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불교신앙
고구려 불교신앙의 실상에 대해서는 다행히 불상 명문이 몇 가지 남아 있어 접근이 가능하다. 먼저 국보 제119호 延嘉七年銘金銅如來立像의 光背銘을 보면, “高(句)麗 樂良 東寺의 僧徒 40명이 賢劫千佛을 조성하였는데, 그 스물 아홉번째인 因現義佛을 비구 □□가 공양하였다”는 내용이다. 이 부처 이름을 통해 이들은≪賢劫經≫의 가르침에 따라 佛事를 하였으며, 아울러 당시 고구려에는 현겁천불신앙이 일반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051) 이 불상의 조성연대를 종래 6세기로 보았으나 최근에는 長壽王 7년(419)설이 제기되고 있다.052)
1930년 황해도 谷山郡 花村面 蓬山里에서 출토된 辛卯銘金銅三尊無量壽佛 光背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새겨져 있다. 비구와 善知識 다섯 사람이 돌아가신 스승과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해 무량수불을 만들고, 이 분들이 미륵을 만나기를 기원한다는 것이다. 무량수불 즉 아미타불을 만들었다면 그것은 西方極樂淨土에 왕생하기를 기원하는 것이라야 교리상으로 타당한데, 오히려 미륵의 兜率淨土를 희구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불상의 조성연대로 추정되는 평원왕 13년(571) 당시 고구려인들이 미타정토왕생과 미륵정토왕생을 구분하지 못했다고 일단 보여진다.053) 그러나 이들이 서방왕생과 미륵과의 만남을 동시에 원한 것이 아니라, 서방왕생을 원하지만 부득이하면 다음 生에서라도 미륵불의 설법을 듣기를 희망하는 것이라 해석되기도 한다.054) 어쨌든 이러한 형태의 신앙은 北魏의 그것을 답습한 것이기는 하지만, 또한 고구려 미륵신앙의 초기 형태이기도 하다.055)
또하나 고구려의 미륵신앙을 보여주는 불상명문으로 平壤市 平川里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해지는 永康七年銘 광배가 있다. 즉 “돌아가신 어머니의 명복을 빌고자 彌勒尊像을 조성하였으니 … 慈氏(미륵)의 三會說法을 만나서…”라는 발원문이 그것인데, 이 광배의 연대에 대해서는 아직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고구려 불상의 연대에 대해 논란이 많은 까닭은 명문의 연호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며, 그렇다고 그것을 고구려의 逸名 연호로 보는 것도056) 현재로서는 성급한 판단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탑에 대해서도 유적 및 문헌을 통해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난다. 일제시대에 발굴되었던 평양 淸岩里 寺址는 一名 金剛寺址라고도 한다. 평면 八角의 大基壇을 중심으로 그 동·서·북쪽에 세 채의 건물이 배치되었다. 그리고 기단 남쪽에는 門址로 보이는 건물터가 있다. 팔각기단은 木塔址로서, 그 추정 높이는 약 90미터 정도로 추산되어 황룡사구층탑보다 작지 않은 大塔이었다. 이외에도 城郭圖를 통해 알려진 遼東城塔을 비롯하여, 대동군 上五里 寺址 등의 탑은 모두 木塔이었다. 그리고≪삼국유사≫高麗靈塔寺條를 보면, 이곳의 탑은 팔각칠층 석탑이었다.057)
051) | 金煐泰,<현겁천불 신앙>(≪삼국시대 불교신앙 연구≫, 불광출판부, 1990), 275∼281쪽. |
---|---|
052) | 文明大,≪韓國彫刻史≫(열화당, 1980), 108∼109쪽. 김영태,≪三國新羅時代佛敎金石文考證≫(민족사, 1992), 9쪽. |
053) | 安啓賢,≪韓國佛敎思想史硏究≫(東國大出版部, 1983), 9∼10쪽. |
054) | 金煐泰,<現存 佛像銘을 통해 본 高句麗 彌勒信仰>(≪蕉雨黃壽永博士古稀紀念 美術史學論叢≫, 通文館, 1988), 445∼449쪽. |
055) | 위의 글, 449쪽. |
056) | 손영종,<금석문에 보이는 삼국 시기의 몇 개 년호에 대하여>(≪력사과학≫ 1966-4, 평양 ;≪북한의 우리고대사 인식≫ 1, 대륙연구소 출판부, 1991, 340∼359쪽). |
057) | ≪高句麗の文化≫(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편, 呂南喆 外譯, 1982), 105∼110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