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Ⅰ
통일신라는 한국 고대사회에 있어서 정치적 안정과 문화적 번영을 이룩한 시기이다. 비록 국토와 인구는 크게 감소되었으나, 영토적 야욕을 지닌 당의 세력을 한반도 밖으로 축출시켜 民族의 自決權을 확보하고, 백제·고구려문화의 폭넓은 수용과 盛唐文化까지 포용하여 새로운 민족문화를 발전시킨 것은 통일신라의 역사적 위상을 높여줄 수 있다. 특히 이 시기는 새로운 통일국가 수립과 외세 축출이라는 민족적 과제 수행에 따라 형성된 국민의 공감대 위에 武烈王代의「전제왕권 확립」은 시대적 요청이라 하겠다. 따라서 정비된 중앙·지방·군사·토지제도의 재편성, 귀족의 경제기반 확대와 산업의 발달 등이 수반되어 한국 전통사회의 모델을 이룩하게 되었다. 이에 적극적인 對唐外交(조공·숙위)와 해상활동을 통해 신라의 국제적 지위를 높였으며, 통일신라문화의 융성으로 佛敎哲學과 儒敎政治(국학·독서출신과·국사편찬)의 정착 및 각종 불교미술과 과학기술의 발달이 이어져 미증유의 번성기를 구가하였다. 따라서 영토와 인구의 축소라는 외형적 의미로 신라통일을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Ⅱ
신라의 삼국통일은 백제·고구려의 정벌과 당군의 축출로 이룩되었다. 그러나 신라의 통일에 대해서는「領土·人口의 縮小와 外勢利用」이라는 불완전한 요인을 들어 북한에서나 일부 진보적 견해를 가진 연구자들은 통일을 부인하고 있다. 이른바「후기 신라론」이 그것이다. 따라서 그들 대부분의 주장은 고려의 통일을 진정한 통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영토나 인구문제만 갖고 통일을 운위할 수는 없으며, 그것으로 볼 때도 고려 통일시의 영토는 신라의 통일과 전혀 차이가 없었다. 인구문제도 신라시대는 10여 년간에 10여 만의 고구려 유민이 흘러들어 왔으나, 발해 유민 수용에 소극적이었던 고려시대는 100여 년에 걸쳐 10여 만이 귀화한 사실로 알 수 있다. 따라서 신라의 통일은 영토·인구상 불완전하였으나, 최초의 민족통일로서 단일정부하에 민족국가가 출범한 것이다. 더구나 문화적으로는 백제·고구려의 문화를 파괴시키지 않고 거의 그대로 수용하여 새로운 민족문화를 매듭지었으므로 그 의의를 더욱 높일 수 있었다.
또한 民族融合문제에 있어서도 통일의 주체적 당사국인 신라는 동족의식을 바탕으로 한「一統三韓意識」을 실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백제·고구려 유민에 대한 광범한 정치적 배려(관직 부여, 9서당 참여, 5소경 설치)를 아끼지 않았으며, 대당전쟁에 공동으로 참여시킨 명분을 찾을 수 있었다. 그후 통일신라는 민족적 분열과 대립을 극복하여 단일국가로 국제사회에 적극 참여할 수 있었고, 대당·대일관계에서도 독자적 관계를 수립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통일신라는 한국사의 전개과정에서 주체적 발전과 새로운 도약관계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Ⅲ
통일신라는 무열계의 專制王權이 확립된 사회였다. 이미 통일전쟁을 수행하던 文武王代(661∼681)에도 律令制度에 입각한 관료제를 모색하였고, 眞珠·欽突·軍官 등 귀족층을 도태시켜 무열왕권의 반대세력을 제거시켰다. 특히 왕의 가까운 측근을 중용하고 6두품 이하의 전문관료군을 흡수하여 神文王代(681∼692)에 개혁정치를 통한 官僚制를 확립하였다. 특히 그는 중앙·지방·군사·토지제도의 개편과정에서 중앙집권적 통치질서를 마련하여 다음의 聖德王代(702∼737)의 극성기를 준비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전제왕권의 수립과정에서 효소왕·성덕왕·효성왕을 거쳐 경덕왕 때까지 귀족들의 반발이 계속되었으므로 왕당파와 반전제주의파간의 대립이 이어졌다. 따라서 통일신라의 전제왕권도 결국은 귀족들의 도전으로 무너지고, 귀족들에 의한 下代社會가 전개되어 갔다.
