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발해인의 귀속의식
727년 일본에 처음으로 사신을 파견하면서 보낸 국서에서 무왕은 발해가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였고 부여의 遺俗을 지니고 있다”고 하였다. 이듬해 일본측에서 발해에 보낸 국서에서는 발해가 “옛 땅을 회복하고 (일본과의) 지난날의 우호적 관계를 이으려고 하는 것을 알게 되어 기쁘다”고 하였다.078) 759년에는 일본에 弔問使를 보내면서 문왕이 스스로 ‘高麗國王 大欽茂’라고 하였고079) 같은 해에 일본에서 발해에 보낸 국서에서 발해왕을 ‘高麗國王’이라 하였다.080) 渤海使를 高麗使로, 발해국을 고려국으로 표시한 예는≪續日本紀≫에서 여러 군데 보인다. 비단 사서뿐 아니라 平城宮 출토의 木簡에서 발해사를 고려사로 기술한 것이 보이며, 763년에 쓰여진 東大寺의 고문서에서도 발해인을 고려인으로 기술하였다.081) 이처럼 일본과의 교섭에서 발해왕실은 발해가 고구려 계승국이라는 입장을 취하였고, 일본측에서도 발해를 고구려의 계승국이라고 일반적으로 널리 인식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인들이 발해가 고구려의 계승국이라는 인식을 지속적으로 지녀왔던 것은 발해 조정의 표방뿐 아니라 발해를 방문한 일본 사신의 견문과 일본에 간 발해 사신과의 접촉 등을 통해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발해인의 역사계승의식을 검토할 때 발해가 일본과의 관계에서는 고구려 계승국임을 표방하였으나 당과의 교섭에서는 그런 면을 일체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점으로 제기될 수 있다. 그런데 이 점에 대해서는 당과 발해간의 교섭에서 고구려 계승이란 이미지가 지니는 의미에 대하여 생각할 필요가 있다. 당에게 고구려라는 나라는 두려움을 주는 勁敵이었다. 그러한 인상을 발해가 새삼 불러일으켜 적대감을 야기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발해와 당 사이의 교섭이 열린 8세기 전반에는, 당이 정책적으로 고구려의 왕손을 고려조선군왕으로 봉하여 당의 수도에 幽居시켜 두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발해가 고구려의 계승국임을 표방한다는 것은 발해의 외교적 위치만 약화시킬 뿐이었다. 발해 조정이 이 점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것은 일본에 보낸 발해 사신에는 고씨가 많았던데 비하여, 8세기에 당에 파견한 사신에는 고씨가 없고 대씨가 압도적으로 많았다는 점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발해 전 시기를 통하여 발해인이 스스로 말갈족의 후예라고 한 예를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그에 대한 부정적 의식을 명백히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792년 발해가 당에 사절단을 보냈는데 이 사절단의 대표인 楊吉福이 띠고 있었던 발해의 관직명이 ‘押靺鞨使’였다.082) 이 관직명은 곧 말갈을 관할하는 직책이라는 뜻을 지닌 것이다. 이 때의 말갈이 구체적으로 어떤 집단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 관직명을 통하여 당시 발해 조정이 말갈족에 대하여 어떤 동족의식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발해 왕실과 그 중심 족속이 말갈족이었다면 발해 건국 후 백년도 되지 않은 시기에 그러한 관직명을 사용하였다고 상상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 다음 발해국 주민이 남긴 무덤양식을 살펴보면, 토광묘와 석실봉토묘 및 벽돌무덤으로 나누어진다. 이 중 토광묘는 말갈계의 무덤양식이다. 발해의 중심지였던 목단강과 해란강 유역 등에는 다수의 석실봉토묘가 있다. 敦化의 六頂山고분군에는 문왕의 딸인 貞惠公主墓를 포함하여 발해 초기의 왕실과 귀족층 무덤이 몰려있는데 모두 석실봉토묘이다. 발해 초기 지배층의 무덤양식이 고구려계의 석실봉토묘라는 것은 이들의 족속 계통을 말해주는 한 단면이다. 벽돌무덤은 발해 중·후기에 나타나는데 대표적인 발해의 벽돌무덤인 정효공주묘에 그려진 벽화도 唐風이 짙게 배여 있다. 이는 발해의 지배층이 당의 문화를 적극 수용한 데 따른 변화이다.083)
