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고대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Ⅲ. 후삼국의 정립2. 후백제1) 후백제의 성립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1. 중대에서 하대로
          • 1) 기로에 선 중대 전제왕권
          • 2) 혜공왕 말년(780)의 정변 ― 중대의 종말
          • 3) 하대의 개막과 원성왕계의 성립
        • 2. 귀족사회의 분열과 왕위쟁탈전
          • 1) 왕실가족에 의한 권력독점
          • 2) 무열왕계의 반발과 김헌창의 난
          • 3) 범진골 귀족세력 화합책의 시도
          • 4) 원성왕계 내부의 왕위계승쟁탈전
        • 3. 정치개혁의 실패
          • 1) 율령의 개정을 통한 집권체제의 정비 시도
          • 2) 근시기구와 문한기구의 합체화에 의한 권력집중 시도
        • 4. 골품제도의 퇴화
          • 1) 골품제의 사회적 기반의 축소
          • 2) 진골귀족의 분열
          • 3) 6두품세력의 성장
        • 5. 수취체제의 모순과 농민층의 피폐
          • 1) 귀족 및 사원의 농장경영과 왕경의 번영
          • 2) 농민층의 피폐와 자영농민의 몰락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1. 호족세력의 대두 배경
          • 1) 호족의 개념
          • 2) 호족세력의 대두 배경
        • 2. 호족세력의 대두
          • 1) 낙향귀족 출신의 호족
          • 2) 군진세력 출신의 호족
          • 3) 해상세력 출신의 호족
          • 4) 촌주 출신의 호족
        • 3. 장보고와 청해진
      • Ⅲ. 후삼국의 정립
        • 1. 후삼국기의 신라
        • 2. 후백제
          • 1) 후백제의 성립
            • (1) 견훤의 출신과 군사적 기반
            • (2) 후백제의 성립과정
          • 2) 후백제의 발전과 호족연합
            • (1) 영토의 확대
            • (2) 호족과의 연합
          • 3) 후백제의 대외정책
            • (1) 대신라정책
            • (2) 대고려정책
            • (3) 대중국·일본정책
          • 4) 후백제의 몰락
            • (1) 신검 형제의 정변
            • (2) 신검정권과 그 멸망
        • 3. 태봉
          • 1) 궁예의 출신과 사회적 진출
          • 2) 후고구려의 건국
            • (1) 자립과 세력기반의 확립―하층농민의 포섭
            • (2) 건국―호족들과의 제휴
          • 3) 마진과 태봉의 중앙정치조직
            • (1) 광평성체제의 성립과 호족연합정권-마진
            • (2) 광평성체제의 변화와 전제왕권―태봉
          • 4) 태봉의 몰락
            • (1) 궁예의 정교일치적 전제주의의 추구와 그 지지세력
            • (2) 반궁예세력의 동향과 918년 정변
      • Ⅳ. 사상계의 변동
        • 1. 유교사상의 변화
          • 1) 유교사상의 발달
          • 2) 숙위학생의 활동
          • 3) 유교사상의 변화
        • 2. 불교의 변화
          • 1) 교학 불교의 전개
            • (1) 화엄종
            • (2) 법상종
          • 2) 선종의 흥륭
            • (1) 북종선의 전래와 남종선의 도입
            • (2) 선종 유행의 사회적 기반
            • (3) 선종산문의 성립
            • (4) 선종사상의 경향
          • 3) 미륵신앙
            • (1) 미륵의 출현과 말법신앙
            • (2) 궁예의 이상세계 건설
          • 4) 유·불·선 3교의 융합
            • (1) 유·불 2교의 교섭
            • (2) 유·불·선 3교의 조화
        • 3. 풍수지리·도참사상
          • 1) 풍수지리설의 도입
          • 2) 유식론적 선사상의 성립
          • 3) 지방호족 중심의 국토 재구성안
          • 4)<삼국도>의 작성과 비보사상
          • 5) 도참사상의 전개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2. 후백제