신문왕을 이은 성덕왕은 새로운 귀족의 지지기반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親唐政策을 전개하여 신라의 국제적 지위를 높이는 동시에 전제왕권의 위상을 과시할 수 있었다. 한편 景德王(742∼765)은 漢化政策과 같은 제도의 개편보다는 불국사·석굴암의 창건, 奉聖寺成典의 중창, 華嚴經의 보급 등 불교의 장려를 통해 왕실의 권위와 신성함을 고양시켰다. 특히 불국사의 가람배치에서 중앙지향성이나 화엄승의 활동 속에서 신라 전제왕권의 또다른 특성을 엿볼 수 있다. 이와 같은 통일신라의 전제왕권은 한국사상에서 보여지는 최초의 관료정치로서 우리 나라 전통사회의 원형으로 정착되어 그 후 고려·조선으로 이어져 내려왔다.
Ⅳ
통일신라의 중앙정치조직은 특정한 시기에 이룩된 것이 아니다. 法興王 이래 眞平王代를 거쳐 신문왕 6년(686)의 例作府가 설치될 때까지 170년간을 거치면서 완비되었다. 동시에 이 행정체계는 신라의 骨品制와 같은 족적기반과 전통적인 당의 3성 6부제와 같은 중국적 요소를 조절하는 과정에서 독자적 관료체제를 마련하게 되었다. 통일신라의 중앙행정체제는 특정기관의 월권을 방지하고 조선시대의 議政府와 같은 중간기구를 두지 않음으로써 왕과 중앙기관이 직결되어 있었다. 따라서 上大等과 侍中에게 수상으로서의 역할과 지위를 보장하지 않았으며, 執事部가 중앙행정을 총괄하는 首府가 될 수 없었다. 따라서 중앙의 14관부와 19典(7寺成典 포함)의 상호균형을 이루게 하는 동시에 宰相이 이를 겸직케 함으로써 양자간의 원활한 운영을 보장하였다. 동시에 115개의 宮廷官府에도 다양한 기관을 두어 행정·외교·사법기능을 부여하여 王室內閣(Kitchen-cabinet)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다만 재상이 私臣을 겸하게 하여 왕권의 침투를 용이하게 하였으며, 각 중앙 핵심기관간의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였다.
이와 같은 통일신라의 중앙관제는 행정적 정비뿐 아니라, 그를 뒷받침할 법적장치나 정신적 지지기반을 갖고 있었다. 우선 반대파 제거를 위한 방편으로서의 連坐制의 활용과 소수 진골귀족의 배타적인 권력 독점을 위한 兼職制의 응용, 司正機關의 권한 강화, 그리고 內廷官府의 다양화 등을 내세우고 있다. 한편 유교적인 王道政治理念의 구현과 신성한 왕권의 지지기반인 불교의 이상을 결합시킨 萬波息笛의 정신으로 승화시켰으며, 국민 상하간의 조화와 균형을 위한 安民歌의 이상을 실현시키려 하였다.
한편 지방·군사제도의 재편성도 왕권의 전제화를 위한 하부 및 지지기반으로 마련하였다. 신문왕 5년(685)의 9주5소경제가 지방제도의 골격을 이루게 하였다. 이러한 지방제도는 백제·고구려에 대한 배려와 중국식 군현제를 가미한 것으로 전국적으로 119군 291현(경덕왕대)의 수치를 나타내고 있어 보통 1군에 3∼4개의 현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군에 따라서는 領縣을 갖지 못한 경우도 있었으며, 군에는 예외없이 外司正과 法幢이 파견되었다. 소경은 2∼3개의 영현을 거느린 郡 정도의 규모로 직접 村을 지배하는 읍락이었다. 다만 소경은 州의 都督과 같이 행정·병마·사법·징세권을 행사하였다.
