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동성왕의 왕권강화책
정치적 혼미 속에서 즉위한 동성왕은 금강유역의 신진세력을 과감히 등용함으로써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고 왕권의 안정기반을 구축하여 천도에 따른 정정불안을 수습하여 나갔다. 이를 위해 그는 대내적으로 지배세력의 개편작업, 신라 왕실과의 통혼, 왕·후·태수제 실시 및 토목공사를 크게 일으켜 실추된 왕권을 진작시키려 하였다. 대외적으로는 기존의 나제동맹을 축으로 신라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고구려에 공동으로 대처하였고, 또 남조국가인 南齊와 전통적인 우호관계를 맺어 고구려를 견제하였다.
먼저 웅진이 새 왕도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서 궁실과 임류각 및 웅진교를 가설하였고, 牛頭城·沙峴城·耳山城·沙井城 등 왕도 주변의 방어시설을239) 구축하였다. 이 시기에 크고 작은 토목공사가 빈번히 실시된 것은 그 동안 실추된 왕권을 진작시키려는 의도에서였다. 이러한 관방의 요지에 신진세력들을 전출시켜 진수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적극적인 지방지배를 꾀하는 동시에 왕권 중심으로 중앙 귀족세력들을 재편성하려는 왕권강화의 측면도 갖고 있다. 그리고 지배력이 직접 미치지 못하는 지방의 거점지역에는 이른바 지명·왕·후제를 실시하였다.240) 이는 그의 지배체제 확립과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공을 세운 귀족세력들에게241) 남제로부터 공인받은 형식을 빌어 작호를 수여한 것이다. 그 분봉지역도 영산강유역을 비롯한 전라도 일대에 걸쳐 있었는데,242) 후에 무령왕대에 실시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擔魯制 실시와243) 깊은 관련을 가진 것으로 이해된다.
한편 동성왕대에는 남제로부터 책봉을 받은 이래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외교적으로 고구려를 견제하였다. 또한 신라와는 공수동맹체제를 갖추어 고구려의 남침에 적극 대항하였다. 나제양국은 비유왕 7년(433;신라 눌지왕 17)에 화친을 맺은 이래 고구려의 남진책에 공동으로 대응해 왔다. 나제간의 우호관계가 더욱 공고화되어 실질적인 군사동맹관계로 발전하게 된 것은 동성왕과 신라의 소지왕(479∼499) 때의 일이다. 이 시기에 고구려가 신라를 침공한 것은 6회인 반면 백제는 1회에 불과하다.244) 백제는 彌秩夫(흥해)전투(481), 母山城(진천)전투(484), 薩水原(괴산 청천)전투(494)에서 신라를 구원하였고, 반면 稚壤城전투(495)에서는 신라로부터 구원을 받아 고구려군을 물리치기도 하였다. 동성왕 15년(493) 3월에는 왕의 요청으로 신라 눌지왕이 이벌찬 比智의 딸을 보내어 혼인시켰다. 이 결혼동맹은 고구려의 남진을 어느 정도 저지할 수 있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백제 내부에 있어서는 기존의 왕비족세력과 연합하여 정국을 운영하던 체제에서 벗어나 왕권을 강화하려는 조치로 이해된다. 그러나 신라가 지증왕이 즉위하면서(500) 친고구려 노선으로 전환할 징후를 보이자245) 동성왕 23년 백제는 신라와의 경계선에 있는 전략적 요충인 炭峴에 성책을 설치하여 신라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끝으로 사비로의 천도를 계획하여 왕권 중심의 정치운영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사비천도는 물론 성왕대에 단행되지만, 이미 동성왕대부터 준비되었을 것으로 보인다.246) 동성왕 12년(490)과 23년 세 차례에 걸쳐 사비지역에서 사냥을 실시하였는데, 이 때에 사비지역을 천도 후보지로 주목하였을 것이다.247) 특히 그 말년 무렵에 ‘水陸之衝’의 요처로248) 알려진 임천의 가림성을 축조하여 당시 실세귀족이었던 위사좌평 백가를 전보시킨 점도 이를 시사해 준다. 웅진에 세력기반을 가진 백가는 혹시 사비천도로 인해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상실당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이에 반발하여 사비 西原에서 사냥을 하고 있던 동성왕을 살해하였다.249)