1) 후백제의 성립

(1) 견훤의 출신과 군사적 기반

 신라말에 후백제를 건국하여 옛 백제 지역을 지배했던 인물은 甄萱이다. 그러나 견훤의 출신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지금까지 ‘가난한 농민출신’이나 ‘농민의 아들’ 혹은 농민출신으로 농민반란군을 규합하여 성장한 인물’ 등으로 인식되어 왔다.167) 그러나 견훤이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후백제를 건국할 수 있었을까 하는 점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견훤의 신분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견훤 아버지의 출신과 사회적 지위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三國史記≫와 ≪三國遺事≫의 두 견훤전에 의하면 견훤의 아버지 阿慈介는 尙州 加恩縣 사람으로서 처음에는 농업으로 생활을 영위하다 후에 沙弗城을 중심으로「將軍」이 되었다고 한다. 가은현은 지금의 聞慶郡 加恩邑이고 사불성은 지금의 尙州邑 일대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아자개는 처음에 가은현에서 농사를 짓다가 점차 동남쪽으로 이동하여 신라 9州의 하나였던 상주를 중심으로 장군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아자개가 농사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가난한 농민층은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가난한 농민출신이 갑자기「장군」혹은「城主」으로 성장하기는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인 측면에서 어느 정도 토착적인 기반을 가지고 있던 부유한 농민층이었을 것이다. 그래야만 주변의 촌민들을 규합하여 장군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신라말 지방의 토착세력이 성을 쌓거나 혹은 기존의 성을 중심으로 스스로 성주나 장군으로 칭하면서 반독자적인 세력권을 형성해 가고 있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상주의 장군으로 성장한 아자개의 사회적 지위는 다음의 두 기록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① 갑오년에 尙州賊帥 阿字蓋가 사신을 보내 來附하였다. 왕이 의식을 갖추어 맞이하도록 명하니 毬廷에서 의식을 연습하고자 문무관이 다 班列에 나아갔는데…(≪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원년 9월).

② 阿慈介의 第1妻는 上院夫人이고 제2처는 南院夫人이다. 5子 1女를 낳았는데 그 長子는 尙父 萱이요, 2子는 將軍 能哀, 3子는 將軍 龍盖, 4子는 寶盖, 5子는 將軍 小盖이고 1女는 大主刀金이다(≪三國遺事≫권 2, 紀異 2, 後百濟 甄萱).

 ①에 의하면 상주적수 아자개가 왕건 즉위 직후인 918년 7월에 고려에 내부하였고, 이 때 고려에서는 문무의 관리들을 모아 빈객으로 그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즉 아자개가 귀부하려 하자 고려에서는 대대적인 환영을 표시한 것이다. 이것은 아자개가 독자세력을 거느린 호족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②에서 아자개가 상원부인과 남원부인 등 2명의 처를 두고 있었고, 그 아들을 모두 장군이라고 칭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168) 한편 아자개는 李氏姓을 사용하고 있었다고 한다.169) 이상의 세 가지 점만 보더라도 견훤의 아버지인 아자개는 가난한 농민이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아마도 견훤은 선대부터 이미 부농층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그의 父 아자개대에 이르러서는 기존의 경제적 기반을 토대로 하여 한편으로는 이씨로 稱姓하면서 주변 촌민들의 지지를 얻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일족 및 주변 인물 등을 중심으로 사병적 성격의 군사세력을 규합해 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880년대 후반에 와서 사불성을 근거지로 하여 장군을 자칭할 만큼 일대 호족세력으로 성장해 갔던 것이다. 따라서 견훤 자신은 이미 가난한 농민출신이 아니라 상주지방의 豪族出身이라 해야 할 것이다.

 견훤은 그 후 어떤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군사적 기반을 구축하게 되었을까. 상주호족이 된 아자개의 장남인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하기까지는 두 가지의 매우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 하나는 견훤이 신라의 중앙군(京軍)이 되어 경주에 진출하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신라 중앙군의 자격으로 서남해의 防戍軍으로 파견되어 그 곳에서 방수군의 裨將으로 출세하였다는 사실이다.

 견훤이 신라의 중앙군으로 경주에 들어가게 된 것은 대체로 880년대의 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견훤은 景文王 7년(867)에 태어났으므로170) 아자개가 장군을 자칭하던 때인 885년부터 888년까지는 견훤의 나이 20세 전후에 해당한다. 바로 이 시기에 견훤은 중앙군으로서 入京한 것으로 보인다. 신라의 중앙군이 된 견훤은 곧 서남해의 방수군으로 나아가 비장이라는 독립된 부대의 지휘관이 되었다. 그 곳에서 견훤은 자신의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견훤은 항상 전장에 나가 ‘枕戈待敵’ 하는 등, 그 용기가 士卒보다 앞서 있었으며 은근히 반심을 품고 무리를 모았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신라에 대한 견훤의 태도를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그리하여 그가 반란을 일으키자 불과 한달 만에 무려 ‘5천의 무리’를 모았다고 한다. 이 ‘5천의 무리’는 견훤의 초기 군사적 배경이 된 핵심세력이었을 것이다.