군사제도는 중앙군과 지방군사 조직으로 대별되었다. 중앙에는 왕실수비의 侍衛府와 중앙 핵심부대인 9誓幢이 있었다면, 신라인으로 임명된 軍師幢主 휘하에 백제·고구려·보덕국인으로 구성된 三武幢이 있었다. 지방에는 10停이 있었으며, 그 휘하에 三千幢과 신삼천당이 있었다. 그외 5州誓가 있었으며, 州治에는 별도로 緋衿幢·萬步幢이 있었다. 이들은 대체로 長槍을 주무기로 무장되었으며 갑옷과 투구에 도끼를 들고 있었다.
통일신라는 확대된 영역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鎭을 설치하였다. 특히 발해를 막으려는 北鎭과 서북방 방어를 위한 浿江鎭, 그리고 완도의 淸海鎭 등이 대표적이다.
신라는 왕도에 宮城을 쌓고, 변방(군진)에 성곽을 축조하였다. 전자가 지배체제의 유지를 위한 것이라면, 후자는 외적침입에 대처한 것이다. 중앙(경주)의 月城은 현재 경주시 인왕동의 半月城(1,841m)을 뜻하며, 각 주치에도 성곽을 쌓았는데 삽량주성(사벌주)·남한산성(한산주)·웅진성(웅천주)·승암산성(완산주) 등에서 그 흔적을 보게 된다. 또한 소경의 경우도 國原城(중원경)·西原京城(서원경)·盆山城(금관소경) 등의 예로 보아 성곽을 쌓았으며, 군현에도 성곽을 쌓고 있었다. 따라서 국가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행정요충에 성곽을 쌓았으므로, 신라의 경우도 고구려와 같이 지방행정조직은 곧 군사체제였고, 성곽을 통하여 이를 수호하게 하였다.
Ⅴ
통일신라의 정치적 번영과 문화의 융성은 경제·사회기반의 확충과 안정에서 온 것이다. 우선 수공업은 귀족의 수요증대나 조공무역의 발달에서 온 결과였지만 신라사회의 전반적인 성장을 가져왔다. 우선 수공업은 宮中手工業과 官營手工業을 위주로 하되, 민간수공업도 발달하였다. 궁중수공업은 本彼宮과 御龍省의 정비로 본격화된 후, 귀족(진골)과 대중수출(조공)의 수용에 따른 금·은제품, 果下馬, 海豹皮, 해산물, 우황·인삼 등 약재와 고급 직물, 세공품 등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외 각종의 옷감·염색·가죽제품의 제작에 있어서 전문성과 협동성은 산업의 분업을 촉진시켰다. 그리고 工匠府·彩典·船府 등의 분산 지배하에 있던 관영수공업은 수취제도의 정비에 따라 在地匠人들을 중앙편제나 調의 방식으로 납공케 하는 동시에, 兵器製造나 築城에 수반된 장인을 징발하는 두 형태로 발달하였다. 그러나 경덕왕 이후에는 관영수공업체제로 통합되었으며, 나말에는 서역·중국제품의 수입으로 수공업은 크게 위축되었다.
한편 민간수공업은 생활일용품을 생산하는 농민 위주의 수공업과 전문적인 匠人중심의 계층으로 구분할 수 있다. 다만 이러한 장인계급의 전문화 과정에 따른 사회·경제적 지위향상은 불교의 평등사상과 결부되어 신분향상의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또한 귀족층에서도 독자적인 수공업을 경영하였으며, 寺院의 수공업이 번창하여 자체의 수용충당을 위해 僧匠이 활약하기도 하였다. 그외 수공업 기술의 발전상은 불경인각·鑄鐵·彫金·토기제작·造船術·製鹽 등 다양한 분야에 이르렀다.
