千熊長彦만이 백제왕과 함께 백제국에 이르러 辟支山에 올라가 맹세하였다. 다시 古沙山에 올라 백제왕은 이후 변함없이 西蕃으로서 끊임없이 조공할 것을 맹세했다.

 한때 임나일본부설을 날조하는 데에 이용된 근거자료 중의 하나였던 이 기사는 심하게 왜곡되어 있음이 분명하지만 정벌의 주체를 왜가 아니라 백제로 치환할 경우 역사적인 진실을 일부 담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127) 대체적인 줄거리는 백제와 왜병이 연합한 전쟁의 결과 백제에 대한 比自㶱 등 7국의 종속, 忱彌多禮의 정벌, 比利 등의 항복으로 귀결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때의「가야정벌」은 군사적인 무력침공이라기보다는 백제를 정점으로 比自㶱 등 7국이 동맹을 맺거나 통교하게 되었던 역사적 사실을 설화적으로 표현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128) 그것은 뒷날 성왕이 “옛날 나의 선조 速古王(近肖古王), 貴首王(近仇首王)의 치세에 安羅·加羅·卓淳旱岐 등이 처음으로 사신을 보내 서로 통하게 되어 우호관계를 두터이 맺게 되었다. 그래서 子弟로 삼아 항상 도탑게 잘 지내기를 바랐었다”129)고 한 회고담을 통하여 짐작된다. 실제로 4세기 중반부터 백제가 가야지역을 직접 지배하였다는 고고학적 증거는 거의 없는 형편이다. 가야유적에서 종종 발견되는 백제계의 유물들은 대개가 5세기 후반, 즉 웅진기 이후에 해당된다.130)

 백제가 가야지역에 진출한 이유는 왜와의 교역로를 확고하게 장악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131) 윤색이 심하기는 하지만≪일본서기≫의 신공섭정 46년·47년조를 통해 볼 때, 아래의 사실들이 추출된다.

 근초고왕 19년(364) 久氐 등 백제 사신 3인이 왜와의 통교를 위해 파견되었다. 이들은 탁순까지 나아간 후 해로를 개척하지 못하고 되돌아왔다. 동왕 21년 왜에서 파견된 斯摩宿禰는 이 사실을 알고 종자인 爾波移와 탁순사람 1인을 백제에 파견하였다. 초고왕(근초고왕)은 기뻐하며 이들을 후대하였고 五色綵絹·角弓箭·鐵鋌 등을 이파이(니하야)에게 주고 보물창고를 열어 여러가지 진기한 물건들을 보여줌으로써 왜측의 교역에 대한 욕구를 자극하였다. 이파이가 돌아와 사마숙녜(시마노스쿠네)에게 보고하고 이들은 일본으로 돌아갔다. 근초고왕 22년 백제는 신라와 동시에 왜에 교역단을 파견하였다. 이에 왜의 조정은 선왕대부터 바라던 바가 이루어졌다고 감격하였다. 백제와 신라. 양국은 왜와의 독점적인 교역권을 확보하기 위하여 치열하게 경쟁하였으나 백제측의 우세로 끝나게 되었다.

 그리고 근초고왕 24년(369)의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왜와의 교역을 독점하여 동아시아 교역권의 중심축으로 발돋움하려는 백제의 의도와 낙랑·대방의 퇴축 이후 한동안 선진문물의 공급에 곤란을 겪던 왜측의 욕구가 부합되어 일어난 것으로 볼 수 있다.132) 가야에 대한 작전은 백제와 왜 사이의 원활한 교통로의 확보, 신라에 의한 교역 방해의 방지 등이 주목적이었을 것이다. 백제는 이듬해 多沙城(河東)을 확보하여133) 왜와의 교역에서 확고한 우세를 점하게 되었다.

 忱彌多禮와 比利 등에 대한 정벌은 교역로의 확보와 마한 잔여세력의 통합이라는 측면이 결부되었을 것이다. 침미다례는 마한 잔여세력 중에서 가장 중심적인 세력이었다. 그것은 침미다례가 3세기 후반에 나타났던 新彌國과 동일한 존재일 가능성이 있다는 점, 근초고왕 24년의 전역에서 남만이라는 수식어가 별도로 붙어 있다는 점, 침미다례를 무찌르자 비리 등의 소국들이 자연히 항복해 왔다는 점 등에서 유추할 수 있다. 침미다례는 강진이나 해남지역으로 비정되며 비리 등도 대개 오늘날의 전남 해안지방에 비정된다. 반면에 백제국의 영내로 표현된 벽지산은 金堤 부근,134) 고사산은 古阜 부근135)으로 비정되기 때문에 근초고왕 24년 이전 백제의 영토는 이미 노령산맥 이북까지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의 통합은 내부의 지배세력들을 온존시키면서 이들을 통한 공납적 지배의 수준에 머물렀던 것 같다. 이는 이 지역에서 5세기에 접어들어 대형의 옹관묘가 조영되고, 그 중에는 금동관과 금동신발, 큰칼 등의 화려한 물건들을 부장한 지배세력이 의연히 존재했던 사실136)을 통하여 알 수 있다.

