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왕비족의 교체와 상좌평제의 설치
아신왕이 죽자 왜에 인질로 체류하고 있던 태자 전지가 8년만에 귀국의 길에 오르게 되었다. 그런데 전지왕(405∼420)의 즉위과정에 또 다시 왕위계승 분쟁이 발생하였다. 즉 아신왕의 맏아들로서 차기 왕위계승권을 가진 태자 전지가 아신왕이 죽었다는 전갈을 받고 귀국길에 오르고 있을 때 큰아우인 訓解가 일시 섭정을 하면서 태자 전지의 환국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때 작은아우인 碟禮가 왕위계승의 원칙을 무시하고 자의로 형 훈해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였으나, 한성사람 解忠과 그의 지지세력에 의해서 진압되었고, 이어 전지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전지왕의 즉위과정에서 백제의 지배세력은 전지 옹립파와 설례 지지파로 나뉘어 대립하는 양상을 보였다. 전자의 경우 훈해로 대표되는 일부 왕족과 전지가 귀국할 때에 그를 호위하였던 100명의 왜군162) 및 해충으로 대표되는 해씨세력 등을 들 수 있다. 반면 설례의 지지세력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으나, 진씨세력을 꼽을 수 있겠다. 진씨세력이 전지왕의 즉위를 계기로 한동안 정계에 등장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진씨세력은 4세기 후반 이래 병관좌평과 좌장을 역임하면서 병권을 장악하여 대고구려전을 주도적으로 수행해 나갔던 것이다. 그런데 아신왕 5년(396) 전투의 예와 같이 백제가 대고구려전에서 참패를 거듭하게 되자 진씨세력도 크게 타격을 입게 되었을 것이다. 아신왕 7년의 인사에서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의 패전책임을 물어 병마지휘권을 담당하는 좌장직이 진씨세력 진무로부터 沙氏세력 沙豆에게로 넘어가게 되었다. 또한<광개토대왕릉비문>의 영락 6년(396) 작전의 참패로 일부 진씨세력의 유력한 귀족들이 고구려에 인질로 보내졌을 가능성도163) 상정된다. 이로 인해 진씨세력은 정치적으로 상당한 궁지에 몰렸을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진씨세력은 자신의 거듭된 패전을 호도하고 실추된 세력을 만화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설례를 옹립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진씨세력에 의한 이러한 책동은 전지를 지지하는 해씨세력 등으로부터 강한 반발에 부딪쳐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전지왕이 설례 일파에 의한 왕위찬탈의 책동을 분쇄하고 즉위하자 이듬해 정월에 즉위의례적인 성격을 가진 동명묘의 배알과 범부여족의 공통적 제의인 제천사지를 동시에 거행하였다. 이것은 새 왕으로서의 정통성을 천명하고 그동안의 왕위계승을 둘러싼 정치적 내분을 수습하여 지배세력간의 광범위한 결속을 다지고자 한 것이었다. 이어 즉위에 따른 논공행상적인 인사를 단행하였는데, 서제인 餘信을 내신좌평으로, 解須를 내법좌평으로, 解丘를 병관좌평으로, 그리고 옹립의 공이 매우 큰 한성사람 해충을 달솔로 각각 임명하였다. 전지왕 4년(408)에는 내신좌평 여신을 새로 신설된 재상직인 상좌평에 승진·임명하였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정치의 실권이 진씨세력에서 해씨세력으로 교체되었다는 점이다. 해충은 전지왕 옹립에 관여한 공로로 달솔관등에 오르고 漢城租 1,000석을 지급받았으며, 그 밖에 해수·해구 등 해씨세력이 병관좌평 등 중요한 요직을 차지할 정도로 크게 부상하였다. 해씨세력은 백제 왕실과 통혼하여 마침내 왕비족에 올라「解氏王妃族時代」로 불리울 정도로164) 한동안 성세를 누렸다. 王戚인 해수는 내법좌평에 기용되었다가 비유왕 3년(429)에는 상좌평으로 승진되었고, 解丘도 병관좌평이 되어 병권을 장악하였다. 옹진천도 직후에 병관좌평이었던 解仇가 전횡을 일삼았던 것도165) 이에 해당된다. 반면에 지금까지 왕비족으로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했던 진씨세력은 웅진시기 초까지 한동안 나타나지 않고 있어 전지왕 즉위 초의 정변에 연루되어 설례를 옹립하려다가 결국 세력을 잃게 된 것이 아닐까 한다. 이로써 5세기 전반의 권력구조는 종래와 같이 왕족-왕비족 사이의 연합체제적인 틀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나, 다만 전지왕대를 기점으로 하여 지배귀족이 진씨세력에서 해씨세력으로 교체가 이루어진 점에 주목된다.