상업의 경우를 보면 소지왕 12년(490)에 시장을 두었다는 기록 이후, 점차 도시를 중심으로 발전되어갔다. 통일 후에는 중앙에 西市典과 南市典이 설치되면서 상행위가 번창해졌으며 5通5驛을 중심으로 교통요지에도 상인활동은 활발하였다. 이때 매매된 품목은 일용품·철·기름·서역물품·노비 등이었고 교환수단으로는 布와 米穀이 이용되었다. 대외무역은 공무역(朝貢)으로 금·은·동·포·인삼·우황·미발 등이 수출되었으며, 수입품은 대체로 왕실에 필요한 의복류와 기물이었다. 그러나 신라의 후기에 이르러 대중국수출품이 신라의 금은제품이나 불상 등으로 변하여 신라수공업의 발전상을 엿볼 수 있었다. 이러한 공식무역 외에 사무역이 성행되어 산동일대는 고구려 유민 출신인 李正己일가의 독점적 사무역과 나말의 張保皐의 무역은 한중일의 3각무역으로 발전되어 막강한 해상세력으로 발전되기도 하였다. 특히 이들 해상세력 중에는 王建(개성)·劉相晞(배천)·柳天弓(정주)·王逢規(강주)·朴允雄(울산) 등과 같이 호족으로 성장하여 나말여초의 정치계에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
통일신라에서 정치발전과 문화융성은 무엇보다도 귀족의 경제기반 확충에 있었다. 특히 그들은 국가로부터 받은 祿邑·祿俸 외에 막대한 사유지와 목장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사유지는 기진·상속·매매·병합·개간·점탈에 의한 것이었으며 많은 농민이 隷民化되었다. 따라서 농민들은 新羅帳籍에서 보듯이 소유한 토지는 비교적 넓었으나 관모전답·촌주위답·연수유답 등 2∼3종의 토지경작과 牛馬 및 각종의 나무(뽕·잣·호도)를 재배하여 무거운 조세와 부역을 면할 수 없었다. 다만 신라의 9등호제에 대해서「人丁의 多寡」로 또는「財産의 다과」로 구분지었다는 엇갈리는 견해가 있지만, 농민은 국가로부터 제한된 토지소유권을 받은 대신 과중한 부담(조·용·조와 군역)을 강요받게 되었다.
당시는 영농방식이나 地力의 한계와 施肥法의 미발달로 休閑法이 유행되었고, 직파법으로 농촌에서는 벼·보리·콩·조·깨·인삼 등이 재배되었으나 주곡은 쌀·보리·콩이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농민층은 보리밥·잡곡밥을 먹었으며, 간장·된장·소금·마늘 등이 주요한 조미료가 되었다. 그러나 신라말 농장의 확대로 농촌의 기본조직인 촌락이 붕괴되어 유민화됨으로써 광범위한 농민반란이 야기되었다. 이와 같은 수취제의 구조적 모순은 고려정부에 의해서 개선될 수밖에 없었다.
한편 鄕·部曲民의 경우 그 신분에 대한 양인설이 대두되었으나, 신라에는 신라장적에서 보듯이 피지배층에서 노비층이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신라장적의 경우 25명의 노비가 보여 전체인구의 5.4%나 되어 노비의 비율이 당나라보다 높았다. 이들 노비는 형벌·부채·포로·매매·세습 등 다양한 요인으로 발생하였으며, 그 가격이 쌀 10여 석 정도의 수준이었다. 다만 이들은 공민으로서 국가에 대한 권리나 의무가 없이 소유자의 사유물로서의 역할뿐이며, 노동에 사역되었다. 이러한 노비는 나말의 혼란기에 있어서 촌락내부의 계층분화에 따라 또다른 공급원을 제공하였지만, 그들은 귀족의 경제기반이 된 동시에 나말에는 사병으로 활동하여 사회적 불안요소가 된 바 있었다.
끝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의식주 생활은 종래 역사서술에서 홀시했던 부분이다. 특히 흥덕왕의 服飾禁制에서 보듯이 태평성세하의 문란상과 사치를 금하는 조치와 같이 신분에 따른 다양한 복식을 엿보게 한다. 남자의 두발은 묶은 머리(소인)·상투(성인)로 頭衣는 弁과 幞頭이며, 여자는 다양한 頭飾을 하였다. 그리고 의복의 경우 남녀 공히 겉옷으로 袍(오늘의 두루마기)를, 하의는 袴(바지)를 입었으나, 여자의 치마는 의례용이었다. 다만 저고리(短衣)는 신라에서 尉解라 부르는데 주로 여자쪽에서 입었으며, 그외 다양한 복식이 있었다.