 그러면 5천에 달하는 군사는 어떤 성격을 가진 병력이었을까. 그리고 견훤은 어떻게 하여 그처럼 단기간에 대규모의 병력을 확보할 수 있었을까. 이러한 의문들은 견훤의 초기 군사적 배경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첫째, 견훤이 모았다고 한 ‘5천의 무리’ 속에는 견훤이 서남해 방수군의 비장으로 있을 때 그와 함께 ‘침과대적’하던 견훤 휘하의 병사들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그는 신라 중앙군으로서 서남해에 파견된 후 주변의 군인들에게 남다른 용기를 보였고 인심을 얻기 위해 부심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 방수군이야말로 견훤을 따라 武珍州(光州)에 들어갔던 주된 병력이었을 것이다. 둘째, 서남해 일원에서 해상활동에 종사하던 海島출신의 인물들도 견훤의 초기 군사적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견훤이 방수군으로 파견된 후 열심히 노력하여 비장이 된 곳은 바로 해상활동의 요지였다. 따라서 이 지역 일대의 해상세력들은 자연 견훤의 세력에 흡수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후백제의 성립 초기부터 서해안 일대의 요충지역이 견훤과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었던 점과 중국과의 외교에서 궁예나 왕건에 비해 견훤이 월등 앞서 있었던 점으로 보아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셋째, 견훤의 초기 군사적 배경 중에는 상주 출신의 견훤 先代의 사병들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 숫자는 비록 많지 않았을 것이지만, 그러나 이들은 견훤 휘하의 방수군들과 마찬가지로 견훤의 측근으로 활동했던 핵심세력이었을 것이다. 끝으로 무진주 일대의 토착세력들도 견훤의 군사적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견훤이 처음 반란을 일으켜 무진주에 들어가자 가는 곳마다 메아리쳐 호응했다고 한 사람들은 바로 이 일대의 주민 등 토착세력들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중에는 이미 농민 반란군에 끼어「초적세력」을 형성하고 있다가 견훤군에 포함되기도 했을 것이고, 이 일대의 호족세력들도 점차 견훤의 군사적 기반으로 병합되어 갔을 것이다. 무진주 일대의 호족세력들은 이 곳이 점령된 후에 견훤군에 포함된 경우가 많았을 것이므로 견훤의 군사적 기반 중에는 맨 나중에 결합되었을 것이다.

167)다음과 같은 대부분의 한국사 개설서에서는 견훤을 가난한 농민출신으로 서술하고 있다.

韓㳓劤,≪韓國通史≫(乙酉文化社, 1970), 124쪽.

邊太燮,≪韓國史通論≫(三英社, 1986), 148쪽.

朴龍雲,≪高麗時代史≫上(一志社, 1985), 36쪽.

한편 李基白,≪韓國史新論≫(一潮閣, 1976)에서도 ‘가난한 농민출신’이라 하였으나 최근에 나온 新修版(1991)에서는 ‘호족출신’으로 바로잡아 놓았다.

견훤의 출신에 대해서는 申虎澈,≪後百濟 甄萱政權硏究≫(一潮閣, 1993)에서 자세하게 언급하였다. 아울러 이 글은 주로 이 책을 참고하여 서술하였으므로 구체적인 전거의 제시나 논증과정은 이 책을 참고하기 바란다.
168)沙伐城 將軍 阿慈介와 尙州賊帥 阿字蓋가 동일인물이 아니라 同名異人이라거나(安鼎福,≪東史綱目≫附卷上上), 또는 阿字蓋와 견훤과는 父子之間도 아니며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주장이 있다(金庠基,<甄萱의 家鄕에 대하여>,≪東方史論叢≫, 서울大 出版部, 1974, 199쪽). 그러나 阿慈介와 阿字蓋는 동일인물이 분명하다. 같은 지역, 같은 시기에 同名異人의 세력가가 2명 있었다는 것은 우연으로 받아들이기 곤란하다. 아울러 기록에 따라 ① 阿慈介(≪三國史記≫권 50, 列傳 10, 甄萱 및 ≪三國遺事≫권 2, 紀異 2, 後百濟 甄萱), ② 阿玆蓋(≪三國史記≫권 12, 新羅本紀 12, 경명왕 2년), ③ 阿字蓋(≪高麗史≫ 권 1, 世家 1, 태조), ④ 阿字介(≪東史綱目≫ 附卷上上)로 각각 차이가 있으나 이들 모두 견훤의 아버지에 대한 異記에 불과하다. 특별히 구별할 필요가 없을 경우를 제외하곤 모두 阿慈介로 통칭하였다.
169)≪三國遺事≫권 2, 紀異 2, 後百濟 甄萱傳에 의하면 아자개는 본래 ‘李’씨였으나 후에 견훤이 ‘甄’으로 성을 고쳤다고 한다.
170)견훤의 出生에 대해서는≪三國遺事≫ 견훤전에 ‘咸通八年 丁亥生’이라는 기록이 유일하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