그리고 전지왕 즉위 초의 정변으로 왕권 자체도 동요되었으나, 이를 계기로 재상직인 상좌평을 설치하여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전지왕 4년에는 餘信을 새로 신설된 상좌평에 임명한 사실이 눈에 띈다. 상좌평의 설치는 전지왕 즉위 초의 정변에 따른 왕족간의 분열을 수습하고, 또 왜에 오랫동안 체류하였던 관계로 긴 정치적 공백을 가졌던 전지왕을 보필하기 위하여 취해진 조처로 이해된다.166) 이러한 의미에서 상좌평의 설치는 전지왕과 그의 지지세력간에 이루어진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라는 측면도 있다. 또한 상좌평체제는 왕족과 유력한 귀족세력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기능도 가졌지만,167) 한편으로는 왕권과 일정한 혈연관계에 있는 왕족과 왕비족에게 대귀족에 대한 통제력을 위임함으로써 상대적으로 국왕의 지위를 상징적이고 초월적인 존재로 부각시키려는 조처로 이해된다. 처음 설치된 상좌평에 전지왕이 신임하는 왕족 여신이 임명되었다는 점이나, 상좌평은 신라의 상대등제와 같이168) 국정을 총괄할 뿐만 아니라 귀족세력을 일원적으로 통솔한다는 측면에서 볼 때, 그 설치에는 왕권강화의 측면이 보다 고려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5세기 백제의 권력구조는 왕족과 왕비족인 해씨세력을 기축으로 한 상좌평체제를 중심으로 유지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전지왕은 상좌평제를 신설하여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으나, 그의 의도와는 달리 그가 죽은 뒤에 오히려 왕권이 약화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전지왕에 이어서 구이신왕(420∼427)이 16세 정도의 어린 나이로169) 즉위하였는데, 그의 재위기간이 8년에 불과할 정도로 단명하였을 뿐 아니라≪일본서기≫에는 목씨세력이 국정을 농단하였던 사실을 전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구이신왕이 연소함에 따라 왕모인 八須夫人의170) 영향력이 강화되자, 木滿致가 왕모와 정을 통해 왕모의 권위를 등에 업고 국정을 멋대로 휘둘렀던 것이다.171) 구이신왕대에 목씨세력이 대두하게 된 배경은 전지왕의 옹립 이후 실권을 잡았던 왕족 여신과 해씨세력을 견제하려는 데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된다.172) 목씨세력이173) 구이신왕대에 정치실권을 장악한 점은 기존의 유력한 귀족세력인 진씨와 해씨세력 중심의 권력구조상의 변화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어 즉위한 비유왕대(427∼455)에는 왕비족인 解須가 상좌평에 임명된 사실로 보아(429) 정치실권은 목씨세력에서 다시 해씨세력으로 넘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 해씨세력이 구이신왕대에 정치실권을 장악했던 목씨세력을 물리치고 비유왕을 옹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이 5세기 전반에는 왕족 이외에 진씨·해씨·목씨세력간에 정치실권을 장악하기 위한 대립과 갈등이 첨예화되면서 왕권이 극히 쇠약해져 대귀족을 통제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던 것이다.≪삼국사기≫에 비유왕의 죽음을 흑룡의 출현과 관련시키고 있음을 볼 때 비유왕도 이러한 와중에서 어떤 정변에 의해 희생되었을 것으로174) 여겨진다. 개로왕이 즉위한 직후에 “선왕의 陵이 제대로 조영되지 못하고 방치되어 있다”고 한 것을175) 보면 비유왕의 죽음이 비정상적이었음을 암시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162) | 전지가 귀국할 때에 동원된 왜군과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었던 정치세력으로 목씨세력을 상정하는 견해도 있다(文東錫,<4·5세기 百濟 政治體制의 變動>, 慶熙大 碩士學位論文, 1993, 35쪽). 이에 따르면 목씨세력도 전지 지지파로 분류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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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 | 李道學, 앞의 글, 290∼291쪽. |
164) | 李基白,<百濟王位繼承考>(≪歷史學報≫11, 1959), 31∼35쪽. |
165) | ≪三國史記≫권 26, 百濟本紀 4, 문주왕 2년 9월. |
166) | 梁起錫,<百濟 腆支王代의 政治的 變革>(≪湖西史學≫10, 1982), 22쪽. |
167) | 盧重國은 상좌평 설치를 5세기경 백제왕권의 쇠미현상과 관련시켜 지배세력들의 이익과 의사를 대변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 파악하고 있으나(앞의 책, 141쪽), 일단 귀족세력을 일원적으로 통솔하기 위한 왕권강화책의 일환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한편 상좌평과 내신좌평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상좌평이 수석좌평으로서의 내신좌평의 위치를 제도화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盧泰敦,<三國의 政治構造와 社會經濟>,≪한국사≫2, 국사편찬위원회, 1977, 221쪽), 문주왕 때 왕제 昆支가 내신좌평에 임명되었고, 또≪日本書紀≫권 19, 欽明天皇 4년조에 沙宅己婁의 관직이 상좌평인 점을 볼 때 양자를 별개의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
168) | 李基白,<上大等考>(≪新羅政治社會史硏究≫, 一潮閣, 1974), 95∼96쪽. |
169) | 李道學,<漢城末 熊津時代 百濟王系의 檢討>(≪韓國史硏究≫45, 1984), 6쪽. |
170) | ≪三國史記≫권 25, 百濟本紀 3, 전지왕 즉위년. |
171) | ≪日本書紀≫권 10, 應神天皇 25년. |
172) | 盧重國, 앞의 책, 158쪽. |
173) | 목씨세력의 출자를 마한의 목지국과 관련시키고 있으며, 근초고왕대 백제의 가라 7국 정벌에 세운 전공을 바탕으로 정치적 기반을 갖춘 것으로 보고 있다(盧重國, 앞의 책, 155∼156쪽 및<百濟의 木劦(羅)氏 硏究>,≪百濟社會의 諸問題≫-제7회 백제연구 국제학술대회 발표요지-, 충남대 백제연구소, 1994, 173쪽). |
174) | 李道學,<漢城末 熊津時代 百濟王位繼承과 王權의 性格>(≪韓國史硏究≫50·51, 1985), 3쪽. 盧重國, 앞의 책, 140∼141쪽. |
175) | ≪三國史記≫권 25, 百濟本紀 3, 개로왕 21년 9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