식생활은 통일 후 벼농사가 확대되면서 주식으로 자리잡았으나 국민의 대부분은 보리·조의 잡곡으로 생활하였으며, 과일·채소가 재배되었다. 특히 미나리·오이·앵두가 생산되었고, 상류층에서는 육류와 생선을 식용하였다. 이러한 식생활의 변화에 따라 조리·저장·가공을 위한 다양한 食器의 개발, 수저의 활용이 보이며 된장·간장·국·꿀·기름·생강 등 다양한 발효식품과 조미료가 사용되었다. 그리고 명절, 제사의 유행에 따른 節食이 일반화되어 다양한 식생활문화가 보급되었다.
주생활의 경우도 흥덕왕 9년(834)의 屋舍에 대한 규제에서 4두품과 백성은 같은 수준의 크기로 되어 있지만, 집의 크기·재료·모습 등에서 계층간의 차이가 뚜렷하였다. 따라서 일반 백성들은 움집이나 초가집에서 생활을 영위했으리라 생각된다.
Ⅵ
통일신라의 정치·사회적 안정은 문화의 융성을 가져왔다. 백제·고구려문화의 발전적 흡수, 盛唐文物의 수용, 귀족들의 경제적 기반의 확대 등과 왕권의 전제화과정으로 8∼9세기는 미증유의 문화번영을 구가할 수 있었다. 귀족 위주와 불교중심의 문화일 망정, 민족문화의 근간으로서 통일신라문화는 일대 도약을 할 수 있었다.
유학은 漢文學 위주의 특징을 지녔으나 왕도정치의 이념으로서 전제왕권의 정당성을 뒷받침하였다. 우선 國學은 전제왕권의 확립과 유교정치구현의 상징으로 설치되었으며, 善政의 명분과 敎書나 詔書의 내용에서 더욱 구체화되었다. 이러한 국학의 설치는 讀書出身科의 필요성을 높여주었으며, 사회의 윤리적 덕목과 국민의 교화에 기여하게 되었다. 따라서 삼국시대의 역사편찬의 경험과 당의 史官制의 영향으로 국사편찬의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추측은 宿衛學生들의 활동이나 나말의 瑞書院·崇文臺·翰林院 등 문한기관의 확충에서도 엿보인다.
신라유학의 발달은 무엇보다도 도당유학생인 숙위학생들의 활약으로 이룩되었다. 6두품 계열인 이들은 진골 위주의 신라사회를 벗어나 자유로운 수학과 활동이 보장된 당나라 국학에서 賓貢科를 통하거나 그곳의 문인·학자들과 교우하여 선진문물을 체득한 전환기의 知的集團이 되었다. 그 후 일부는 외직에 참여한 바 있고, 대체로 도교·불교와 관련을 맺었으며, 한림직과 근시직에 종사함으로써 왕권강화 내지 유교정치풍토를 주도하였다. 최치원·최신지 등은 불우한 일생을 마쳤으나, 신라에 중국문화를 소개하였고 科擧制와 國史編纂의 필요성을 제시하여 고려왕조 건설에 기초를 마련하였다. 동시에 유교에다 불교·도교까지 포용하여 고려왕조가 지향한 유불의 조화라는 시대정신을 이끌어 나말여초의 사상적 연결을 꾀한 교량인이 된 것이다.
통일신라 문화융성에는 불교철학을 빼놓을 수 없다. 唯識 위주의 교학기반을 이어 통일신라는 뚜렷한 종파가 형성되어 광범한 불교의 대중화와 독자적 교학체계가 확립되었다. 통일기 교학활동의 중심은 유식과 華嚴이었다. 유식은 瑜伽論을 소개한 圓測의 활약으로 정착되었는데, 그는「識說과 三性說」에 자신의 사상을 집대성하였다. 그는 진제·규기의 사상을 비판하고 포용과 화해의 견해를 나타내었으며, 順憬·憬興·太賢 등으로 이어져 法相宗으로 연결되었다.