 근초고왕대의 마한통합은 불완전한 것이어서 일원적인 지방제도의 정비와 지방관의 파견으로까지 진전되지는 못하였으나 이 때부터 백제는 전체 마한세력을 대표하게 되었다. “晋代 이후 諸國을 병탄하여 마한의 옛땅에 자리잡았다”137)라는 표현은 이러한 양상을 반영한다.

 낙랑·대방의 축출 이후 고구려와의 관계는 4세기 전반부터 중반까지는 자료의 공백으로 인하여 구체적인 양상을 알 수가 없다. 다만 완충지대가 없어지면서 국경을 직접 맞닿게 된 양국이 대방의 옛땅을 사이에 두고 첨예하게 대립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팽팽하던 긴장관계는 마침내 근초고왕 24년(고구려 고국원왕 39) 폭발하였다.

 고구려의 선공으로 시작된 전투는 초기에는 帶方故地의 남쪽에 해당하는 예성강유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138) 전세는 차츰 백제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어 근초고왕 26년에는 왕과 태자인 근구수가 3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고구려지역에 깊숙이 진입하여 평양성을 공격하였고 이 와중에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전사하기에 이르렀다.139)

 이 때 백제는 黃州에서 新溪를 잇는 선까지 진출하였던 것 같다. 이것은 4세기 중엽에서 후반에 해당하는 백제토기류가 황주지방에서 출토된 점,140) 근초고왕 30년(375) 백제의 북변 水谷城(황해도 신계)을 고구려가 쳐서 함락시키는 상황141)에서 유추된다. 황해도 谷山 근처로 비정되고 있는 谷那鐵山142)은 이무렵 개발되었을 것이다.

 대고구려전의 성공적인 수행, 왜와의 교역로 확보와 가야지역에 대한 영향력 증대, 마한 잔여세력의 통합이 일단락 된 근초고왕 27년(372) 왕은 동진에 사신을 보냈고 ‘鎭東將軍 領樂浪太守’에 제수되었다.143) 이제는 伯濟國王으로서 북부 마한연맹의 영도권을 가지고 있는 정도의「馬韓主」가 아니라 전체 마한을 아우른「百濟王」을 칭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백제 조정의 공식적 역사서인≪書記≫가 편찬되었다. 그 목적은 伯濟國이 성장해 가는 과정에서 흡수되어 들어온 다양한 세력들의 활동과 경험들을 백제 전체의 역사로 용해시키고, 왕실 내부적으로는 초고계를 근간으로 하는 일원적 계보를 마련하는 데에 있었을 것이다. 당연히 내용의 많은 부분이 당대 근초고왕의 치적을 과시하는 데에 할애되었을 것이다.

 당시 백제의 국력과 왕권의 성장은 서울시 석촌동 3호분에 잘 나타나 있다. 이 무덤은 시기적으로는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초에 해당되며, 한 변의 길이가 50m에 달하는 초대형의 적석묘로서 여기에 묻힌 피장자는 근초고왕으로 추정되고 있다.144)