이와 같이 동성왕대에 추진된 일련의 왕권안정과 지배기반의 확대를 위한 시책은 어느 정도 가시적인 성과가 있어서 후대의 무령왕·성왕대로 이어지는 왕권 중심의 정치운영에 바탕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임류각의 건축 등 대규모 토목공사를 자주 일으켜서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려는 시도는 국력의 소모와 민심의 이탈을 가져왔고, 수재와 가뭄 등의 거듭된 자연재해와 진휼대책의 불비는 농민의 생활을 피폐시켜 왕정의 인적·물적인 기반을 약화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집권 말기에는 사비천도를 계획하여 왕권의 권력기반을 강화시키는 전기로 삼으려 하였으나 도리어 그의 측근이었던 신진세력 백가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신·구세력의 대립과 조정 역할을 통한 왕권의 안정이 당면과제임에도 불구하고 신진세력을 중용하여 권력기반을 확대하고자 한 점은 그의 정치적 한계라 할 수 있다.
239) | 웅진시대 웅진성의 방어체제에 대해서는 兪元載, 앞의 글, 77∼88쪽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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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 | 坂元義種,<五世紀の百濟大王とその王·侯>(≪古代東アジアの日本と朝鮮≫, 吉川弘文館, 1978), 96∼102쪽. 梁起錫,<五世紀 百濟의 王·侯·太守制에 대하여>(≪史學硏究≫38, 1984), 65∼78쪽. |
241) | ≪南齊書≫백제전의 ‘魏虜’ 기사를 490년 백제와 북위간에 전쟁을 벌인 사실로 이해하였으나, 최근 백제와 싸운 상대를 ‘匈梨’로 보고 이를 고구려로 인식하여 결국 백제와 고구려 간의 전쟁기사로 보는 견해가 있어 주목된다(兪元載,<魏虜의 백제침입기사>,≪百濟硏究≫23, 1992, 92∼94쪽). |
242) | 末松保和,≪任那興亡史≫(六興出版社, 1956), 110∼113쪽. |
243) | 李基白,<百濟史上의 武寧王>(≪武寧王陵≫, 文化財管理局, 1973), 68∼69쪽. 한편 담로제의 실시 시기를 근초고왕대로 소급해서 보는 견해도 있으나(盧重國,<漢城時代 百濟의 地方統治體制>,≪邊太燮博士華甲紀念 史學論叢≫, 1985, 145∼153쪽), 이곳에 자제종족을 파견하여 지방통치를 강화해 나간 시점은 웅진시대로 보아야 할 것이다. |
244) | 이 시기에 신라와 고구려간의 전투는 소지왕 3년, 6년, 11년, 16년, 18년, 19년의 6회이고, 반면 백제와 고구려간의 전투는 동성왕 17년 뿐이다. |
245) | 梁起錫,<5∼6세기 전반 新羅와 百濟의 관계>(≪新羅文化祭學術發表會 論文集≫15, 신라문화선양회, 1994), 86∼88쪽. |
246) | 盧重國,<百濟王室의 南遷과 支配勢力의 變遷>(≪韓國史論≫4, 서울大 國史學科, 1978), 75쪽. 李基白, 앞의 글(1978), 19쪽. |
247) | 盧重國, 앞의 글, 93∼94쪽. |
248) | ≪三國史記≫권 28, 百濟本紀 6, 의자왕 2년 7월. |
249) | 동성왕이 말년에 6좌평제의 개편과 22부제 실시와 관련된 정치개혁으로 인해 苩加에게 시해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李鍾旭,<百濟의 佐平>,≪震檀學報≫45, 1978, 47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