한편 元曉는 다양한 교학섭취와 朗智·사복 등 많은 스승을 섭렵하면서 자유로운 구도생활과 왕실의 지원 등을 통해 국민교화와 종파의 극복·화해를 지향하였다. 원효의 사상은 중생의 佛性을 기반으로 發心과 念佛을 강조한 一心의 淨土觀이다. 따라서 그는 200여 권의 저술을 통해서 교파간의 갈등과 차이와「空과 有의 대립」을 극복하는 융통무애한 화합을 강조한 것이다. 그리고 義相은 一乘法界圖를 통해 화엄일승의 연기법을 밝히는 동시에 그는 洗穢法을 통해 이론의 실천을 강조하였다. 특히 그는 三衣一鉢의 정신으로 八不淨財를 몸으로 실천하면서 백성을 교화시키는 데 게을리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의상은 觀音信仰과 彌陀信仰을 화엄교단의 중심신앙으로 전개하여 신라 중대사회의 안정에 기여하였다. 동시에 그는「一卽多 多卽一」의 화엄법계연기설을 풀이하여 연기의 핵심을 中道義로 파악하였다. 眞正·表訓·智通 등으로 이어지는 그의 법통은 신라 화엄학을 주도하였다.
통일신라 불교계에는 미타신앙·관음신앙·미륵신앙·지장신앙 등도 크게 번창하였으며, 불교의 평등·자비사상은 기층민의 지위를 향상시켜 주었다. 이로서 화엄사상은 중대 전제왕권이나 사회안정에 부응함으로써 불국토내의 정신적 일체감 조성에 기여하였다.
통일신라의 문화에는 그외에도 천문학·수학·도량형뿐만 아니라, 풍수지리·지리·농업기술·의학·인쇄술 등에서 큰 발전을 보였다. 그리고 뛰어난 항해술은 장보고 활동의 기반이 되었다.
특히 불교예술의 발달에 따라 불상(조각)의 조성에서 뛰어난 솜씨를 보여 석굴암을 이룩하였다. 이러한 석굴암은 그 후 불좌상 표현에 모본이 되었으며, 사원 건축과 탑파예술의 극치를 보게 된다. 한편 석탑에 있어서는 감은사지 3층석탑 등 한국석탑의 전형을 이룩하게 되었으며, 다보탑·화엄사 4사3층석탑 등 특수양식의 발생도 보게 되었다.
Ⅶ
통일신라의 사회적 번영은 대외관계에서도 나타났다. 3국간의 서해직항로의 확보와 외교전쟁을 극복하고 적극적인 친당정책을 통해 신라의 국제적 지위를 높였다. 이로서 다양한 朝貢使를 통한 문물의 교류, 숙위외교를 통한 통일의 완성, 그외 숙위학생의 파견 등으로 동아세계에 직접 참여하여 신라인의 세계관을 확장시켰다. 이러한 遣唐使들은 외교적 역할 이외에도 金春秋(무열왕)·金法敏(문무왕)·金俊邕(소성왕)·金彦昇(헌덕왕) 등의 경우처럼 왕으로 등장하여 정치활동까지 한 바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견당사와 구법승의 활동, 그리고 新羅坊과 같은 산동반도 일원에서의 신라인의 활동은 결국 신라인의 왕성한 해외진출욕에 따른 황해횡단항로나 남방항로의 확보와 발달된 선박·항해술에서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圓仁의≪入唐求法巡禮行記≫에도 나타나 있다.
한편 일본과의 관계도 7세기 후반 당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교류가 시작된 이래 8세기에는 신라문물이 일본에 전래되어 白鳳文化나 율령정치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일본 우위의 외교교섭을 내세우는 일본과 중국적인 華夷秩序를 내세웠던 신라는 공적인 교섭 거부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민간교역으로 그 잔재를 유지하였으며, 9세기 이후 양국관계는 적대의식으로 확산되었다.
통일신라의 대외관계는 그외에도 西域과의 관계가 있다. 빈번한 조공사와 求法僧을 통해서 서역에 대한 인식이 나타났으며 6세기말 圓光에 의해서 보다 넓은 이해가 가능하게 되었다. 그 후 통일신라의 활발한 대당관계로 서역문물이 수용되고 귀족적 수요의 필요성으로 서역문물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괘릉의 무인석이나 각종 금속·유리제품에 서역의 영향이 나타났으며 화려한 장식적 취미가 널리 유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사치풍조가 만연된 문제까지 야기되었다.
<申瀅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