<權五榮>

117)≪三國史記≫권 24, 百濟本紀 2, 비류왕 즉위년.
118)≪三國史記≫권 24, 百濟本紀 2, 고이왕조에서는 고이왕이 개루왕의 둘째 아들로 표현되어 있으나 이를 사실로 받아들일 경우 고이왕의 생존년수는 123년 이상이 되기 때문에 양자의 관계는 직접적인 혈연관계라기보다는 다분히 의제적인 관계일 것으로 여겨진다(金哲埈,<百濟建國考>,≪百濟硏究≫특집호, 1982, 13∼14쪽).
119)비류왕 역시 구수왕의 아들이라고 할 때에는 110세 이상 생존한 셈이 되기 때문에 두 사람이 직접적인 혈연관계에 있었다고 보기는 곤란하다(李道學,<百濟의 起源과 國家形成에 관한 재검토>,≪한국 고대국가의 형성≫, 民音社, 1990, 135쪽).
120)근초고왕이 즉위할 수 있었던 원인으로서는 당시 유력한 귀족가문이었던 眞氏세력과의 연합을 들 수 있다. 진씨와의 연결은 비류왕대에 이미 이루어졌으며 그 형태는 왕비족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盧重國, 앞의 책, 126∼129쪽).
121)金哲埈, 앞의 글, 14쪽.
122)이 정복전쟁의 배경에는 국력의 성장이란 측면과 함께 초고계와 고이계간의 왕위계승과정에서 야기된 내분을 외부적으로 발산하려는 의도가 있었음이 지적되고 있다(梁起錫,≪百濟 專制王權成立過程 硏究≫, 檀國大 博士學位論文, 1990, 66쪽).
123)≪日本書紀≫의 연대로는 249년이지만 神功紀의 연대는 120년 내려서 다루어야 한다.
124)이를 경북 경산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125)이를 대구, 또는 칠원에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126)이는≪日本書紀≫에서의 끊어 읽기와는 달리 ‘布彌·支半·古四의 邑’으로 읽는 것이 합리적이다(全榮來,<周留城·白江 位置比定에 關한 新硏究>, 한국문화재보호협회전라북도지부·부안군, 1976). 그럴 경우≪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韓條에 보이는 馬韓의 不彌國, 支半國, 狗素國에 대응된다. 比利는 역시 馬韓 小國 중의 하나인 卑離國일 가능성이 있다.
127)千寬宇,<復元加耶史(中)>(≪文學과 知性≫, 8-3, 1977), 916∼919쪽.

李丙燾,<近肖古王拓境考>(앞의 책), 511∼514쪽.
128)金泰植,≪加耶聯盟史≫(一潮閣, 1993), 333쪽.
129)≪日本書紀≫권 18, 欽明天皇 2년 4월.
130)崔鍾圭,<濟羅耶의 文物交流>(≪百濟硏究≫23, 1992).
131)이외에도 고구려와의 긴장감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배후의 안정을 꾀하기 위한 목적이 깔려 있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金鉉球,<4세기 가야와 백제·야마토왜의 관계>,≪韓國古代史論叢≫6, 韓國古代社會硏究所, 1994, 116쪽).
132)李賢惠, 앞의 글(1988), 174쪽.
133)≪日本書紀≫권 9, 神功皇后 攝政 50년 5월.
134)李丙燾, 앞의 책, 513쪽.
135)古沙山을 沃溝 臨陂로 보는 견해(李丙燾, 위의 글)도 있으나 古沙夫里, 즉 古阜 부근으로 보는 것(末松保和,≪任那興亡史≫, 吉川弘文館, 1961, 51∼52쪽)이 합리적이다.
136)有光敎一,<羅州潘南面新村里第9號墳發掘調査記錄>(≪朝鮮學報≫94, 1980).

穴澤口禾光·馬目順一,<羅州潘南面古墳群>(≪古代學硏究≫70, 古代學硏究會, 1973).

國立光州博物館·全羅南道羅州郡,≪羅州潘南古墳群≫-國立光州博物館學術叢書 제13책-, (1988).
137)≪通典≫邊防門, 東夷傳 百濟.
138)전쟁 초기에 백제군이 고구려군의 침공에 맞서 싸웠던 雉壤과 半乞壤은 모두 黃海道 白川으로, 浿河는 禮成江으로 비정되고 있다(李丙燾, 앞의 책, 509쪽). 半乞壤은 白川의 半月岡(≪新增東國輿地勝覽≫권 43, 白川郡, 古蹟)일 가능성이 크다.
139)≪三國史記≫권 24, 百濟本紀 2, 근초고왕 24·26년, 근구수왕 즉위년 및 권 18, 高句麗本紀 6, 고국원왕 39·41년.
140)崔鍾澤,<黃州出土百濟土器類>(≪韓國上古史學報≫4, 1990).
141)≪三國史記≫권 24, 百濟本紀 2, 근초고왕 30년.
142)≪日本書紀≫권 9, 神功皇后 攝政 52년조에는 근초고왕이 七枝刀와 七子鏡 등을 倭에 보내면서 한 말 가운데 “나라의 서쪽에 강이 있는데 谷那鐵山에서 발원한다. 그 거리가 멀어 7일을 가도 미치지 못한다”라는 구절이 있다. 신공황후 52년은 근초고왕 27년(372)에 해당된다.≪삼국사기≫에 의하면 이 때에 백제는 水谷城을 확보하고 있었다. 따라서 谷那鐵山은 현재의 谷山일원에 위치하였을 가능성이 크며 “나라 서쪽의 강”은 예성강이 된다.
143)≪晋書≫권 9, 簡文帝 咸安 2년 정월·6월.
144)金元龍·李熙濬,<서울 石村洞 3號墳의 年代>(≪斗溪李丙燾博士九旬紀念 韓國史學論叢≫, 1987), 31∼32쪽.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