발해인의 고구려 계승의식은 발해유민들 사이에서도 보인다. 서경 압록부에 근거를 둔 발해유민의 나라인 定安國의 왕이 여진 사신 편에 부쳐 송에 보낸 국서에서 자국의 내력을 ‘高麗舊壤 渤海遺黎’라고 하여084), 고구려-발해로 이어지는 계승의식을 표방하였다. 이 밖에 요대에 요동지역에 거주하던 발해인 중 유력 가문인 遼陽 張氏와 熊岳 王氏 등도 고구려 계승의식을 가지고 있었다.085)
이러한 발해인의 고구려 계승의식은 발해사회의 주민구성이 土人과 말갈로 이루어진 이중성으로 초기부터 나타났고, 발해 멸망 후에는 그 주민이 발해인과 여진인으로 뚜렷이 구분되는 존재양태를 지녔던 사실과 연결되는 것이다. 이는 앞에서 제기한 문제에 대하여 보다 확실한 이해를 가지게 해준다. 즉 대조영집단이 말갈족이냐 아니면 속말수 유역의 변경의 고구려인이었느냐에 대해 발해 왕실 스스로의 표방으로 보아 후자쪽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역사적으로 볼 때 실제로 더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은 ‘高麗別種’인 발해 왕실이 건국 후 고구려인과 결합하여 그들이 중심이 된 사회를 건설해 나갔느냐 아니면 말갈족과 결합해 나갔느냐는 문제이다. 그 점에서는 전자 쪽임이 명백하다. 설사 대조영의 먼 조상이 말갈계였을 경우를 상정한다고 하더라도 대조영 자신이 고구려의 무장이었으며, 건국 초기부터 보이는 발해 왕실의 귀속의식과 주민구성 및 그와 연결된 지배구조를 살펴볼 때, 대조영은 고구려인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 점은 金의 왕실인 完顔家의 경우가 좋은 참고가 된다.
금의 왕실인 완안가의 시조 전승에 의하면 그 선조는 고려인이었다고 한다.086) 북중국을 정복하고 제국을 건설한 후에도 그러한 시조 전승은 금 왕실에 의해 인정되었다.087) 그 男系上의 시조가 고려인이었다고 하지만, 금국 성립 당시 완안가는 엄연히 여진인이었고 그들이 취한 방향과 그 세력기반도 여진인이었다. 오늘날 누구도 금 태조 阿骨打를 고려인이라고 하는 이는 없다.
이상의 검토를 통하여 앞에서 제기한 ‘토인’의 성격에 대한 문제는 보다 뚜렷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즉 토인은 고구려계 인과 영주에서 동쪽으로 이동해온 말갈계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중심이 된 집단은 전자이며 후자가 그에 융합되어 들어가는 형태로 토인, 즉 발해인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후자가 이미 고구려 존립 당시부터 상당히 고구려화되었고 또 영주에서의 유거생활과 東走 과정을 통하여 고구려인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기 때문에 양자는 보다 용이하게 융합될 수 있었고, 발해 건국 초기부터 말갈과 구분되는 ‘토인’이라 지칭되는 하나의 족속을 형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발해국의 진전에 따라 일부의 말갈족이 토인에 동화되어 융합되어 갔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발해국은 고구려 계승국의 성격을 띠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발해국의 성격이 고구려와 같을 수는 없다. 시대와 무대가 다른 만큼 양자간에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계승이란 이어서 변화 발전해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발해국이 고구려 계승국의 성격을 지녔던 사실은 당시 발해에 대한 그 인접국 사람들의 인식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078) | ≪續日本紀≫권 10, 聖武天皇 神龜 5년 4월 임오. |
---|---|
079) | ≪續日本紀≫권 22, 淳仁天皇 天平寶字 3년 정월 경오. |
080) | ≪續日本紀≫권 22, 淳仁天皇 天平寶字 3년 2월 무술. |
081) | 石井正敏,<日渤交涉における渤海高句麗繼承意識について>(≪中央大學大學院硏究年報≫4, 1975) 참조. |
082) | ≪唐會要≫권 86, 渤海. |
083) | 정영진,<발해무덤연구>(≪발해사연구≫1, 연변대학 출판사, 1990) 참조. |
084) | ≪宋史≫권 491, 列傳 250, 外國 7, 定安國. |
085) | 盧泰敦, 앞의 글. |
086) | 金庠基,<金의 始祖>(≪東方史論叢≫, 서울大 出版部, 1974) 참조. |
087) | ≪金史≫권 66, 列傳 4, 完顔勗 및 권 107, 列傳 45, 張行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